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에 스며들다/김남숙
‘당신 요즘 갑자기 늙어 보여’ 외출준비를 하던 남편이 한 마디 불쑥 던지고 나갔다. 돋보기를 쓰고 거울을 보니 웬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손톱만큼 자란 새치 아래로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완연하고 입술 주변으로 세로 주름까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얼굴에 탄력이 줄고 주름이 느는 만큼 시력도 떨어지고 있어서인지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드라이기 볼륨을 높여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사람은 생물이니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애써 의연한 척 해 보지만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거의 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하룻밤 묵어갔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벗는데 머리카락이 은발이었다. 키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친구에게는 은발이 이국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짧게 커트를 하고 6개월만 지나면 은발이 된다고 한다. 그 기간만 참으면 된다면서 염색을 그만하면 어떠냐고 권했다. 우리는 젊은 시절 읍사무소 민원실에서 함께 일했다. 그녀와 나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아이들 챙기며 출근 준비하는 아침 시간은 일분일초가 아쉬웠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색조 화장을 안 하고 정장 바지에 단화를 신기로 했다. 80년대 말이었다. 그때는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은 후, 굽 있는 구두를 신는 것이 직장 여성의 보통 차림새였다. 우리들의 파격적 행보는 선배들의 눈총을 받고 민원인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젊었기에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요즘 염색약에는 천연재료가 많이 들어간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두피를 통해 몸에 축적된 약의 독성을 생각하면 염색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더구나 염색이 눈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해서 끊어볼까 하던 중에 친구의 은발 머리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다니는 염색 방은 미용실보다 가격도 만만하고 분위기도 편안하다. 나처럼 새치 염색을 하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원장은 얼굴도 팽팽하고 늘 활기차게 일을 해서 나와 동갑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날은 얼굴에 기미가 도드라져 보였다.
“비싼 크림 사 바르고, 수시로 피부과에 다녀도 나이는 못 속이겠네요.”
피곤해 보인다는 내 말에 거울을 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나이 들면 어차피 늙는 건데 너무 집착하지 말자고 입바른 소리를 하며, 나는 염색을 그만하고 싶으니 머리를 짧게 잘라 달라고 했다.
그녀는 나 같은 손님들이 많아 준비해두고 있었다며 안으로 들어가 하얀 가발을 들고 나왔다. 은발이 내게도 어울리기를 바라며 그녀가 가발을 내 머리에 씌우는 동안 감았던 눈을 뜨고 거울을 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에 싸인 내 얼굴은 돋보기를 쓰고 갑자기 주름살을 발견했을 때처럼 낯설고 초라해 보였다. 나는 얼른 가발을 벗고 진한 갈색으로 염색해 달라고 주문하며 쓰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점차 외출이 줄어들자 다시 염색을 멈추고 싶었다. 감염을 무릅쓰고 염색 방에 드나드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피가 가렵고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염색 탓인 것만 같았다. 염색을 안 하고 6개월쯤 지나자 친구 말처럼 앞머리 전체가 하얗게 되었다. 나는 거울을 멀리하며 우울한 시간을 견디었다. 비슷한 친구 몇이 은발이 된 모습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자 염색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는 측과 아직은 염색이나 화장으로 외양을 가꾸어야 한다는 측으로 갈리었다. 한 친구가 아직 머리 전체가 희지 않아서 얼룩덜룩 보기 흉하다며 자기는 바르면 보라색으로 변하는 ‘트리트먼트제’를 사용한다고 했다. 나는 당장 같은 제품을 사서 발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그대로 남고 새치는 보라색으로 변했다. 야하다고 할 만큼의 환상적인 보랏빛은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노년으로 갈수록 차츰 시력이나 청력도 약해지는 것은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흐릿하게 보도록 한 조물주의 배려가 아닐까? 그 과정들이 천천히 스며들기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은발이 되어도 자연스레 사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랜 염색으로 그런 친화의 과정을 놓치고 말았으니, 중간 단계를 유지해 주는 제품을 써서라도 충격을 줄이고 싶은 것이다. 검정에서 갑자기 흰색으로 변하는 것보다 보라색을 거쳐 천천히 흰색으로 바뀌면서 은발도 언젠가는 내 눈에 친숙하게 스며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