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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구조적 진단 체계와 주이상스
다음으로 저자는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으로 대별되는 아주 간단한 라캉 진단 체계의 구조적 면모를 드러내준다. ..라캉의 진단 체계는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구조적 진단법으로서, 배후의 원리, 이른바 그 기제를 캐는 것이다. 현상들을 발견해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현상들의 배후에서 그 현상들을 조종하는 구조적인 망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우울증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그것이 어떤 구조에 의해 지탱되는지에 따라서 다른 진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여기에서 라캉의 진단법의 요체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주이상스>이다.
주이상스란, 인간의 육체가 경험하는 원초적인 쾌락, 육체와 언어의 경계선 위에 있는 일종의 신화적인 쾌락이다. 이는 문화의 테두리에 의해 한계지어진 <쾌락 원칙>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질적인 면에서는 <죽음 충동>이고 양적인 면에서는 영원한 <과잉분>이다.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은 각각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은 각각의 주체가 바로 이 주이상스를 어떻게 주체화하느냐에 따라 도출된 상이한 입장들이다.
정신병은 언어의 세계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 폐제라는 기제에 의해서 생겨난다.
폐제는 어떤 요소가 한 번도 존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상징계 밖으로 거부해 버리는 정신병 특유의 기제로, 폐제된 요소는 무의식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부터 축출된다.
그리고 이때 거부의 대상은 바로 <아버지의-이름>이다.
결국 정신병 환자는 주이상스를 고정시킬 만한 부권적 은유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타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신경증은 환자가 언어의 세계 속으로 충분히 편입되어 주이상스의 과잉분을 배출해 냈지만, 그러한 주이상스의 배출을 불만족이나 불가능성의 형태로 해석하여 그 과잉분에 집착하는 형태이다.
다시 말해 신경증은 억압이라는 기제에 의해 생겨나는데, 억압은 어떤 생각들 또는 기억들이 의식으로부터 추방되어 무의식에 감금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주체가 최초의 대상, 타자와 맺은 관계의 양상에 따라 다시 강박증, 히스테리, 공포증으로 나누어진다.
주체와 타자(엄마)는 타자가 가지고 있던 대상을 공유함으로써 관계를 맺는데, 아버지의-이름을 통해 이 관계는 분리를 겪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체가 원래 타자가 가지고 있던 대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바로 강박증이다.
강박증과는 반대로 히스테리 환자는 분리가 일어나면 자신의 상실을 엄마-타자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대상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결국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의 욕망을 지속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하게 된다.
공포증은 아버지의 금지나 이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다른 것을 가지고, 자식과 계속 결합되어 있고자 하는 엄마의 욕망을 중화시켜야 하는 경우이다.
도착증은 주이상스를 즐기는 <타자>를 상정함으로써, 그 배출된 주이상스를 복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도착증은 부인이라는 기제에 의해 생겨난다. 부인은 도착증에서만 나타나는 특유한 작용으로, 거세에 대한 부인과 함께 그에 대한 인지라는 두 측면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세를 부인하면서 주체는 스스로를 타자의 대상의 자리에 위치시키려고 한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그는 자신이 바로 엄마에게 결여된 <그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착증자에게는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이 없다. 그리고 도착증은 부권적 은유로부터 소외된 것이기 때문에 일정 연령이 지나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은 각각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이처럼 정신병과 신경증, 도착증은 각각 다른 기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치료법 또한 달라야 한다. 정신병의 경우, 부권적 은유는 일정 연령을 넘어서면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부권적 은유가 회복될 수 없는 연령에 이른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다른 정신 질환을 치료할 때처럼 분석가 자신을 타자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환자에게 더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정신병 치료는 환자가 부권적 은유 대신 착란적 은유를 구성할 수 있도록, 환자의 착란 활동을 권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반면에 강박증 치료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강박증자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타자의 욕망과 대면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히스테리 치료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협상 테이블을 뒤집는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가 <의사 선생님, 말씀 좀 해보세요. 도대체 제게 문제가 되는 게 뭐죠?>라고 묻는다면,
분석가는 <당신은 저한테 어떤 말을 듣기 원합니까?>라고 되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체의 담화 형태를 바꾸어 타자로부터 지식을 받거나 기대하길 멈추게끔 하는 것이다.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귀착했다고 보면서 그러한 암초를 넘어 정신분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실재’와 ‘대상 a’ 개념이다. ..이미 대상 a를 도출한 바 있는 라캉은 이제 대상 a를 중심축으로 삼아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들’을 전격 수정하게 된다.
생전에 라캉은 대상 a 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발명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진술의 이면에는 그가 어떻게 프로이트와 다른지가 함축되어 있다. 라캉은 현대 언어학 덕분에 프로이트로부터 ‘아버지의 이름’ 을 도출해냈지만, 어찌되었건 그것을 발명한 사람은 라캉이 아니라 프로이트이다.
라캉이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순간은 ‘아버지의 이름’ 을 복수화하고 자신의 관심을 대상 a로 돌리면서부터이다.
대상 a를 중심으로 삼아 정신분석을 지탱하는 ‘네 가지 개념’ 을 위상학적 관점에서 정초짓는 것이다.
라캉이 제시하는 네 가지 개념은 ‘무의식’, ‘반복’, ‘충동’, ‘전이’ 이다.
라캉은 개념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그것들에 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주체’와 ‘실재’ 라는 개념이 네 가지 근본 개념들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주체’ 란 시니피앙의 주체, 시니피앙에 의해 전복된 주체를 의미하며, ‘실재’ 란 대상 a 를 의미한다.
시니피앙에 의해 전복된 주체가 상실된 주체라면, 대상 a는 그러한 상실된 주체를 지탱하고 결정짓는 리비도적 실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상실된 주체가 소외의 결과라면 대상 a는 분리의 결과이다.
라캉은 ‘소외’와 ‘분리’ 이론을 통해 네 가지 개념을 정립한다. 이는 라캉이 시니피앙에 근거하는 무의식적 주체와 욕망 이론을 충동과 환상 등으로 요약되는 리비도 이론과 접속시키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소외 개념은 주체 이전에 타자, 언어의 질서가 존재하며, 따라서 주체가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질서 속에서의 소외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말을 하는 주체는 사물의 살해를 유발하는 언어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다.
.. 그가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분리’ 이론이다. 분리란 상징적 질서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의 불가능성, 타자의 결여 등을 경유해 최소한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이다.
(소외가 빗금 친 주체(S)가 탄생하는 과정이라면, 분리는 대상 a가 연역되는 과정이다. )
1950년대의 라캉이 소외 이론을 대표한다면, 분리 이론에 입각한 세미나 11권에서 그는 대상 a를 중심으로 충동의 구조를 재정립하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전이 개념을 완성한다. 새로운 전이 개념의 완성은 정신분석의 종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는데, 라캉은 세미나 결론부에서 ‘환상을 넘어서’를 정신분석이 도달하는 종착점으로 상정한다.
정신분석의 종결점을 환상 저편으로 상정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에 부딪혀 ‘환상 이편’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라캉이 프로이트를 넘어 라캉 자신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계기이다.
기존의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테제로 압축될 수 있다면, 이제 라캉은 무의식에 대한 구조주의적 관점을 넘어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때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그것을 실재와 접속시키는 것이다. ..
.......
그의 ‘반복’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때 반복은 더이상 ‘시니피앙의 반복’이 아니라 ‘실패의 반복’이다.
반복은 시니피앙의 자율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앙이 어떻게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한 장면을 반복하고,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상징을 통해 포섭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러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란 항상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연쇄가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실재는 그러한 연쇄에 의한 상징화가 실패하는 지점이다. 상징적인 것과 실재 사이에 간극이 있는 한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이 실패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과 실재가 접속되는 또다른 계기는 바로 성욕이다. 1950년대에는 충동을 타자의 요구와 접속시켜 해석해낸 라캉은 이제 충동을 대상 a와 접속시켜 새로운 충동 개념을 제시한다. 시니피앙의 연쇄와 실재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할 때, 라캉이 그러한 연쇄에 의해 표상되지 못하는 실재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욕이다.
성욕은 시니피앙에 의해 완전히 표상되지 않으며, 성욕의 수준에서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성욕은 동물의 성욕과 달리 유기체적인 욕구가 아니다. 인간의 욕구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구조화는 단순히 상징적 질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가 실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충동이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동이 하나의 전체로 종합되지 않는 파편화된 ‘부분 충동’이라면,
이는 충동이 시니피앙의 연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성적인 타자를 겨냥하지 못하고 대상 a 중심을 맴돌기 때문이다. 라캉은 충동을, 육체가 상징적 질서를 경유하면서 이루어진 원초적 상실의 잔여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왕복 운동으로 기술한다
<리비돌로지 언어를 먹는 존재들의 성과 욕망, 죽음의 지형도 >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창한 20세기 후반의 라캉은 이 첫번째 탐험가의 고난 어린 발굴의 흔적들로 거슬러 올라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길을 열고 인간의 성이 갖는 다양한 함의를 추적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적인 존재이며 그러한 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주체화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이 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가 성욕의 장에서 자신의 대상을 구성하고, 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고유한 원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이 이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이유는 그렇게 성적 실천의 장에서 구성되는 대상이 궁극적으로는 인간 활동의 모든 장의 대상들을 추동하는 원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그러한 원인의 위치에 있는 비표상적 대상을 ‘대상 a’라 불렀다.
그는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온 신체의 일부가 어떻게 다른 모든 대상을 유인하고 결정하는 특권적인 대상을 구성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말하기’ ‘보기’와 같은 인간 행위는 ‘의사소통’이나 ‘지각’의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말과 시선은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가 그 자체로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배설물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렇게 잘려나간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척출된 어떤 상실된 대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리비도의 벡터가 작동한다. 시선, 목소리, 똥과 같은 배설된 내적인 대상들은 타자의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 리비도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주축이 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충동의 대상들은 말의 편린들에 실리거나 이미지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나르시시즘, 욕망, 주이상스로 구성된 리비도의 장을 활성화한다.
우리가 읽게 될 글들은 바로 이 ‘대상’이란 측면에서 접근한 인간 정신의 지형도, 전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될 지형도이다. 우리는 그러한 지형도를 ‘리비돌로지’라고 부른다.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 애도와 멜랑꼴리의 정신분석 >
무의식,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워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한 삶의 흔적들이다. 자신 안에 있는 낯선 타자, 무의식이란 존재는 어떤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힘이나 야만적인 힘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했지만 잊어야 했던 연인들의 흔적이며, 우리가 되고자 했지만 될 수 없었던 이상의 흔적들이고, 우리를 낳아 준 사람들, 우리를 길러 준 사람들이 건넨 말과 욕망의 흔적들이다. 우리 안의 타자, 무의식이란 개념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타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곧 우리의 내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고, 타자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라고 오해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있는 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면, 그렇게 낯선 타자의 모습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그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마치 운명처럼 결정된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타자와의 분리를 함축하는 ‘성숙’이란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을 전제한다.
자신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은 자신이 지식으로 쌓아 올린 방어벽의 뒤에 있는 맨얼굴을, 타자의 욕망 앞에서의 불안을 맨눈으로 목도하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인간은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타자와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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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라깡 칼리지’ 라는 백상현 이라는 분의 유투브 채널을 구독 중인데, 자세히 본적은 없다 ^^; 라캉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기는 해야 할텐데 .. 손대기가 ..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