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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로마 8,12-17
복 음 : 루카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오늘의 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부제품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손목 관절의 뼈들이 으스러졌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생살을 째고 뼈를 끄집어낸 다음,
그 뼈에 철심을 박아 다시 집어넣었으니 안 아플 리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끙끙대다가 겨우 눈을 잠깐 붙였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온몸에 고통이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다가도 어디까지 하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나오는 기도는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손목에 있는 흉터를 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나옵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니 몹시 괴롭고 불편할 듯한 모습입니다.
이 여자가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제가 수술 뒤에 통증이 빨리 사라지기를 빌었던 것처럼,
자기가 겪는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 모습을 본 회당장이 분개하며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자기 아들이나 딸이었다면, 또는 자기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였을까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13,15)라고 하십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을 제멋대로 지키면서
다른 이에게는 너그럽지 못하고 매몰차게 구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이’와 ‘나’를 나누어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에게 너그러운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95년 3월, 일본 도쿄 지하철 3개 노선에서
옴진리교 신도들이 맹독가스 사린을 살포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13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지요.
단일 종교 단체가 저지른 범죄 중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옴진리교의 최종 목표가 ‘국가 전복’이었고,
신도들은 이 결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984년 아사하라 쇼코가 설립한 옴진리교는 처음에 요가, 명상 수련 등으로
일반인의 관심을 받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사이비 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 초, 일본의 버블 붕괴 후 오랜 경기 불황과 사회적 혼란이 있었는데,
이때 교주는 “이 세계는 썩었고, 진실을 아는 우리는 곧 탄압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국가 전복을 꿈꿔왔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내가 아니라 네가 잘못되었다.”라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면서 폭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1995년의 그 사건 하나만 있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이런 모습은 계속 나타납니다.
나만 맞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따라서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만 맞을 수 있을까요?
또 나만 맞기 때문에 틀린 사람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사는 세상에서 함께 사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땅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 소외되고 위축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손을 얹으십니다.
이에 곧바로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이는 단순한 신체적 치유를 넘어, 한 인간의 존엄성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한 여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쁨을 얻게 된 것이 어떻게 문제입니까?
문제는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율법 조항 위반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행위인 치유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바로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보지 않고, 자기 판단만을 따르려고 한다면
예수님께 “위선자들아!”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 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 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 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안식일의 치유로 인한 논쟁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18년 동안 굽어 있던 여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한다.
주님께서 하신 이 치유는 단순한 육체의 회복을 넘어,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당장은 안식일 규정만 붙잡고 예수님을 비난한다.
이 장면은 신앙의 본질과 껍데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청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신다.
짐승도 안식일에 먹을 것을 주면서,
아브라함의 딸을 해방시키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반문하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이다.
안식일은 억압이 아니라 생명과 자비, 자유와 회복의 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12절) 하시고, 손을 얹으셨다.
곧 여인은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여인의 굽은 모습은 단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세상에 묶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를 상징한다.
인간은 세속적인 것에 사로잡힐 때, 굽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은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하느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안식일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사랑 없는 안식일은 텅 빈 휴식일에 불과하다.”(Sermo 25,7)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의 치유 행위를 이렇게 해석한다. :
“주님은 안식일에 여인을 치유하시며,
율법의 정신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 주셨다.
안식일은 인간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하느님의 배려이다.”(Homiliae in Matthaeum 40)
즉,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자비이며, 그 자비가 율법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회당장처럼 형식에 매여 본질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기도와 전례, 규범을 지키면서도 정작 자비와 사랑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18년 동안 굽어 있던 여인처럼
우리 안에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무거운 짐과 집착이 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 역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시는 은총을 믿고,
형식보다는 사랑을, 규정보다는 자비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안식일의 의미를 살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인이 될 것이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9월 29부터 10월 3일까지
중남부 사제 회의가 샌 안토니오와 휴스턴에서 있었습니다.
월요일에서 수요일 오전까지는 샌 안토니오,
수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는 휴스턴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요일에 장례미사가 생겼습니다.
평일 미사는 손님 신부님에게 부탁하였지만,
장례미사를 부탁하기는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지난 부활에 가서 병자성사 드렸고,
열흘 전에 병자성사를 드린 후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차로 갔다 오기에는 먼 거리이기에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샌 안토니오에서 수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달라스로 와서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오후 비행기로 휴스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조금 불편하지만, 신앙 안에서 성실하게 사셨던
고인과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리를 가달라고 하면 십리까지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10월의 끝자락을 지내면서 나태주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참 고운 마음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꽃 하나하나에게 인사 할 정도의 마음이라면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틀’에서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에도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오랫동안 누워있어야 했던 중풍 병자의 마음,
걷고 싶어 했던 앉은뱅이의 마음,
고운 피부를 갖고 싶어 했던 나병환자의 마음,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싶어 했던 소경의 마음, 사
랑받고 싶어 했던 자캐오의 마음,
18년 동안 아팠던 여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진리를 위해 몸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소중하고 아름다운 손님입니다.
손님은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고, 손님은 편안하게 있다가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야 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여인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랑, 희망,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옵니다.
사랑과 희망, 믿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보여주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이 내게로 다가온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전직 의사로 추정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저술한 루카 복음서 안에는
예수님의 치유 활동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한 여인의 치유 과정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해 두해도 아니고 열여덟 해입니다.
가련한 여인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병이 깊어지면서 나중에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이,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목숨,
동물이 아니라 식물 같은 삶을 하루하루 견뎌내던
여인의 머릿속 생각은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나를 이렇게도 깊은 비참의 구덩이로 몰아넣으시는가?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걸까?
이 끝도 없는 비참함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나를 빨리 데려 가셨으면...
혹독한 겨울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뜻밖의 선물이 다가왔습니다.
기적처럼 화사한 봄이 다가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보신 것입니다. 보신 것뿐만 아니라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것뿐만 아니라 고통과 서러움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한 치유자 예수님의 손길이
한 비참한 여인의 몸에 닿자마자 기적 같은 일이 눈앞에서 발생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도 못하던 그 여인이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허리 굽은 여인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만방에 선포합니다.
여인의 치유를 통해 우리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인류를 위해 그분은 어떤 의미인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그 오랜 세월 기다렸던
구원의 현존을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여인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를 상징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한 가련한 여인에게 그러하셨듯이,
가난과 병고, 죄와 한계라는 삶의 무게에 시달리는 우리,
물질만능주의와 구조적인 악에 짓눌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고, 어루만져주십니다.
그리고 치유시켜 주십니다.
치유 받은 여인 주변에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경사스러운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찬양하는데,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삐딱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는 나름 가장 신앙심 깊은 사람,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사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가장 신앙심이 약한 사람,
가장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불행하게도 회당장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늘이나 땅 위에서 발생하는 표징들은 잘 파악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을 통해서 실현된 구원의 표징을 읽지 못했습니다.
회당장이 지니고 있었던 치명적인 약점은 율법 지상주의,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인간의 전통에 대한 완고한 집착,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정에 대한 몰이해였습니다.
영성생활이란?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한 삶이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성 생활(Spiritual Life)이란 무엇인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오늘 독서와 복음은 놀랍고도 중요한 단서를 알려줍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오늘 로마서는 성령도 얘기하고 우리 영도 얘기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에게 뭔가를 증언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밖의 성령과 우리 안의 영이 각기 있으며
서로 조응(照應)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밖의 영이 성령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병마가 있고 복음의 다른 곳에선
악령도 있고 더러운 영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 밖의 영만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영도 하나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육의 영과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가르침을 볼 때 건강한 정신이나 영은
병마는 물리치고 성령과 조응하는 기도와 헌신의 영입니다.
반대로 우리말의 썩어빠진 정신에 해당하는 육의 영은
악령이나 더러운 영과 조응합니다.
제 생각에 오늘 복음의 병마에 시달린 여인은
악령이나 더러운 영에 의해 병이든 사람인 것 같은데
악령이나 더러운 영에 의해 침범 받게 된 것은 그녀가
그것들을 물리칠 만큼 그의 정신이나 영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건강한 사람은 웬만한 균의 침입을 막아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온갖 균에 전염되듯 그녀의 정신이나 영도
약하고 건강하지 못했기에 악령들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정신과 영은 사실 악령만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조그만 악도 견딜 힘이 없어서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지도 물리치지도 못하기에 그저 도망치기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물론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서 말하는 악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고통과 죽음을 우리는 악으로 경험하는데
우리의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우리 안에 모셔 들인 성령 때문에
사랑 충만한 사람은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감수하고 감당할 수가 있으며 악령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영성 생활이란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성령을 모셔 들임으로써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자는 삶이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덕분에 이것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강론을 올리지 못합니다.
전화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 또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이승화 시몬 신부
규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규칙의 의미를 잊으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한 규칙이
규칙만을 추구하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상황이 생긴다면 충분한 명분을 찾고
다른 이들도 납득할 만큼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믿으며 규칙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규칙만 강조하게 되면
육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실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었는데도
다시 종살이의 삶으로 돌아가는 꼴입니다.
그러니 눈앞에 사람이 죽어 가면
그 사람을 돕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은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휴식의 참된 의미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휴식은 노동에 대한 결실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상대의 휴식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더 급한 위험이 있다면
먼저 실행하고 다른 때 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적대자들은 망신을 당했고
군중들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보면서
어떤 선택을 할 때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하는 작은 사랑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을 찾아갈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자유와 기쁨의 안식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만이 고유자료로 전하는 “곱사등이 부이의 치유기적사화”이다.
그런데 오늘의 치유기적은 그것이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주목을 끌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에 분개한 회당장이 반론을 제기하여
모여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아닌 날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 하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반론을 이용하여
반대자들의 흑심을 드러내 밝히시고, 되려 군중의 호응을 얻어내신다.
따라서 오늘 기적사화는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하느님 자녀의 자유와 안식일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찍이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고,
예수를 고발할 기회를 찾고 있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때 예수의 반대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해버리려고 모의하였다.(6,6-11)
또 한 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몸이 부은 수종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오히려 법에 합당함을 가르치셨다.(14,1-6)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의 눈에
허리가 굽어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루카는 이 여인이 18년 동안 곱사등이로 참담한 삶을 살아왔고,
이 병이 사탄에 의한 病魔임을 밝힌다.
예수께서 여인을 가까이 불러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12절)하고 말씀하신 뒤
여인에게 손을 얹자, 건강해진 여인은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3절)고 한다.
치유의 과정을 살펴보자.
병이 떨어졌다는 것은 여인에게서 병마, 즉 사탄을 예수께서 몰아내셨다는 말이다.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은 여인은 예수님의 안수를 통하여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찬양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하느님께서는 ....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회당장의 말대로 일주일에 일할 날이 엿새나 있다.(14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는 일에는 안식일이 적격이다.
더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자녀를 사로잡고 있는 사탄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냥 둘 리 없다.
흔히 회당장과 같이, 18년 동안 곱사등이에 시달려 왔던 부인이
하루나 이틀 더 기다린다고 해서 난리라도 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런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위선자들도 안식일에 자기 가축 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외양간에서 풀어주거늘(15절),
하물며 사탄에 사로잡힌 하느님의 자녀를
한 시간이라도 그냥 둘 수 없으신(16절)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안식일이란, 사탄의 종살이와 고통과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과 완성의 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주일도 바로 이런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