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장 인질구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망산에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여절패는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자기가 어느 묘지 앞에 누워 있고 전신의 뼈마디가 쑤셔 와 몸
을 움직일 수 없음을 의식했다.
"으윽!"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가슴 부근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토
했다. 그의 가슴은 쩌억 갈라진 채 갈비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여절패는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을 번뜩였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중년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한창
꿩 두 마리를 굽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절패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친구! 당신이 노부를 구했소?"
중년인은 분주히 놀리던 손을 멈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눈빛이 맑은, 호감이 가는 인상의 인물이
었다.
중년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같이 변변찮은 존재가 어찌 무영신룡단혼도를 물리치고 귀하를 구
할 수 있겠소?"
여절패는 어리등절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나는 우연히 지나던 길에 그자가 귀하와 귀하의 수하들을 모두 도륙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손속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꾀를
내어 회선향령표를 쳐내 그자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 낸
뒤 귀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오."
여절패는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내 부하들은……?"
중년인은 무거운 탄식을 토해 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소."
여절패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영신룡단혼도…… 그 악랄한 놈이 감히 내 제자들을 모두 몰살시
키다니……"
한동안 원독에 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떠절패는 문득 생각
이 난 듯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생명을 구해 준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그는 새삼스럽게 가슴 부위의 상처에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옴을 느끼
고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입술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
다.
"치, 친구…… 수고스럽지만 노부의 주머니에 약병 두 개가 있나 살
펴봐 주시오. 그 중 붉은 병예 금창성약이 들어 있소이다.
중년인은 곧 여절패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약병 두 개와 은자
몇 닢을 꺼내 들며 빙그레 웃었다.
"있소이다, 약이……"
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여절패는 붉은 환약 두 개를 꺼내 손으로
으스러뜨린 후 갈라진 상처 위에 뿌리고 다시 붉은 환약 세 개를 꺼
내 복용했다.
잠시 후 통증이 많이 감소된 듯 그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또한 쩌억 갈라진 채 가슴뼈가 드러나 보였던 상처도 많이
아물고 있었다.
그제야 여절패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 평생 이런 낭패는 처음 당해 보는군. 노부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소이다. 은인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중년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봉옥이라 합니다……"
그리고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꿩고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시장할 텐데 우선 이걸로 요기나 하시고 체력을 회복시켜 속히 돌아
가도록 하시오. 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순 없소이
다."
여절패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
"봉 친구, 별일없다면 노부와 동행하지 않겠소? 큰 대접은 못 해드릴
망정 최소한의 성의는 표하고 싶소이다."
봉옥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은 응당 사람의
도리인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 그리고 나는 무공이 보잘것없어 내
자신도 보호하기에 미흡하므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소이다."
"봉 친구! 노부는 통증이 다소 가셨으나 내상은 전혀 회복되지
않아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옮기기 어려운 입장이오. 그러니……"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봉옥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까지의 북망귀왕 여절패의 명성을 생각하면 실로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무영신룡단혼도에게 호되게 당한 후로
는 오만무도한 여절패도 의기 소침하여 예전같이 안하무인으로 행동
할 수가 없었다.
봉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무척 딱하게 되었군요. 좋소이다! 내친김에 내가 부축해 드
리겠으니 우선 고기나 먹고 봅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핑고기를 한참 동안 열심히 뜯었다.
이윽고 뼈다귀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 여절패는 봉옥을 바라보았
다.
"이제는 떠나는 것이 좋겠소."
봉옥은 웃으며 여절패를 등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절패는 상처가 심한 데다 피를 많이 흘린 까닭에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봉 친구, 여기서 서쪽을 향해 계속 달려 주시오."
봉옥은 두말없이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망산은 중조산맥과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산줄기가 험준하
고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가 첩첩이 들어서 있었다.
여절패의 지시를 받으며 이십여 리쯤 내달린 봉옥은 어느 산곡
으로 들어갔다.
수목이 울창한 산곡은 해를 가리어 사방이 어둠침침하였고, 빙굴 속
에 들어간 듯 뼈를 깎아 내는 추위가 몸을 으스스 떨게 했다.
산곡 안으로 얼마쯤 들어가자 난데없는 외침이 들려 왔다.
"멈춰라!"
그러자 여절패가 급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봉 친구, 속히 '현황천지, 홍황우주'라고 대답
하시오."
봉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현황천지, 홍황우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속에서 칼을 든 흑의인 일곱 명이 달려오
더니 경이의 시선으로 봉옥의 위아래를 훌어보았다.
봉옥은 급히 말했다.
"여러분, 수고스럽지만 이분 여 대협을 호송해 주시오."
일곱 명의 흑의인들은 봉옥의 말을 듣고서야 그의 등에 업힌 사람이
북망귀왕 여절패임을 알아차렸다.
"온십구호님!"
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 여절패를 받아 부축했다.
"여 대협! 나는 이만 떠날까 합니다. 후일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
게 되겠지요."
여절패는 눈을 크게 떴다.
"봉 친구, 그게 무슨 말이오? 이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 버
린다면 노부의 심사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소?"
그러자 흑의인들 중 눈치 빠른 자가 잽싸게 나섰다.
"대협, 꼭 급히 떠날 이유가 없다면 저희들의 호의를 저버리지 마십
시오."
봉옥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응낙하고 그들과 함께 산곡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후,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장원이 나타났다. 장원은 범위가 매
우 넓고 건물들과 누각이 즐비했다.
봉옥은 여절패 등과 함께 장원으로 들어서며 눈빛을 기이하게 반짝였
다.
'이곳은 낙양대협이라 불리는 금시조 도중웅
의 거처인파…… 설마 도중웅마저 회서방에 포섭되어 있을 줄은
몰랐군'
봉옥은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의미 모를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
다.
과연 봉옥의 정체는 무엇일까?
* * *
그날 밤.
봉옥은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를 위해 마련된 침실로 돌아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침실 안에는 희미한 등불이
켜 있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며 스쳐 가는 가운데 밤은
깊어만갔다.
삼경이 지났을 무렵.
돌연 밖에서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봉 대협!"
봉옥은 건성으로 코를 골면서 계속 자는 척하고 있었다.
창밖에선 계속 몇 번인가 봉옥을 부르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이
상 부르지 않았고, 이내 발걸음 소리는 차츰 멀어져 갔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봉옥은 슬그머니 침
상에서 몸을 일으켜 불을 끈 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집 안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을 곧 짐작할 수 있
었다.
그가 묵고 있는 방만 하더라도 문밖 복도엔 네 명의 고수가 각각 위
치를 고수하며 어둠 속에 몸을숨기고 있었다. 하나봉옥의 신법이 너
무도 표홀해 봉옥이 창 밖으로 빠져 나간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
다.
봉옥은 내심 웃으며 도중웅의 거처를 향해 유령처럼 몸을 날려갔다.
대청 안은 밤이 야심한데도 여전히 밝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봉옥은 숨을 죽이고 지붕 위로 올라가 도괘주렴의 신법으
로 거꾸로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널쩍한 대청 안에는 많은 인영들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이목이 청수한 금포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금포노인의 안색은 주삿빛으로 붉었고, 눈빛은 강철보다도 예리했다.
이 노인이 바로 낙양 일대에서 대협으로 칭송이 대단한 금시조
도 중웅이었다.
도중웅 앞에는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다시 대여섯 명
의 흑의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두 명의 노인 중 하나는 봉옥에 의해 구원을 받은 북망귀왕 여절패였
다.
봉옥은 다른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흠…… 저자는 며칠 전 위원표국에 나타났다가 계대망에게 봉변을
당한 앙천적월 적위라는 자로구나.'
금시조 도중웅과 여절패, 그리고 적위는 서로 나직하게 밀담을 나누
고 있었다.
봉옥이 청력을 기울이니 도중웅와 말소리가 들려 왔다.
"무영신룡단혼도의 무공이 그처럼 대단하다니 실로 뜻밖이오. 나는
여 형과 여 형의 수하들만으로 충분히 그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내가 판단을 잘못했구려."
여절패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중웅의 말은 얼른 들으면 자신의 판단 착오를 자책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무영신룡단흔도라는 애송이 하나를 처치하지 못하
고 쫓겨온 여절패를 비웃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여절패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 형의 말씀대로 그 어린 놈의 도법은 실로 놀라웠소. 나는 아직까
지 무림에 그처럼 괴이하고 무서운 도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소이다."
그는 회서방 내에서 도중웅보다 서열이 낮았는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정중했다.
도중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최혼가람 고복양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고보양이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오늘 여 형의 말
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 녀석이 절세의 도법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구
려. 그 녀석이 사용하는 도법이 무슨 도법인지 짚이는 거라도 있소?"
여절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혀 없소. 무림에 이름이 나 있는 웬만한 도법이라는 도법은 거의
대부분 알고 있는데 그 자식이 사용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괴이
무쌍한 도법이었소."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적위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그깟 애송이가 사용하는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 형은 그렇게
호들갑을 떠시오?"
여절패는 안색이 변해 그를 노려보았다.
"나였기에 망정이지 적 형이었으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
을 거요."
적위는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노부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도중웅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앉으시오. 가뜩이나 복잡한 일도 많은데 우리 편끼리 다툴 필요는
없지 않소?"
그의 말에 적위는 움찔하여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것만 보아도 도중
웅의 권위가 두 사람보다는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중웅은 차가운 눈으로 적위를 응시했다.
"적 노인도 얼마 전에 계대망에게 뜻밖의 낭패를 당했는데 어찌 여
형만 나무랄 수 있겠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무영신룡단혼도
의 도법은 우내칠대무학 중의 하나일 것이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우내칠대무학이라고요?"
도중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 형이 모를 정도라면 그자의 도법은 아직까지 당금 무림에 나온
적이 없는 도법이 분명하오. 그런 도법 중에서 여 형을 단숨에 격패
시킬 정도의 위력이 있는 것은 오직 우내칠대무학 중의 천애도뿐이
오."
지붕 위에서 도중웅의 말을 듣고 있던 봉옥은 움찔 놀랐다.
'저 도중웅의 예측은 귀신 같구나. 저자를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신중
을 기해야겠는걸.'
여절패는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천애도가 틀림없을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노부가 그토
록 맥없이 당했을 리가 있겠소?"
그는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도중웅과 적위에게 던졌다.
도중웅은 내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 그게 무슨 자랑거리나 된다고 떠들고 있
는 거야?'
도중웅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적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여절패는 머쓱해져서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중웅은 냉랭한 시선으로 여절패를 쏘아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옥정검과 천양금환을 구하는 두 가지 일이 모두 실패해 버렸
으니 방주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울 거요."
여절패와 적위는 움찔 놀라 얼굴에 두려운 빛을 떠올렸다.
흉신악살 같은 그들도 도중웅의 입에서 회서방주란 말이
나오자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절패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운봉랑이 아직 우리의 수중에 있으니 그녀를 이용하면 천양금환을
얻을 수 있지 않겠소?"
도중웅의 음성은 쌀쌀맞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여 형이 그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사람은 보여 주지도
않은 채 물건만을 노리려 했으니 다시 운봉랑과 금환을 교환하자고
해도 그들이 순순히 응할 리가 없지 않소?"
여절패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 무영신룡단혼도를 상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가 책임을 지기
로 하고 맡은 일이었다.
여절패는 무영신룡단혼도쯤은 충분히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예
처음부터 사람과 물건을 교환할 마음도 없이 기세 등등하게 나섰던
것이다. 그러다가 물건은 구경도 못 해보고 부하들만 몽땅 잃고 돌아
왔으니 아무리 낮짝이 두꺼운 그일지라도 도처히 얼굴을 들 수가 없
었다.
도중웅은 한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여절패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천양금환이 무영신룡단혼도에게 있는 이상 빼앗기는 수월치 않을 거
요. 그러니 그와의 원한 관계는 차후에 해결하기로 하고 우선은 운봉
랑의 오빠인 운자개와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무영신
룡단혼도보다는 운자개가 여 형이 상대하기에 더욱 수월할 테니까."
여절패는 쓴 입맛을 다시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이번에 여 형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영신룡단혼도로 하여금 천
양금환을 가지고 오게 한 일이었소. 그러니 다음에 인질을 교환할 때
는 운자개가 직접 들고 오게 해야 할 거요."
"명심하겠소."
여절패는 기가 팍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도중웅은 적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적 노인!"
적위는 그가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말씀하시오, 도 형!"
"적 노인은 계대망이 성심장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적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곧 계대망이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
라는 걸 알게 되었소."
도중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대망은 적 노인을 쫓아 내고 다시 하장청과
범중립을 제압한 다음 옥정검을 탈취해 갔다고 하오. 그런데 계대망
이 그것을 탁천신수 진조영에게 인계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것을 훔
쳐 갔다는 것이오."
적위는 금시초문인 듯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믿을 만한 수하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틀림이 없을
거요"
"옥정검을 훔쳐 간 자가 누구인지 아시소?"
"그것은 모르오. 하지만 짐작 가는 인물이 있소."
적위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게 누구요?"
"무림에서 공공묘수로 이름이 높은 인물은 얼마 되지 않
소. 한데 내가 듣기로는, 며칠 전 낙양 근처에서 천리일순
방각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소."
적위는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늙은 도적귀신 방각 말이오?"
도중웅은 짜증스러운 듯 그를 흘겨보았다.
"천리일순 방각이 그말고 또 누가 있겠소?"
앙천적월 적위의 신분으로 남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커다란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 적위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은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 형께서는 방각이 그 옥정검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신단
말이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계대망이 옥정검을 잃어버렸고, 근처에 공공묘
수의 달인인 방각의 행적이 나타났으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
소. 그러니 적 노인은 방각의 뒤를 추적하시오."
적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가, 그 늙은 도적은 신법이 강호제일이고
행적이 신비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 내기가……"
"그래서 내가사람을풀어 이미 방각의 행방을 알아 내었소. 그는 지금
낙양의 진양객잔 후원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거요."
그제서야 적위는 도중웅이 이미 모든 일의 안배를 끝내 놓았음을 알
고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알겠소. 이번에는 결코 도 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소."
"제발 그러기를 바라겠소."
그들이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대청 밖에서 한 명의 인물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청의를 걸친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도중웅은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들다가 청의중년인의 얼굴을 확인하
고는 정색을 했다.
"이게 누군가? 총호법을 보필하는 청면사 곽숭
이 아닌가?"
청의중년인은 다가와 도중웅을 향해 포권을 했다.
"곽숭이 온삼호님을 뵈옵니다."
이제 보니 도중웅의 지위는 온서 삼호였다.
회서방의 온서급 인물들은 무공 실력으로 서열을 정한 것이 아니라
회서방에 가입한 순서대로 서열이 매겨져 있었다.
하나 그 중 일호, 이호, 삼호 온서만은 회서방주
가 온서급 인물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세 명을 직접 지명하였
기 때문에 그 서열이 남달랐다.
여절패와 적위가 같은 온서의 신분이면서도 도중웅에게 쩔쩔맸던 것
은 그가 온서 중에서도 특수한 신분인 삼호 온서였기 때문이었다.
청면사 곽숭 또한 여절패와 적위에게는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고 오직
도중웅에게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으니 이것만 보아도 회서방 내에
서 도중웅의 위세가 막강함을 알 수 있었다.
청면사 곽숭은 비록 직급은 전서였으나 총호법의 위사였기 때
문에 온서급 인물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도중웅은 반갑게 곽숭을 맞으며 물었다.
"총호법께서는 평안하신가?"
"예, 그분께서는 온삼호님께 안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한데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인가?"
곽숭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총호법께서 제게 한 가지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온삼호님께서는 운봉랑 소저를 잡고 계시지요?"
도중웅은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나 내색치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총호법께서 그 운 소저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도중웅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또 총호법의 음심이 발동한 모양이군 하긴 운봉랑은 무림의
사대미인 중 하나이니 그가 노릴 만도 하겠지.'
그는 잠시 생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운 소저를 보내 드리지. 하지만 며칠 내로 그
녀를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게. 그녀는 천양금
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니까 말일세."
"그건 총호법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도중웅과 곽숭은 여절패와 적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이
야기를 나누었다.
여절패와 적위는 내심 울화가 끓어올랐으나 한 사람은 신분이 특수한
삼호 온서이고, 다른 한 사람은 회서방주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
는 총호법의 측근이니 자신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도중웅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흑의인들 중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밀실에 가서 운 소저를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두 흑의경장은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지붕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뒤를 밟
았으나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밀실로 가는 도중에 번번이 검문을 받으며 뒤뜰 월동문
앞에 당도한 두 사람은 주위를 한차례 쓸어본 후 나지막이 불
렀다.
"감노사."
그러자 차가운 대답이 들려 왔다.
"누구냐?"
한 흑의경장인이 말을 받았다.
"소지민과 한청이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운 소저를 대
청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월동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왜소한 체구의 사나이가 나오더니 두사람
을 번갈아 본 후 난색을 표했다.
"지금 보다시퍼 밤이 깊어 운 소저는 취침에 든 지 오래요. 그녀의
성미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시중을 드느라 진땀을 빼고 있소."
"그렇지만……"
"지금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텐데 깨우게 되면 두 분은 아마 단단히
혼이 날 거요.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내일로 미루도록 하시오."
소지민 역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는 졸개의 신분이니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청
안에서 장주님과 총호법의 위사인 청면사 곽숭이 운 소저를 기다리고
계시니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총호법이라는 말이 나오자 감노사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사전에 미리 말해
두지만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대해야 할 거요. 자칫 실수라도 해 그
녀가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면 장주님께 영락없이 경을 치게 될 것이
니 말이오."
한청이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시오. 그녀의 틸끝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가는 우리의 모가지
가 달아나리라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
뜰 안에는 겨을 매화가 시원스럽게 피어 산뜻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
다.
두 흑의경장인은 감노사의 안내를 받으며 운봉랑이 갇혀 있는 방문
앞에 이르렀다.
그들은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불렀다.
"운 소저!"
그러자 한참 후에 여인의 교성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누구예요? 누가 이런 깊은 밤중에 남의 단잠을 깨우는 거예요?"
소지민은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두 손을 모으며 허리
를 굽혔다.
"소저, 용서하십시오. 장주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대청에서 소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운봉랑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내가 나가지 않겠다면요?"
소지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저, 그랬다가는 소인들은 당장 모가지가 떨어져 나갈 겁니다. 소
인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봉변을 주시렵니까?"
그의 애원 어린 말이 주효했는지 잠시 후에 그녀의 한숨 섞인 음성이
들려 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방안에 불이 밝혀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짐작컨대 그녀가 옷을 주워 입는 듯하여 두 추의경장인은 귀를 종긋
거리며 의미 모를 웃음을 띠었다.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며 운봉랑의 아리따운 얼굴이 살짝 내밀어
졌다.
"들어오세요. 내가 물어 볼 말이 있으니까."
막 방 안으로 들어서던 두 흑의경장인은 갑자기 일진의 사향 같은 그
윽한 향기가 스며듦을 느끼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으음……"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들은 방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앗!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뜻밖의 사태에 놀란 운봉랑이 어리등절하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운 소저는 아직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운봉랑은 귀에 익은 음성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다가 너무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 가…… 강 소협, 당신이 어떻게 여길……?"
검은 인영은 급히 방문을 닫고 속삭였다.
"역시 소저는 나를 잊지 않았구려."
들어온 사람은 봉옥, 아니, 강옥봉이었다. 그는 그녀가 갇힌 곳을 알
내기 위해 일부러 중년인으로 변장을 하고 여절패를 구해 주었던 것
이다.
흑의경장인을 안내했던 감노사는 이미 혈도가 짚인 채 밖에 쓰러져
있었다.
운봉랑은 두 눈에 기이한 열기를 띠며 강옥봉을 애타는 시선으로 응
시했다.
아마 그와 다시 만난 것이 사실이라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사태가 긴박하니 우선 도망칩시다."
강옥봉은 동정을 살피면서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여러 날 동안 몸은 편했지만 정신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은 운봉랑은
얼굴이 무척 수척해 있었는데, 강옥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안 따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가시고 몸이 날
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녀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운봉랑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 소협, 전 혈도를 짚여 무공이 봉쇄되었으니 어떻게 이 호랑이 굴
을 빠져 나가지요7"
강옥봉은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을 눌러 갔다.
그러자 운봉랑은 불타 오르는 듯한 한 가닥 순양진기가 명
문혈을 따라 스며듦을 느끼고는 몸을 약간씩 꿈틀거렸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침체되었던 혈도가 정상적으로
유통되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됐소. 지금쯤 그들은 운 소저가 오지 않아 의아심을 느낄 것요. 그
러니 더 늦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강옥봉은 운봉랑과 함께 급히 방문을 열고 어둠 속을 날아갔다.
한편, 도중웅과 곽숭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도중웅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왜 여태껏 오지 않을까?"
그는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밖에서 장작개비처럼 몸이 비쩍 마르고 키가 훤칠한 중년인이
즉시 달려들어왔다
"장주님,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너는 빨리 뒤뜰 밀실로 달려가 운 소저를 데리러 간 소지민과 한청
이 왜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중년인은 힘차게 대답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곽숭은 도중웅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듣자 하니 운봉랑의 미모는 가히 월궁의 항아를 능가하
고 특히 그녀가 한번 웃으면 모든 남자들의 넋이 달아난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7"
도중웅은 껄껄 웃었다.
"하하…… 그녀의 용모가 가히 경국지색인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이
곳에 온 후 아직 한 번도 웃지를 않아, 그녀의 미소가 과연 소문처럼
그런 위력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네."
"흐흐…… 총호법께서는 평소 사대미인을 모두 품안에 안
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소비연 운 소저가 온삼호님
의 수중에 있다는 걸 아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온삼호님께서는
평소에 여색을 멀리하시고 심신의 수양에 힘쓰시는 분이
라 총호법께서도 존경하고 계시지요."
도중웅은 내심 그가 말하는 속뜻을 알고 코웃음을 쳤다.
하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녀는 비록 인질로 붙잡혀 와 있지만 나는 섭섭지 않게 그녀
를 대접하고 있다네. 게다가 수하들에게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
지 못하게 해서 그녀는 아직 청백지신을 유지하고 있지."
곽숭은 도중웅이 이미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불안해 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과연 총호법의 말씀대로 온삼호님은 당당한 대인의 풍모가 있
으십니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중년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가슴을 두들기며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
었다.
도중웅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매섭게 다그쳤다.
"웬일이냐!"
"크…… 크…… 큰일났습니다. 우, 운 소저가……"
"운 소저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어서 말해라!"
중년인은 도중웅의 사나운 호통에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말했다.
"운 소저가 실종되었습니다"
"뭐라고?"
도중웅은 날벼락을 맞은 듯 순간적으로 멍해 있다가 두 눈에 신광을
폭사해 냈다.
"그녀는 혈도가 제압당해 무공을 상실했는데 어떻게 달아날 수 있단
말이냐?"
중년인은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목을 움츠리며 겁먹은 눈동자를 이
리저리 굴렸다.
"속하가 가보니 밀실을 지키고 있던 감노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
고, 소지민과 한청 두 사람도 운 소저의 방안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습니다."
도중웅은 안색이 변해 벌떡 일어섰다.
"어서 그곳으로 가보자."
도중웅은 먼저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곽숭과 여절패, 적위 등이 줄줄이 뒤따라갔다.
하나 밀실로 달려간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혈도를 짚인 채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수하들뿐이었으니……
운봉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힘없이 대청으로 되돌아을 수밖에 없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요....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
즐감요~~~
즐독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과연~~~
즐감요~^^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보고 있습니다
즐감^^
즐독
잘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즐감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 늘 감사합니다 ♡
즐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