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고 하는 말은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사람이 과거에 똑같은 그 사람이라면 백날 태어나봐야 쓸데없이 겪는 진통이요 거듭남이다. 새로 태어날 때 그 사람 안에 전혀 다른 분이 나셔야 한다. 성령으로 주님이 우리 안에 나셔야 한다. 다른 자아, 곧 타자가 들어오셔야 비로소 진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나시고 우리 안에서 사시는 삶 곧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새 빛이 비취었다. 영광의 왕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그 어떤 세속적인 위엄이나 외양적으로 주목할만한 무엇이 없었다. 왕가의 자녀도 아니었고 부자의 가문에서도 태어나지 못했다. 그분은 가난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사 53:2) 그는 ...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만일 그분이 헤롯의 아들이나 그 당시 이름이 같았던 대제사장 예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분은 세상의 명예나 재물이나 인간적인 위대함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셨다. 그분이 출생한 환경은 초라했고 자라난 환경은 거칠었다. 그 무엇도 사람들로 하여 그분의 외형적인 무엇에 이끌리도록 해서는 안 되었다.
오직 하늘의 진리 곧 참사랑과 하나님 약속의 말씀만이 사람들을 바른 생명으로 이끌 수 있었다.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예수가 그들 안에 나시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세속적인 위대함에 이끌려서 혹은 인간적인 정에 끌려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교리 공부를 좀 했다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다고, 어떤 사역에 동참한다고 다 거듭난 것 아니다. 더 핵심적인 질문은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가 난 사람, 예수로 거듭난 사람은 다르다.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평판에 요동하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잔잔하고 깊은 물처럼 고요하다. 심지가 깊고 강해서 어떤 바람에도 평안을 잃지 않는다. 그분이 그 안에서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구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이다.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그분이 지금도 우리 마음에서 태어나셔야 한다. 베들레헴에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분이 베들레헴 같은 우리 마음에 오셔야 한다. 그분이 나서야만 마구간 같은 우리 영혼이 비로소 하늘의 빛으로 밝아지고 누추한 삶은 참된 고고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실 때 그분은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아담이 타락한 후 4천 년 동안 인간은 무력해지고 연약해졌다. 그런 연약한 육신을 입고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이 오늘도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승리할 수 있다. 비록 여인이 낳은 자지만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헤롯의 감방에서 죽어간 선구자 침례 요한처럼 수많은 유혹과 시험에서도 능히 이길 수 있다.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 안에 구주가 나시길 기도드립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로 오셔서 우리 안에 사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지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주님을 통해 배우게 하소서. 주님 오셔서 우리 안에서 흥하시고 우리의 옛사람은 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