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섭아 나 네게 할 말 있어.”
“무슨 말?”
“실은 오늘 모임 혜숙이가 만든 거야.”
“무어라고? 어떻게?”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혜숙이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네 안부를 묻더라. 그리곤 혜숙이가 전화했었다는 것을 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그 후에 가끔씩 통화하여 네 안부를 물었지 계속 너에게 비밀을 지키라며. 그러더니 지난주에는 한번 만나자는 거야. 너와 나 그리고 보영이 하고 넷이서. 그다음은 너도 다 아는 것이고.”
“무어야? 넌! 마! 어떻게 그런 걸 나한테 비밀로 할 수 있니?”
“혜숙이가 비밀로 하여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걸 어쪄냐?
“알았다. 이 크렘린 같은 인간아!”
“크렘린이라니? 난 어굴해! 나는 숙녀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야.”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전 헤어질 때 혜숙이가 날 부르더니 너한테 다 이야기하래.”
“참 우습고 이상하구나.”
“그래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혜숙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실없는 놈!”
“아니 정말일 꺼야.”
“정말이긴.”
“아니야, 최소한 너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잖아, 그동안 혜숙의 행동을 보면.”
“너하고 사귀고 싶어 전화하면서 너와 내가 친한 걸 아니까 예의상 내 안부를 물은 것 아니냐?”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보영이와 사귀는 것. 너도 알고 혜숙이도 알잖아”
“그럼 왜 내게 비밀로 하라고 하니?”
“글쎄! 그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혜숙의 너에 대한 감정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오늘일 만 봐도.”
“글쎄, 네가 억측하는 것 일거야.”
“아니야. 오늘 응개폭에서도 너를 보는 혜숙의 눈빛이 남달랐어.”
“네가 잘 못 본 것일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섭은 현영의 말에 가볍게 흥분이 되고 현영의 말을 들으니 폭포에서 혜숙이 행동이 자기에게 은근하고 다정한 것 같았던 생각이 들며 정말 그 차분하고 귀엽게 생긴 혜숙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현영에게 들킬까 봐 얼른 외면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현영은 보영과 사귐이 계속됐지만
영섭은 학기말 시험이다 방학준비다. 하여 바쁘게 보내느라 여자애들과의 연락을 못 하고 지냈다.
현영이한테 그 후 보영과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이외는, 그런데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후 느닷없이 보영이 영섭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다. 그것도 둘이서만,
보영이 현영과 사귀는 것을 아는데 무슨 일로 자기를 만나자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보영이 약속한 버스 정류장 근처 교회 어린이 놀이터로 나갔다.
조금 기다리자 보영이 왔다.
“보영아! 여기야. 안녕?”
“그래! 영섭아! 너도 잘 지냈어? 너희 학교 방학했니?”
“응! 며칠 됐어. 너희는?”
“우리도 어제 방학했어.”
이렇게 학교생활과 주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보영이 불쑥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봉투를 내민다.
“무어야?”
“혜숙이 너한테 보내는 편지야. 혜숙이네 이사 갔어, 인천으로.”
하는 보영의 말속에 불만 비슷한 것이 배어있는 것을 영섭은 눈치채지 못한다.
“언제?”
“지난 일요일 날, 아버님이 군인이잖아, 계급이 중령일 거야. 이번에 강원도 인제로 발령이 나서 전근 가시며 식구들을 할아버지가 사시는 인천으로 이사시켰데.”
“그랬구나. 혜숙이가 초등학교 5학년 초에 전학 왔지?”
“아마 그럴 걸, 이사 가는 날 배웅하려고 갔더니 이 편지를 주며 너에게 전해 주라더라. 그래서 너를 만나자고 한 것이야.”
“무슨 편지야?”
지난번 현영의 말, 혜숙이 영섭을 좋아할지 모른다는 말이 생각나고 또 보영에게서 혜숙의 편지를 받는 영섭이 계면쩍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나야 모르지.”
“혜숙이 이사 가기 전에 한 번쯤 더 같이 만났으면 좋을 걸 그랬다.”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보영은 새치름하다.
보영과 헤어져 집에 오면서 두툼한 혜숙의 편지봉투에 영섭은 궁금증이 생겼다.
무슨 내용이 기에 이렇게 편지가 두툼한가 하고.
집에 도착해서 제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봉투에서는 여러 장의 편지가 나왔다.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섭이 에게
이 편지를 받고 나를 당돌하고 불량한 여학생이라고 네가 흉보면 어쩌나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사 가게 되어 이제는 좀처럼 너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그냥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헤어지기는 너무 섭섭하고 아쉬워 필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처음 적성 초등학교에 전학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내가 선생님과 같이 교실에 들어와 교단에 섰을 때
반장인 네가 일어나
“차렷! 선생님께 경례!” 하고 구령을 했지.
그 소리를 듣고 잘생기고 환한 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화살에 맞은 참새처럼 가슴이 철렁하고 온몸이 떨렸어.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아빠가 군인이라 나도 스스로는 꽤 대범하다고 강단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 내가 인사말도 제대로 못 하고 더듬거린 것은 그래서였어. 그날 이후 나는 너만 보면 가슴이 떨리어 너를 피하게 됐어. 잘생기고 공부만 아니라 운동도 잘하는 너를 만나면 이야기하고 싶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용기가 안 나 피하고, 어쩌다 네가 말을 걸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새침했지만, 네가 멀어지면 좀 더 말도 많이 하고 친절할 걸 하고 후회도 했지. 그러다 너와 보영이가 가까운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보영이와 친해졌어.
보영이와 가까워지면서 보영이 덕분에 보영이 같이 우리는 자주 만났지 그렇지만 보영이와 같이 너를 만나도 여전히 내 마음과 몸은 굳어져 버려 말과 행동이 서툴렀어, 그래서 쑥스러우면서도 너와 헤어지기가 싫었고 헤어지면 다시 너를 만나고 싶었어. 그래서 보영이를 그리고 현영이를 이용해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너와의 만남을 자주 만들었지.
한번은 이런 꿈도 꾸었어.
그때가 6학년 겨울 방학을 하고 크리스마스 날이었던 것 같아.
크리스마스이브 날 네가 현영이랑 같이 교회에 놀려왔었지.
그때 나와 보영이는 교회에서도 알아주는 크리스천이었어.
지금도 현영이가 교회에 나가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너도 알다시피 현영이도 주일이면 꼭 교회에 나오는 착실한 신자였고, 그래서 너를 데리고 왔을 거야. 크리스마스란 특별한 날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만들어진 기다란 빙판에서 다른 애들과 같이 미끄럼을 타며 재미있게 놀았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은 마침 수요일이어서 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고 와서 크리스마스 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사와 수요일 저녁 예배로 피곤해서 그날은 다른 날 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
그런데 꿈에 내가 시집을 간다는 거야, 어릴 때 아버지 따라가서 살던 강원도 어느 아담한 농촌 마을에서 그래서 혼례식을 구식으로 치른다는 거야.
T.V 역사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이
나는 방안에서 신부 화장을 하고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앉아 있는데 신랑이라며 사모관대를 한 네가 조랑말을 타고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어.
나는 놀라면서도 속으로 어찌나 기쁘고 좋은지 몰랐지만, 겉으로는 새침하게 앉아 있었지.
대례를 지낸다며 초래 청으로 나가 서로 맞절하고 혼주를 마시며 혼례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가려진 소맷자락 사이로 너를 흘끔거리며 쳐다보았고 그러다 너와 눈이 마주쳐 빙그레 웃는 너의 웃음에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됐어.
혼례가 거의 끝 나가는 무렵 상위에 있던 장 닭이 갑자기 큰 소리로 울며 날아가는 거야. 장 닭이 울며 나르는 소리에 놀라 그만 잠을 깨었지.
꿈인 것이 얼마나 아쉽고, 잠을 깨고는 그놈의 장 닭이 얼마나 미운지 몰랐어.
초등학교 4학년 땐가 엄마를 따라 시골 외갓집에 갔다가 거기서 구식으로 하는 결혼식을 구경했는데 그것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야.
그 후론 너를 보기가 더욱 어렵고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었어.
초등학교 졸업 앨범 찍을 때 편집 위원이 된 너를 보고 나도 편집 위원을 자원했지. 형식은 보영이가 그 귀찮은 것을 왜 하려고 하느냐면서도 내 부탁으로 나를 추천했지만, 그래서 사진도 같이 찍고 사진편집을 하면서 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되도록 많이 만들었어.
초등학교 앨범을 보면 너와 같이 찍은 사진이 다른 애들보다 많을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사시는 인천으로 이사를 할 테니 인천에 있는 중학교에 가라고 하시는 부모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파주여자중학교를 간 것도 너와의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함이었어.
너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너와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설레이게 하고 또 만나고 싶으면 주말에는 너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그렇지만 중학교에 입학 후 일요일에 집에 오면 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하늘 같았지만, 용기가 없었어.
왜 내가 이런 바보인지 나도 몰라.
그냥 너에게 전화해도 될 텐데.
내 마음을 너에게 들키는 것이 계면쩍고 두려웠나 봐.
초등학교 때 여자애들한텐 별로 흥미를 안 가졌던 네가 어쩜 나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겁이 더 많았는지도 몰라.
초등학교 때 너는 너무나 목석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용기를 낸 것이 현영이를 통해서 네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했지.
나 참 바보지.
그러다 올봄부터 아버지의 전근이 구체화 되면서 이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 늦어도 올해 안에 이사하는 것으로
이사를 하면 너를 전연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중학생으로 변한 네 모습을 한 번이나마 보고 싶어 지난번 응개폭포에서 만남을 내가 주선한 거야, 현영이를 통해서.
중학생이 된 너는 초등학교 때보다 더 의젓해 졌고 멋있어 졌더라. 내 생각보다 더.
그런 너를 본 순간 무슨 말인가를 하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더라. 그래서 그냥 태연한 채 웃기만 했지.
다행히 보영이가 있어서 분위기는 망치지 않았지만.
3학년 1학기를 마치는 지금까지 나의 주장으로 이사를 미루어 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
지금 안가면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워진 데.
그래서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가서 전학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준비해 주셔서 내일 우리는 인천으로 이사를 가.
이제 가면 언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영 너를 못만 날 수도 있겠지.
아니 이제는 너를 잊어야 할 것 같아.
어린 소녀의 한때 치기 어린 열병으로 생각하고, 치기 어린 소녀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몰라
나 혼자 너를 짝사랑하다 말도 못 하고 그만둔다는 것이 우습고 또 마음같이 네가 잊혀질지 모르지만, 잊도록 노력할 거야.
왜냐고?
글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여기서도 너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 멀리 가면---
그러니까 너도 이 편지 받고 부담 느끼지 말고 어느 장난기 많은 소녀가 장난 편지 보냈구나, 정도로 생각해 줘.
세월이 흐른 후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어서 내게 이런 감정이 다시 생기고 네가 내 감정을 받아 준다면 그땐 또 모르겠지.
한때 너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혜숙이가.
추신
미안하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이런 뜻밖에 편지에 당황해하는 너를 생각하니. 그리고 이 이야기는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해줘」
첫댓글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즐~~~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