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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오늘도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과 우리 것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대림절을 맞아서 우리 이렇게 한 번 더 인사합시다.
오시는 주님 마음으로 준비합시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재미있는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것인데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연설을 하고 나와 돌아가는 길에 프랑스 대사관을 향해서 가는 중에 거리에 잠시 고립되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유를 봤더니 미국 대통령 호송 차량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가셔야 되기 때문에 길이 통제가 된 것이죠. 그 경찰에 의해서 도로가 통제가 되었고 사람들이 결사가 지었다. 그래서 그때 마크롱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당신 때문에 지금 가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마크롱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통령도 그때 당시에 UN에서 이렇게 시간을 갖고 돌아가 오는 길에 길이 막혀서 다른 곳으로 우회해서 갔다 그런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거대한 권력 앞에서는 다른 나라 대통령도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지, 길을 비켜줘야 되고 또한 통제되어져야 되는 그러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죠.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왕의 길, 권력자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힘 있는 자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길은 열리게 돼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멈추게 되고요. 도시는 통제가 됩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일지라도 멈춰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말씀합니다.
보라 내 왕이 내게 임하나니 분명히 왕이 임하는데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가신다.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는 거예요. 왕이 임하시는데 그분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가신다. 완전히 다른 세계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왕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고 다른 사람의 길을 막는 것이라면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위해서 가장 낮은 길로 나귀의 길, 겸손의 길로 이 땅에 오셨다.
할렐루야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왕은요. 위를 올라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보좌를 포기하시고 내려오십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세상의 왕은 세상을 통제하려 하지만 예수님은요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시는 놀라운 은혜의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대림절 두 번째 주 오늘 주제는 겸손히 오신 왕 그분에 대해서 함께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질문을 좀 던져봐야겠죠. 예수님은 왜 그토록 겸손하게 오셨을까?
그리고 겸손으로 오신 그 의미는 뭘까?
더 나아가서 그럼 나는 어떻게 겸손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말씀의 나눔이 있어야겠습니다. 첫 번째 겸손은 하나님의 본심이며 왕의 성품이고 구원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이 겸손이고요. 왕의 성품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스가랴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예언했던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상황이 어떻습니까?
국가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옛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는 대부분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보라 왕이 오신다. 너희들이 지금 황폐한 이 땅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지만 왕이 내게 임할 것인데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그것도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그분이 오신다.
여기서 우리는 눈여겨봐야 할 단어가 있는데 바로 겸손하여라는 거죠. 이 말을 원어로 풀면 고통받는 자, 자신을 낮추는 자 스스로 비우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다시 회복될 것이고 왕이 임할 것인데 그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는 겸손으로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그렇게 선포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 이 겸손이 하나님의 본심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실 높은 보좌에 계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높은 보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이 땅 가운데도 찾아와 주시는 분. 그래서 이사야 57장 15절은 이렇게 선포해 줍니다. 우리 큰소리로 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합시다. 시작.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해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그 거룩하고 존귀하신 분이 높은 거룩한 곳에만 계셔도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동시에 나는 통회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는 사 그와 함께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늘도 이 시간 겸손히 주님 앞에 서는 자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내가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으로 엎드릴 때에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런 예배자가 기쁜 거죠. 내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예배하기 위해서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이 나 그냥 두지 아니었어 함께하시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찾아오셨고 모세를 부르실 때 높은 왕궁에 있을 때 오시지 않았어요. 미디안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때 찾아와 떨기나무에서 만나주셨죠. 다윗을 선택할 때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 왕을 뽑을 때에 형 첫째 막 왕같이 생겼던 엘리압을 뽑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린 연약해 보이는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지진이나 바람같이 막 굉장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하게 하나님의 방식은요. 언제나 낮은 길을 통해서 높이심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사셨던 분이시죠. 그래서 예수님의 겸손의 선택은 바로 왕의 성품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겸손이라고 하면 별것 아닌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겸손은 착한 사람의 미덕이다. 뭐 이 정도까지만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왕의 권위에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을 말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진짜 강한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거든요. 강하지 못한 사람은 겸손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진짜 위대한 사람이 겸손의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스스로 낮출 수 있다라는 것이죠.
실제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어쩌면 그때 당시에 보기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맞이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를 들으면서 즐기기 위한 퍼포먼스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을 따라 이 세상을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계시라. 그래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 마태복음의 이 스가랴 말씀을 어떻게 인용했는지 우리 21장 5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내 왕이 내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라 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동일하게 겸손하여라는 단어를 쓰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헬라어로 보니까 프라우스라는 단어를 써요. 그런데 이 단어는 오히려 겸손이 겸손이라는 말도 맞지만 오유라는 말로 제일 많이 쓰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성품이 부드러운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넘어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절제할 수 있는 겸손, 순종의 삶, 통제받은 권세 안에 살아가는 삶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온유라는 뜻을 가끔 설명해 드리잖아요. 초원의 야생마가 주일의 가장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길들여진 말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주인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 오늘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낮아지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 그 속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진짜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낮추셔서 이 땅에 오신 분. 그래서 같은 내용의 말씀이지만 스가랴에서는 이제 오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고난을 감내하고 낮아지는 겸손의 왕을 중점적으로 선포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절제된 권세의 겸손, 그것을 바탕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타고 입성하신 것은 나는 힘으로 다스리는 왕과 같지 않다. 나는 겸손으로 다스리는 평강의 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 겸손하심으로 결국 구원의 통로가 되셨다. 따라서 겸손은 그냥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통제받는 것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우리는 빌립보서 2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죠.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하나님의 낮아지심, 그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냥 낮아지시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끝은 십자가 그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의 은총이 임할 수 있도록 여러분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도 구원하시라는 그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요 겸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겸손이 이 땅에 오신 이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이 땅의 겸손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겸손의 길을 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의 삶이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길이 되어 버린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겸손을 보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길을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길 삼아 또 하나님의 사역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의 겸손은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존귀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겸손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통해서 구원의 은총이 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구원의 통로가 되는 은총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교만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죄 삼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해나가신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같이 한번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시작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느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할렐루야.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처럼 겸손은 하나님의 본심이에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 안에는 성품이시고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분이시죠. 이것이 겸손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혜. 두 번째. 그럼 우리가 이렇게 살펴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사셨는가? 겸손을 보여주셨다. 겸손의 삶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을 삶의 현장 가운데 보이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러했죠. 예수님은 아주 멋진 왕궁에 태어나지 않았어요. 동방 박사들은 왕궁을 찾아갔지만 예수님은 왕궁으로 내려가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가장 낮은 곳, 가장 천한 곳에 예수님은 태어나셨어요.
그것은 이제 지나가고 우리 예루살렘 입성부터 예수님이 어떤 겸손을 보여주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 그것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 즉 보여주기 위한 겸손의 행진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타고 오신 것은 군마가 아니었던 것이죠. 작고 초라한 나귀 새끼. 오늘 본문도 의도적으로 나귀 작은 것 곧 나귀 새끼 이렇게 반복하면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뭘 강조해 주는 거예요?
작다는 거예요. 작다. 당시 나귀라는 것은 짐을 나르는 짐승. 그래서 일꾼들이 짐을 나르기 위해서 썼던 노동용 짐승이 나귀였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이죠. 예루살렘 입성 가운데 사실 보통 때 같으면 군대가 있어야 하고 호위병들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실 그렇습니다. 악한 왕일수록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보이기 시작하고요. 불안한 왕일수록 더 많은 군대를 거느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을수록 더 높은 성을 쌓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과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위대한 신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 따라서 예수님은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셨기 때문에 세상 누구보다 더 낮아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야.
여러분 이 외침이 별것 아닌 게 아니에요. 그들은 정말 우리의 왕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라고 외쳤습니다. 어쩌면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굉장히 폼나는 순간 아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주변에 사람들이 쫙 깔려 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들어갔는데 물론 나귀 새끼를 타고 가지만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칩니다.
그것만 했습니까? 자기 옷을 깝니다 뿐만 아니라 가지를 흔들면서 외치는 거예요. 그 환호성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 어떻겠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깨가 좀 올라가지 않겠어요?
기분도 좋고 그래 내가 이 정도지 하면서 유지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한 열광적인 환영 앞에 있었던 예수님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그 환호에 취하지 않고 스스로 그 자리에서 높아지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환호성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걸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그 환호성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거죠.
그의 삶의 목적은 십자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길을 가기 위해 걸어갔다. 그래서 여러분 겸손은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만 걸어가는 거 그래서 아무리 칭찬을 들어도요.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난을 들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마음 이것이 겸손한 마음이에요.
예수님은요. 그 누구의 칭찬에도 교만해지지 않고요. 그 누구의 비방 가운데도 낮아지지 않으신 분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걸어가셨던 우리 주님. 그래서 여러분 이 예수님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었어.
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겸손하신 분 좀 매치가 됩니까?
겸손하신 분이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뒤엎으면서 소리를 질러가면서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정확하게 제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은 뭐예요?
이곳은 만민이 주는 장사꾼들에 대해서 막 호통치면서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셨잖아요. 여러분 점수는 단순히 미소 짓고 고개 숙이는 그 동전이 아니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삶. 그것이 바로 그래서 때로는 거룩한 분노도 일어납니다. 겸손한 사람들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지는 모습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세운 그 모습을 우리는 생전에서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여러분 진짜 겸손은 사람에게 구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숨기는 것이 진짜 겸손은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이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후에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행하고 결국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제자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겠죠. 왜 종들이 보통 주인의 발을 씻어주기 때문에 예수님은 왕 중의 왕 주인 중에 주인 제자들에게는 스승이요. 아주 위대하신 분인데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들어주신다 전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데 거기에 누구도 포함돼 있습니까?
가롯유다기 때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러면 발을 씻겨주고 싶겠어요?
안 씻겨주고 싶겠어요?
여러분이면 이게 간단하게 500만 원을 나게 떼어먹고 도망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가서 그날 저녁에 나를 사랑한다. 다들 씻겨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것도 500만 원이 아니라 생명을 지금 생명을 받거든요. 그날 그 밤 볼 수 있어서 소자의 발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데 거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거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내가 지켜줄 수 있는 여러분 그래서 겸손은 조건 없는 사람이에요. 상대가 칭찬해 줄 때만 기분 좋은 말할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대부분의 사람은 칭찬하는 사람을 숨겨주고 내 마음이 흡족한 사람들이 분비되는 건데 우리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쓰기도 하셨던 할렐루야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내가 이렇게 너희에게 모두를 사랑하는 당신이 되었으니 자들아 너희들 믿었습니다. 예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감사하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를 위해서 손자까지 줄 아는 거죠.
그게 예수님 마음 아니겠어요? 우리가 예수 믿어서 사는 게 무엇입니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겸손은 낮아지는 연습이 아니라 사랑, 즉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용기 할렐루야 그래서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먼저 사과할 줄 아는 용기, 손을 내밀 줄 아는 용기, 남을 세워줄 줄 아는 용기 별로 하고 싶지 않으시죠?
그런데 그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예수 때문에 모욕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용기 이러한 용기들이 바로 겸손의 모습이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겸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대림자 예수님의 이 귀한 겸손을 닮아가는 복된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겸손의 길을 가야 돼요. 세 번째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 앞에 나누었듯이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고요. 겸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 삶을 사는 거예요. 이 질문을 던져보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처럼 겸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힘, 내 주장, 내 자존심,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오늘 그 질문을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대림절 두 번째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의 삶으로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겸손은 나를 비우는 것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겸손이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비운 텅 빈 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비운 자리에 하나님을 좌전케 하시는 것, 왕으로 모시는 것.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텅 빈 자리에 하나님이 좌정하시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종한 은혜가 있어 베어주신다. 내가 높아지려고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낮아지고 겸손하게 나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모셨더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사는 나의 삶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높은 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요?
내가 높아지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숨지 무릎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위치 해 주십시오. 여러분 그게 진짜 복음이 있는 삶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삶,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 아니겠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여러분 겸손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오늘 왜 나부터 겸손을 시작해야 됩니다. 여러분 하지 아 하나님께서 내가 죄인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보내주셨어.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주님이 먼저 찾아갈 수 있다. 엘리야. 그래서 우리는 사실 이럽니다. 안 계시면서 아니 당신이 용서해야지.
당신이 잘못했잖아. 당신 당신 이 이야기를 참 많이 해.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 그 내가 죄인 됐을 때 하나님께 간 게 아니잖아요.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서 나를 찾아와 주셨다. 그래서 너를 먼저 말하지 않고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저 사람 먼저 사과해야지 저 사람이 먼저 양보해야지.
이걸 세상 사람들이 말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 내가 해야 될 방식은 바로 나 여러분. 그래서 내가 먼저 낮아지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가정이 살아납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는 그 사람을 통해서 교회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낮아짐을 통해서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찬양 가사 중에 그런 가사 있죠. 내가 먼저 힘내 지겠다.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주지 다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이 가사를 보면 지금 하고 싶은 마음과 안 하고 싶은 마음 반 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손을 내미는 게 맞는데 인간의 마음은 아니야. 아직 내가 손을 내밀면 안 돼.
그렇죠. 하나님의 마음은 용서하라고 말씀을 주셨는데 내 마음 가운데는 안 돼. 내가 어떻게 자존심이 지금 먼저 용서해 안 돼 이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은 야 웃어라 웃어라 그러는데 지금 하나님 웃을 일입니까?
그러고 인상 쓰고 있는 거예요. 갈등 가운데 있는 나의 삶.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내 마음이 더 주장돼서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할 때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는데 그러면서 한탄하잖아. 나는 도대체 뭔가 예수님 믿는 사람인가 세상 사람인가?
여러분 그럴 데 없습니까?
예수 믿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주장하는 것이 부딪혀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자리. 그때 여러분 영적 선택을 할 줄 아는 지혜 그래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셨겠지. 겸손의 왕으로 오셨는데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오셨는데 왜 예수님이 선택한 그 길을 가야 내가 그리스도인이지 그렇게 결론을 도달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성숙도가 있는 사람, 점점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하면 손해 볼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해지면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살려 할렐루야. 그래서 절대 손해 보지 않아요. 여러분 겸손하면 우선 내 마음이 부드러워지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겸손하면요 관계가 부드러워집니다. 결국 겸손은 나를 위한 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내려놓아야 할 자존심이 있느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겠습니다. 끝까지 고집하는 주장이 도대체 뭐냐 또 묻습니다. 먼저 사과해야 할 게 혹시 있느냐 또 묻습니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야지만 갈등이 끝인데 아직도 멈춰 있는 게 있느냐 여러분 이러한 것들 중에 한 가지라도 생각이 나서 실천한다면 이 대림절 기간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며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좋은 편을 뜻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가지는 사도 바울이 오죽했으면 오라 나는 권고한 자로다 그렇게 이야기했겠어요.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이 내 안에서 싸운다잖아요. 싸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알겠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싶지 않은 이 마음과 갈등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자꾸 우리는 좋은 편 선한 편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길을 가야 하는데, 세상의 왕들과 다르게 우리 주님이 오셨던 겸손을 기억하셔서 겸손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는 더 주세. 하나님의 본심이 정말 왕의 성, 예수님의 겸손이 그 겸손이 부하의 아시 할렐루야 예수님이 이 땅의 겸손을 우리에게 겸손을 달라고 말씀하셨다.
정리가 되셨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면 돼요?
한 주 동안 내가 겸손히 해야 될 게 뭘까 고민하시게 생각나는 게 있으면 즉각 실천해서 하나님의 기쁨의 자리를 맛보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주 동안 부드러운 말을 좀 해주시오. 좋은 말씀 좀 나눠주시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