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본사 뒷골목,헌법재판소를 지난 약국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가회동 31번지,길 건너편 11번지 일대,삼청동,원서동,소격동,안국동 일대에 포진한 북촌(北村) 한옥마을.19만5천평 면적의 이 일대 전체 가옥중 40% 정도가 한옥이다.
20년만의 폭설이 할퀴고 지나간 10일 오후 한옥마을의 초입에서 만난 쇠락한 절간의 지붕같은 기와를 인 점방(도저히 슈퍼마켓이란 말을 쓰기 힘들다)과 참기름 방앗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기와지붕의 굴곡을 따라 시루속의 백설기처럼 자리를 잡은 눈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길을 얼린 눈은 그다지 반갑지 못하다.
차 한대가 빠져 나가기 힘든 골목길은 내린 눈이 얼어 붙어 빙판길.아이들은 좋아라고 미끄럼을 타지만 아주머니,할머니들의 한 걸음,한 걸음이 힘겹고 위태로워 보인다.
털모자에 털신을 신은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동네에 망조가 들었어.자기 집앞 눈도 쓸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와집에 사나”며 호통을 친다.
기울어 가는 기와집 사이로 번듯한 4층짜리 빌라가 눈에 띈다.규제가 풀리기 전에 지어진 듯 나이를 짐작케하는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생경스럽다.2∼3집 걸러 한 집은 기와지붕인 이 골목의 끝은 ‘노틀담 수녀원’의 굳게
닫힌 철문이다.
폭포가 얼어붙은듯 까마득한 골목길 언덕은 그나마 군데군데 뿌려진 연탄재 덕에 게걸음이나마 걸어 다닐 수는 있다.염화칼슘도 떨어져 간다는데 오랜만에 보는 연탄재가 무척 반갑다.
북촌마을의 시간은 더디 간다.20년전이나 지금이나 양옥이 더 들어선걸 빼면 별로 바뀐게 없다.간혹 보이는 제법 높은 빌딩이 고작 4층짜리.중앙고앞
언덕길에 서면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고 조금만 고개를 들면 종로,을지로 일대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한 복판인데도 말이다.
아니,바로 앞 현대 빌딩에서 얼마전까지 때아닌 왕자(王子)의 난(亂),가신열전(家臣列傳)이 펼쳐졌으니 몇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갔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윤보선가,백인제가(동네 사람들은 백병원집이라고 부른다) 등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아니라면 대부분 북촌 마을 한옥은 30∼100평 사이.개중에는 10평 미만 초미니 기와집도 12채에 이르고 30평이 안되는 작은 한옥들이 전체 한
옥의 40%(382채)를 차지한다.전체 947동의 평균 면적은 44평.가장 큰 집은 윤보선가로 대지규모가 1천500평에 이른다.
이처럼 무늬만 기와집인 한옥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 실망을 금할길 없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듯 위태로운 모습에 처마에는 연두색 싸구려 플라스틱이나 양철 빗물통이 매달려 있다.골목길로 나있는 창틀은 알루미늄 섀시 처리를 하고도 찬바람을 막기 힘든지 비닐로 칭칭 동여맨 모습이 자주 보인다.
빨간 벽돌의 벽에 파란 철대문 기와집이 있는가 하면 옹골찬 성벽같은 담벼락에,버섯이라도 자랄 법한 오래된 나무대문을 고집하는 집도 있다.
한옥은 건물값은 빼고 땅값만 평당 500만∼800만원.도심에 가까운 입지 조건을 따지면 평당 1천만원은 가야 한다는게 여론이지만 여러 규제에 막혀있는 ‘반편 땅’이라 생각보다 싸다.
사정이 급한 사람들은 평당 400만원에 100년이 다 된 고택(古宅)을 내놓기도 한다.전세의 경우 3평짜리 방에 부엌이 딸린 집이 1천200만원∼1천500만원이면 너끈하다.
가회동에서 20년째 복덕방을 운영해온 서성석씨(64 대일부동산)는 “넉달전 30평짜리 한 채를 판 이후 아직 거래가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IMF전만해도 전통문화에 대한 붐이 일면서 한옥을 기웃거린 사람이 많았다.서씨는 “한옥이라고 하면 운치있고 우아하다고만 생각했던 한 젊은 부부는 직접 집을 둘러본 뒤 ‘여기도 사람이 사느냐’며 기겁을 했었다”고 털어 놓았다.그나마도 이제 팔려고 내놓은 한옥이 2∼3년째 묵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한옥마을 사람들이 모두 불만에 차 있는건 아니다.일부러 한옥을 찾아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도 많고 이들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이 지난해 4월 한옥마을 184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54%가 기회가 와도 한옥을 팔지 않겠다고 응답했다.팔지 않는 이유도 가격 때문이 아니라 한옥생활이 좋아서(46.9%),마을이 좋아서(38.7%) 등 정서적인 면에 가까웠다.
반면 집을 팔고 싶다고 응답한 주민(46%)의 82.9%는 한옥생활이 불편하고 개·보수 및 주거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한옥을 떠나고 싶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학력수준이 높고(대학원이상의 경우 6명중 5명이 안 팔겠다고 응답),소득이 낮거나(월 100만원 이하 가구의 59%) 아예 높은(월 300만원 이상 가구의 61.5%) 주민들이 한옥에 계속 살고 싶어한다는 결과다.
시정개발연구원 정석(鄭石 39)박사는 “이미 아파트생활을 통해 편리함과 효율성을 질리도록 맛본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을 찾고 있다”면서 조사 결과를 분석했다.
한옥 밀집 지역인 가회동 31번지에서 만난 정영원씨(57 여)는 “공기 좋고 시끄럽지 않아 최고”라고 만족해했다.강남의 아파트생활을 접고 지난해 10월 가회동으로 이사온 정씨는 “감기를 달고 살던 손녀가 이사온 뒤부터는
몰라보게 건강해졌다”면서 “가파른 언덕길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이것도 다니다 보니 산책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60평 남짓한 정씨의 집은 전세 7천500만원.집주인은 사정상 집을 세놓지만 고치지는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작지만 아담한 마당 한켠에는 아이들이 밤새 만든듯한 눈사람이 웃고 있었고 눈덮힌 장독대도 마음을 편하게 했다.기와를 빼고나면 전부 새로 지은 것들이지만 고성의 성벽에나 쓰일 법한 주춧돌이 이 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중문이 설치된 마루는 아파트의 거실만은 못해도 충분히 외풍을 막을 수 있었다.정씨는 “좀 썰렁하긴 하지만 한겨울에 속옷바람으로 집에 있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씨의 집을 나오자 또 빙판이 되다시피한 가파른 골목길이 길을 막았다.주차된 차들은 벌써 며칠째 달리지 못하고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어 기와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을 똑 따본다.생각해 보니 ‘지붕’
에 손을 대 본게 몇년만인지 모르겠다.한옥마을에 들어선지 불과 3시간만에 느릿느릿 여유있게 걷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