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와 서복

BC 221년 마침내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 최초로 전국을 통일 하였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하여 군현제와 법률제 실시와 화폐, 도량형, 문자를 통일하고 군왕으로써의 그의 업적에 이름을 날린것에 비해 분서갱유, 병마용과 만리장성 축조하며 수 많은 백성과 지식인들을 죽게하여 진시황은 최고의 폭군이란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그는 ‘무병장수’의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위해 신하들에게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게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방팔방을 돌아다녀도 진시황이 원하는 불사약을 못찾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신하들은 가차없이 죽음으로 내몰아 주변의 사람들을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당시 관직에 있던 서복은 도교의 발원지 산동성 출신으로써 천문,의학,신선술,점복, 지리에 밝은 방사(方士)자리에 있으면서 황제의 명을 받게 될 것임을 알고 당시에 시황제가 지금의 산동성의 바다로 가서 유람하고 명산과 대천, 그리고 여덟 신(神)에게 예를 행하여 제사를 지내며 낭야산에 올라가 크게 즐기면서 머무를 때 진시황에게 자진해 나아가
“황제 폐하,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불로초는 이곳 중국에는 없고 동방의 나라 남쪽 섬에 가면
구해올 수 있습니다. 수백 척의 배와 동남동녀 각 500명을 지원해 주십시오”라며
지금으로부터 2222년 전 선단을 이끌고 1차 東度길에 올랐다.

서복이 중국 동해안의 영파항을 출발하여 낭야대를 거쳐 위해, 연대,발해만의 봉래산을 들려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 하구의 한반도 서해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우리의 각 지역에 서복이 다녀갔다는 지명과 전설이 2,000년이 넘은 오늘 날까지 남아있는걸 보면 서복의 항로는 제법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 같다.
그 예를 들어보자면 압록강하구에서 남하 하다가 백령도, 소청도, 대청도를 지나고 덕적도에 상륙하여 불로초를 찾다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남하 하여 진도 울돌목을 돌아 ‘서시터’, 고흥의 ‘서시등’, 나로도에 ‘봉래’란 땅이름을 남기고 다시 그의 일행은 삼선산이라 불리는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의 지초봉(芝草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서시천’이란 이름을 남겼다.
그는 다시 남하하여 남해의 금산의 기묘한 경치에 감탄하여 상륙, 바위에 '서시과차'란 암각화를 그려 놓았고 남쪽의 신비한 바위섬 백도에 올라 다음과 같은 서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놓았다. ‘서불이 안개 짙은 바다에서 헤매고 있은 지 며칠, 향기가 코를 찔러 그 향기를 쫓아갔다. 겨울인데도 기암절벽에 꽃이 피어 있고 그 꽃을 따니 안개가 벗어지면서 이름 모를 새가 서불의 뱃길을 안내하여 진나라(제주도)까지 인도하였다’
<한국의 여로>에서 참조함
다음은 서복 기념관에 전시되있는 서복의 동도자료를 근거로 하여 제주도에 入島한 이야기를 펼쳐 나가려 한다.

"폐하, 소신에게 동남동녀 500명씩만 주시옵소서. 그러하오면 소신이 동쪽의 남쪽 섬 영주산(한라산)에 올라가 폐하가 영생영락 할 수있는 불로초를 구하여 오겠나이다."
"그래, 그 섬에는 불로초가 있다더냐?"
"영주산은 삼선산(한라산, 지리산, 금강산)의 하나로 사람의 발자국이 이르지 않는 곳이고,옛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기이한 약재의 향이 향긋한 바람을 타고 산에 가득하옵니다."
"오오! 그러 하더냐? 그래 내 너에게 수백척의 배와 3,000명의 시복을 딸려 보내 줄터이니 어서 가 그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하여라."

"북쪽의 여러곳을 다 가 보았지만 이제 영주산 밖에는 없는 것 같구나. 아무리 바다의 용왕이 모진 풍파를 일으켜 나의 앞길을 막는다 하더라도 나의 주군인 시황제의 포악함만 하겠느냐. 이곳 영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나의 목숨은 부지 하지 못할터인데, 이랴아~~~~ 어서 가자 불로초가 있는 영주산으로..."

서복일행이 영주산에 이르는 제주에 도착하였을 때의 포구는 당시에는 금당포라 하였다.
서복은 이곳에서 아침에 日出을보고 영주산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준 천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조천(朝天)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는데 그 조천이 새겨진 바위는 고려시대 조천관을 건립하면서 매몰 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 이후 부터 금당포 대신에 이 지역을 조천이라 부르는데 제주의 유명해수욕장 인 함덕해수욕장 바로 가기 전에 있는 어촌이다. 예전에는 북제주군 조천면이었지만 지금은 제주시에 편입 되어있고 1919년 3.1일 당시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만세동산'이 지금은 제주도민의 항일운동의 본산지로 보존 되어 있다.

서복은 제주땅에 상륙하여 500쌍의 동남동녀와 동행한 시복들을 신령들이 산다는 영주산으로 올려 보내 불로초를 찾으려 하였지만 그들이 가져온 약초들은 신선의 열매라 하는 '암고란'이었다. 이'암고란'은 다른 이름으로 '시러미''시로미'라고 부르는데 여러가지 질병에 특효가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불로장생의 영악은 아니었다.

이제 서복일행은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제주 영주산에서 세상 있지도 않는 불로초를 찾아 헤맨지 어느덧 1년이 다가고 있음에 다시 이제 시황제가 기다리는 진나라로 돌아가야했다. 제주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지역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서귀포 정방폭포앞을 지나가며 그는 또 다시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徐市過之(서불과지)'서복이 지나갔던 길이라는 의미를 ....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유명 관광지에 가면"OO 가 OO년OO월OO일 왔다감"이라 성벽이나 문화재 기둥에 써 넣는걸 보면 이 서복의 습관을 재탕하는게 아닌가 여겨진다. 10여년 전 내가 중국의 만리장성 팔달령을 가 보았을 때 우리의 자랑스런 한글로 이런 류의 글을 써 놓은것을 보고 얼굴이 빨개 졌었는데 그것은 이 서복이 우리 한반도에 와서 퍼트려 놓은 나쁜 습관이라 생각하니 한결 부끄러움은 덜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앞으론 하지 마시길...(굳이 하고프면 일본의 히라카나를 이용하던지)
서복은 그렇게 해서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지명하나를 또 만들고 갔다.
서귀포(西歸浦)!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 해서 지어졌다 하는데 과연 그러했는지, 어떻게 2000년 전 이야기가 오늘 날까지 이렇게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참 아이러니칼 하다 안 할 수가 없다.
결국, 서복은 빈손으로 돌아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어 순간을 모면하여 수 많은 금은보화를 진시황에게 지원 받아 2차 동도를 시행하나 결국엔 일본 까지 가 그곳에 머물러 돌아가지 안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서복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는 어찌보면 참 인생 재미있게 산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컷 나랏 돈 펑펑 써가면서 당시에 항해술도 발달하지 못 하였을텐데 험한 서해바다를 헤쳐나가며 이곳저곳 명산 대첩을 유람하였고 말년엔 진시황이 하사(?)한 금은보화로 떵떵거리며 살다간 사람이기에 그의 로망인 신선이 되어 신선놀음을 진짜 하고 가지 안 했나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