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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제작
옛사람의 지리산행기/ 유몽인의 遊頭流錄| ‥[산행이야기]
원미산 |조회 41 |추천 0| 2008.09.17. 09:59
지리산 기행
원제: 遊頭流錄 <기 행 문 >
유 몽 인1) 지음.
조 면 희 번역
*작자의 호방한 필치로 쓴 이 지리산 기행문은 참으로 우리
들에게 감동을 준다. 특히 그는 이글에도 기술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산은 거의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 가 보았는
데 이 지리산이 제일 높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산의 기행문을
썼던 김종직이나 정여창 같은 분의 글을 소개하며 후일 불행하게
될 말의 꼬투리가 있다고 한탄하였는데 이 작자도 뒷날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불행한 최후를 맞은 것을 생각하면 묘한 여운이 남는다.
내가 벼슬길에 몸담아 조석으로 나라 일에 얽매인 지도 어느덧 23 년이나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여 보건데 외람되게도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상감님을 가까이 모신 때도 역시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노쇠한데다가 신병이 겹치니 벼슬길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나는 평소에 산과 바다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자연이 어우러진 시골에 살기를 그리워하였다.
만역 신해년(1611년, 광해3, 작자 53) 봄에 나는 벼슬을 사직한 뒤에 가족을 거느리고 고흥(高興)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조정에 있는 친지들이, 아직 그리 늙지도 않은 나이에 퇴직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 나를 용성(龍城) 군수로 추천하여 주상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
용성은 고흥에서 백리 길도 안 되는 곳이다. 나는 집에서 며칠을 쉰 뒤에 곧장 임지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용성은 큰 고을이었다. 복잡한 사무는 나같이 용렬한 자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나의 마음은 공연히 바쁘고 불안하였다.
이때는 한식절(寒食節)이 가까운 시기이었다. 승주(昇州) 군수 유순지(柳詢之)가 용성의 목동(木洞)에 있는 선영(先塋)에 성묘를 하러 왔는데 그는 나보다 벼슬길에 먼저 나간 선진(先進)이었다. 그는 내가 이 고을의 주인이라고 하여 나를 자못 정중히 대접하였다.
목동에는 수용암(水舂巖)이 있는데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진사인 김화(金和)가 그곳에 살면서 재간당(在澗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 재간당은 지리산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산의 서너 봉우리가 이 정자의 난간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지리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三韓)의 밖에 있다’ 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는 또 대방국(帶方國)의 남쪽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용성의 옛이름이 대방(帶方)이니 지리산이 바로 삼신산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옛날 진시황은 불사약을 구하러 어린 남녀를 배에 태워 보내었는데, 우리는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삼신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나는 술잔을 들어 좌중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는 올봄에 저 지리산에 올라 그 동안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하던 경치를 감상하려고 하는데 이 중에 누가 나와 동행하고 싶은 분은 없소?”
하였다. 유순지가 대답하였다.
“내가 일찍이 영남의 감사로 있을 때에 이산을 여러 번 보았지마는 늘 그냥 지나쳐 보았고 한번도 거기에 올라서 감상한 일이 없었소. 지금 이곳 승주 군수로 부임한 이래 우연히 또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으니 아침저녁으로 그 산을 볼 때마다 늘 한 번 올라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이제 동행도 생겼으니 우리 함께 가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우리는 굳게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런 뒤에도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거듭 약속을 정하고 드디어 날을 잡아 재간당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다음달 3월 27일, 유순지가 기약한 대로 왔다. 다음날인 28일, 우리는 맨 처음 약속한 곳에서 만났다. 기생들의 노래와 피리 소리가 어우러진 속에 술을 마시며 노닐다가 밤중에야 술자리를 파하고 개울가 재간당에서 잤다.
3월 29일 행장을 정돈하여 길을 나섰다. 유순지는 취한 몸을 이끌고 가마에 탔으며, 재간당의 주인 김화와 나의 족질(族侄)인 순창의 신상연(申尙淵)과 그리고 나의 인척이며 서얼 조카인 신제(申濟)도 따라 나섰다.
우리 일행은 요천(蓼川)을 따라 가다가 반암(磻巖)을 지나는데 아름다운 풀과 예쁜 꽃들이 한창 무르녹아 있고, 마침 아침에 내린 비가 개어서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점심 때 우리는 운봉(雲峯)에 있는 황산비전(荒山碑殿)에서 쉬었다.
이 비는 만역 6년(1578년, 선조11)에 운봉군수 박광옥(朴光玉)의 장계에 따라 조정에서 의논하여 세운 것으로 대제학 김책영(金責榮)이 비문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판서 남응운(南應雲)이 전각(篆刻)을 썼다. 이 비문의 내용은, 옛날 고려 말기에 왜장인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대군을 이끌고 영남을 처들어 왔는데 가는 곳마다 그를 저항할 만한 진지가 없었다. 그들 나라에는 점서(占書, 점을 보는 책)가 있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아지발도가 황산에 가면 패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남 산음현(山陰縣)에 있는 황산(黃山)을 일부러 피하여, 샛길로 운봉을 공격하며 쳐들어왔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은 그를 이곳 황산(荒山)의 협곡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기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이곳의 노인들은 저기 보이는 구멍 난 돌을 가리키며 이태조가 깃대를 꽂던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 태조는 적은 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막강한 적을 맞아 싸워 이기고, 마침내 우리나라의 무궁한 터전을 열었던 것이다. 어찌 하늘의 운명과 인간의 모사(謀事)가 맞아 떨어져서 그렇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지형을 살펴 보건대는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요새로써 적은 병력을 험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많은 적군을 대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병법의 요체인 것이다. 얼마 전 정유란(丁酉亂, 1597년) 당시, 양원(楊元) 같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적병을 막지 못하고 남원성(南原城)을 지키려다가 참패를 당하였으니 이야말로 지리(地理)를 이용하지 못하여 불러들인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비석의 곁에 혈암(血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임진란이 나기 전에 이 바위에서 붉은 피가 샘처럼 솟아났는데 이 소식을 서울에 전하고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왜병이 남쪽 지방을 침략하였다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이곳은 태조대왕의 자취가 있는 곳으로 큰 난리가 일어나려는 조짐을 신(神)께서 알려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운봉 군수 이복생(李復生, 자는 백소伯蘇)이 내가 여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정(郵亭)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술 두어 잔씩을 기울이고 곧 일어나서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개울을 따라 십여 리를 가다가 모두들 쉬어가자고 하여 우리는 다시 말에서 내려 쉬었다. 북쪽에서부터 산이 점점 높아지고 길이 점점 험하여 우리는 말 타는 것을 포기하고 가마를 탔다. 백장사(百丈寺)에 이르자 유순지는 숙취(宿醉)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먼저 불전(佛殿)에 가 누워 버렸다. 곧이어 그의 코 고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하였다.
동자(童子)가 꽃 두 송이를 꺾어 왔는데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로서 크기는 연꽃만 하고 목단 꽃같이 붉었으며 그 나무 높이는 두어 길쯤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송이는 춘백화(春栢花)인데 붉은 꽃술은 산다(山茶, 동백)와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하였다.
절위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천왕봉(天王峯)과 똑바로 마주하고 있어서 천왕봉의 진면목을 여기서 볼 수가 있었다.
4월 초1일(경오), 우리 일행은 모두 대지팡이를 짚고 망해(芒鞋, 미투리)에 새끼들메끈을 매고 남쪽으로 향하여 산을 내려갔다. 꾸불꾸불한 개울둑을 따라 내려가니 큰 냇물이 앞을 막는다.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골짜기가 널찍한데 바윗돌 위에서 내리지르는 폭포는 그 밑의 물받이에 깊은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폭포수가 쏟아지면서 내는 소리는 끊임없이 벼락을 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지나는 도중에 푸른 소나무 사이사이로 철쭉꽃이 불타는 듯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문득 가마에서 내려 지팡이를 의지하고 쉬는데 골짜기 안에 두서너 채의 집이 보였다. 영대촌(嬴代村)이라고 하였다. 이 깊고 높은 산골짜기에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나니 여기가 참으로 옛날 진시황(秦始皇) 시대에 피난간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는 도원(桃園)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진시황의 성인 영씨를 따서 영대촌이라고 한 까닭을 알 만하였다.
한 곳에 이르니 깎아지른 듯한 양쪽 언덕 사이로 골짜기가 깊이 파이었는데 골짜기에는 온통 큰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을 흑담(黑潭)이라고 한단다. 나는 감탄하였다. 세상에는 채색을 칠한 그림이 있는데 화가의 주관에 의하여 너무나 사치스럽게 그렸다고 생각하였더니, 이곳에 와서 보니 사람만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돌이 흰가 하면 이끼는 푸르고, 물빛이 녹색인가 하면 꽃은 왜 저리도 붉은지? 이 경치를 만들어낸 하느님도 역시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좋은 경치를 마음껏 누리는 자는 이 산의 산신령인가?
나는 녹복(祿福)을 시키어 비파를 뜯게 하고, 생이(生伊)를 시키어 피리를 불게 하였다. 이어서 종수(從壽)와 청구(靑丘)는 태평소(太平簫)로 산유화곡(山有花曲)을 불렀다. 그러자 산과 골짜기는 서로 메아리치고 개울 소리는 거기에 화답하여 참으로 즐거움을 더하여 주었다. 우리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키어 먹물을 갈게 하고 바위위에 앉아 시를 한 수씩 지어 읊었다.
우리는 황계폭포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갔다. 30 리길을 가는 동안 푸른 잣나무와 단풍나무 숲이 이어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새들은 사람의 자취에 놀라 날아가곤 하였다.
내원(內院)에 이르자 두 골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지점인데다가 꽃나무로 산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 절이 하나 있다. 마치 비단수를 놓은 곳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소나무로 만든 불단에는 금빛과 푸른빛이 숲 속을 비추고, 방바닥은 잘 다듬은 종이에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하기가 황유리(黃琉璃) 같은데 한점의 티끌도 침범하지 못할 듯하다. 그 안에 수염이 하얀 노승이 가사를 입고 불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생애가 진세에 초월하였음을 가히 알 만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시 한 수씩을 읊고 떠났다.
동쪽으로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산은 깊고 물살은 점점 거세었다. 한발씩 올라가서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니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는다. 물이 불어서 함부로 건널 수가 없다. 힘 센 중을 골라 그의 등에 업혀서 건넜다.
바위가 절벽 앞에 서 있는데 마치 누대 같이 생겼다. 그리하여 대암(臺巖)이라고 부른단다. 대암 밑에 고여 있는 검푸른 못이 얼마나 깊은지 내려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무섭다. 그 못에 가사어(袈裟魚)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비늘무늬가 논에 모춤을 어긋나게 놓은 것 같다. 이 세상에서는 이곳에서만 사는 물고기란다. 나는 동행인을 시키어 그물을 던지어 몇 마리 잡아 오라고 하였으나 물이 깊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이날 밤에 이복생은 내원으로 돌아가서 자고, 나도 그 내원이 조용하고 깨끗하기에 거기에 가서 자려고 하였으나 너무 피곤하여 그냥 정룡암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노쇠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 암자에는 북당(北堂)이 있는데, 중의 말이 이곳은 노 판서(盧判書)네 서재(書齋)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 노진(玉溪盧稹, 중종 때 문신) 선생이 자손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옥계 선생도 역시 봄과 가을로 경치를 보기 위하여 자주 이곳을 들렀다고 하였다. 인적이 드문, 이 깊은 산속에 새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데, 자손들을 위하여 집을 짓고 여기에서 살도록 하였으니 선생의 고상한 뜻을 가히 알 만할 뿐 아니라 후학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다.
4월 2일(신미),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지나 황혼동(黃昏洞)을 찾아갔다. 늙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하늘을 볼 수가 없을 정도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깃드는 저녁 같았다. 그리하여 월락동이니 황혼동이니 하고 부르는 것이다. 와곡(臥谷)으로 돌아 들어가니 거기에도 나무숲이 울창하게 서있고, 돌길이 험하여 걸음을 걷기가 더욱 어려웠다. 천년 묵은 늙은 나무들이 저절로 쓰러져서 돌길에 가로 누워 있기 때문에 길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 등걸을 마치 문지방을 밟고 지나가듯이 타고 넘어 가야 하고 아니면 그 쓰러진 나무 밑으로 문안에 들어가듯이 몸을 굽혀 지나가야만 하였다. 그밖에 어떤 나무들은 서 있는 채 말라 죽어서 등걸만 앙상하게 있는 놈, 길게 자란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다가 다른 나무에 기대어 더 쓰러지지 못하고 비스듬히 죽어 있는 놈, 푸른 등나무 덩굴이 얽히고설키어 나무가 더 자라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거꾸로 늘어져서 하늘을 가린 천막같이 된 놈, 이러한 나무들이 수십 리의 시내를 덮어 서늘한 바람을 흩어지지 못하게 감싸 안았다가 개울을 통로로 하여 불어 보내니, 사람들은 봄옷을 갈아입은 지 벌써 한 달 가량 되었는데, 여기에 와서 다시 두꺼운 겨울옷을 꺼내어 입어야 했다.
우리는 해가 올라올 때쯤에 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정오쯤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에 올라갔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3번째 기슭에 있었다. 푸르고 가는 대가 밭고랑을 이루어 이 근처 수 리(數里) 사이에는 다른 풀이나 나무가 없었다. 마치 사람이 일부러 씨를 뿌려 갈아 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돌길로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다. 영원암은 고요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이 암자의 높은 뜰은 맑고 아담하여 산 아래 나무숲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왕대를 쪼개어 물관을 만들고, 그것을 길게 연결하여,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뜰 안에 있는 나무 물동이 안으로 흘러들게 하였다. 쏴아하고 쏟아지는 그 물소리가 매우 시원스럽게 들렸다. 우리는 그물을 받아 마른 목을 축였다. 암자는 규모가 작아서 겨우 서너 간쯤 밖에 되지 않았다.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상무주(上無住)를 등에 졌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승려인 선수(善修)가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도제(徒弟)들에게 불경을 강하는데, 사방에서 많은 불제자들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유순지와는 전부터 잘 아는 처지라고 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송고(松餻, 솔떡)와 삼병(蔘餠, 삼떡)과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죽실(竹實)과 감, 밤들이 많기 때문에 매년 가을에 이것들을 모아다가 엿을 고아 놓는다고 하였다.
날이 저물자 바람이 설렁설렁 일더니 앞산에 구름이 솟아오른다. 비가 올 듯한 징조였다. 우리는 길을 재촉하여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덩굴 줄기를 붙잡고 절벽을 내려가서 실덕리(實德里)를 지나갔다. 나는 여기서 비로소 농부가 밭에서 고랑을 타는 것을 보았다. 저녁에 군자사(君子寺)에 들렀는데 이 절은 야찰(野刹)로써 속세의 냄새가 물씬 풍기었다. 그러나 모란꽃이 선방(禪房)을 향하여 한창 만발하여 있었다. 절 앞에, 옛날에 영정(靈井 : 샘)이 있었으므로 원래는 영정사이었는데, 근래에 군자사라고 고치었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신비스러운 신선의 세계에서 마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 듯하였는데, 오늘 밤에 갑자기 진세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답답하여져서 어쩌면 꿈속에 마귀라도 만날 것 같다. 공자님께서 이른바 ‘군자가 살게 되면 어떠한 더러운 것도 다 극복할 수 있다’ 고 한 말을 되새겨 본다.
4월 3일(임신),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呑村)을 지나며 옛날 점필재(김종직) 선생께서 이곳을 지나 천왕봉으로 가신 것을 생각하여 본다.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가던 길을 그대로 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3,4 리를 더 가서 원정동(圓正洞)에 도착하였다. 골짜기가 넓고 깨끗하여 갈수록 더욱 아름답다.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봉우리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곳곳에 돌이 많고 흙은 적었다. 그리고 푸른 삼(杉)나무 껍질과 붉은 소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등나무와 댕댕이 덩굴이 얽혀 있었으며, 언덕이 양쪽으로 갈라진 가운데로 큰 골짜기가 이루어져 있다. 물길은 그곳을 향하여 모여 내려가는데, 그 물들은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혀 거센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다가, 어떤 곳에 가서는 움푹 파인 구덩이를 만들고 어떤 곳에 가서는 평평한 바닥을 만들어, 그 높낮이와 굴곡을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중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바위에 틈이 난 곳을 보면 용의 발톱자국이라고 하고, 둥글게 파여 있는 것을 보면 용이 서리고 앉았던 곳이라고 하였으며, 길게 파여 나간 곳을 보면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취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설에 대하여 무지한 우리 백성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어서, 가는 곳마다 모두들 머리를 숙여 경건하게 예를 올리는 것이다. 한편 선비들은 이르기를 ‘용이 돌을 저렇게 변형시킬 수야 있었겠는가? 곧 자연의 조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생각하기를 ‘아마 신령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열자(列子)>에 전하여 내려오는 과아(夸娥)같은 신선이 도끼와 칼을 가지고 이러한 기기묘묘한 모양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시(詩)로써 신의 힘을 시험하여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신을 희롱하는 절구(絶句) 한 수를 종이에 써서 물속에 던져 넣었다. 한참 있다가 보니 절벽위의 굴속에서 연기 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산봉우리들 사이에 은은한 소리와 아울러 섬광(閃光)이 번쩍번쩍 빛났다. 우리 일행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물을 건너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서, 허물어져 가는 사당 안에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은실 같은 빗발이 새알만큼 큰 우박을 동반하여 쏟아졌다. 동행중에 나이 젊은 무리들은 겁에 질려 얼굴이 파랗게 변하였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보니 하늘에 끼어 있던 구름이 밀려가고 햇볕이 구름 사이로 빠져 나왔다. 우리는 언덕길을 따라 걷다가 갈 길을 잃어버리고 키작은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풀끝에 맺힌 빗방울이 옷자락을 적시고 가시 덩굴이 얼굴을 찔렀다. 이러한 가시밭길을 헤치고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가끔씩 허리를 구부려 죽순(竹荀)과 고사리를 꺾다가 보니 갈 길은 더욱 늦어졌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나는데 그 암자는 숲 속에 터만 남아 있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얼굴에 땀이 흐르고, 다리도 아프며, 발도 부르텄다. 만일 누가 이일을 시켜서 하게 되었다면 그 원망과 분노는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럿이 함께 걷고 함께 쉬며 서로들 웃고 떠드니 이것이 자연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드디어 두류암(頭流菴)에 들어갔다. 암자의 북쪽에 대(臺)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곧바로 남쪽을 바라보면 바위 절벽 사이로 날아 떨어지는 폭포를 볼 수 있다. 마치 수십 길의 구슬발을 달아놓은 것 같다. 저물도록 앉아서 그것을 바라보아도 피로한 줄을 모르겠다. 다만 비가 새로 갠 뒤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서늘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선방(禪房)으로 들어와서 하룻밤을 편히 쉬었다.
4월 4일(계유), 새벽에 일어나서 약옹암(掠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 속에 어지러이 널린 돌들을 헤치고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러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산 아래가 어둡고 침침하여 보는 눈이 어지럽다. 나무에 기대어 자세히 내려다보았으나 다 살펴 볼 수가 없었다.
영랑이라는 사람은 화랑의 괴수로서 신라시대 사람이다. 화랑도 3천 명을 거느리고 산과 바다를 두루 노닐었는데 우리나라의 명산 쳐놓고 그의 이름이 깃들어 있지 않는 곳이 없다. 산언덕을 따라 천왕봉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가니, 거센 바람이 많이 일어나서 나무들은 모두 외틀어지고 뒤틀려 제대로 자라지 못하였으며 나뭇가지는 산 쪽을 향하여 쓸어져 있다. 나무위에는 이끼가 머리카락처럼 자라서 마치 사람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다. 소나무 잣나무들은 밑 둥이 썩었는데도 가지가 뻗어 있으면서 그 가지들은 땅을 향하여 늘어져 있다. 곧 산이 높을수록 나무들은 더욱 작아진다. 그리하여 산 밑에는 나뭇잎이 자라서 짙은 그늘이 졌는데 이곳에는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고 가지 끝들이 마치 쥐의 이빨처럼 뾰족뾰족하다. 그리고 바위틈에는 아직도 쌓인 눈이 녹지 않고 한 자 가량이나 남아 있다. 나는 그 눈을 움켜다가 입에 넣고 씹으니 마르던 목이 시원하다. 이제 막 싹이 트는 풀이 있는데 푸른 줄기를 가진 놈이 청옥(靑玉)이고 붉은 줄기를 가진 것이 자옥(紫玉)이라고 하였다. 중은 ‘이풀을 먹으면 맛이 달고 좋다’고 하며 손에 한 움큼 꺾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중이 일컫는 청옥이니 자옥니미 하는 것은 신선들이 먹는 약초이겠구먼’하고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뒤에 그놈을 한 아름 꺾었다.
앞쪽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쳐다보니 천왕봉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거기에는 잡초 하나 없고 푸른 잣나무만 줄줄이 자라다가 서리와 바람에 시달려 말라죽고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열 그루 중에 두서너 그루씩은 되었다. 그리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반백이 된 노인의 머리 같다. 그런데 이곳을 소년이라고 이르는 것은 영랑도를 지칭한 이름인가? 내 생각에는 천왕봉은 늙은이이고 이 봉우리는 그 천왕봉을 받들어 모시는 소년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 것 같다. 여기에서 내려다보면 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치마의 주름살처럼 주름져 있으며 요란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이러한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보면 더욱 현란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우리는 지팡이를 재촉하여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는 판옥(板屋, 나무판자로 벽을 만든 집)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성모사(聖母祠)이었다. 사당 가운데 돌을 조각하여 흰옷을 입힌 여자의 상을 안치하였다. 그러나 그 성모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어머니 상으로서 어진 임금을 길러 3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여 제사지내던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영호남(嶺湖南) 사이에서 복을 비는 자들은 이곳에 와서 음사(淫祠)로 받들고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이루니, 원근에 있는 많은 무당들은 이 판옥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늘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래를 살펴보다가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마치 꿩이나 토끼들처럼 숲 속에 가서 숨어 있다가 이들이 하산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리하여 산봉우리 둘레에는 판각(板閣)들이 마치 벌집처럼 곳곳이 널려 있어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또 그곳에서 재운다고 한다. 그리고 짐승을 죽이는 것은 선가(禪家, 불교)에서 금하는 일이라고 하며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몰고 온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을 산 밑에 있는 사당에 매어두고 돌아가게 한 뒤에 이들은 이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성모사와 백모당(白母堂)과 용유담(龍遊潭)은 이곳의 무격신앙(巫覡信仰)의 3 소굴이 되었다.
이날, 비가 새로 개고 구름이 맑게 걷히어 아득히 먼 곳까지 막힘없이 다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늘은 비단으로 만든 천막이 되고 이산은 그 천막을 괴받히는 기둥이 되었다. 한편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에 어떤 산도 감히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지 못한다. 모두들 눈아래 내려다보인다. 곧 푸르게 보이는 것은 산이고 희게 보이는 것은 물이지마는 나는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함께 온 중을 불러 멀리 보이는 방향과 산들의 명칭을 물어 보았다. 그는 이렇게 일렀다.
‘동쪽으로 보이는 것은 대구의 팔공산 ․ 현풍의 비슬산(琵瑟山) ․ 의령의 도굴산(鞱掘山) ․ 밀양의 운문산 ․ 산음의 황산과 덕산의 양당수(兩塘水) ․ 안동의 낙동강이고, 서쪽으로 보이는 것은 광주의 무등산 ․ 영암의 월출산 ․ 정읍의 내장산 ․ 태인의 운주산 ․ 익산의 미륵산 ․ 담양의 추월산 ․ 부안의 변산 ․ 나주의 금성산과 용구산(龍龜山)이며, 그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것은 곤양(昆陽)의 소요산(逍遙山) ․ 광양의 백운산 ․ 화순의 조계산(曺溪山)과 그리고 돌산도(突山島)이며, 그밖에 사천의 와룡산을 바라보며 동 장군(董將軍)이 전쟁에서 패한 것을 애석히 여기고 남해의 노량(露梁)을 바라보며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북쪽에는 안음의 덕유산 ․ 전주의 모악산이 가장 큰 산이고, 그 중에 조금 큰 산으로는 성주의 가야산이 그것입니다. 또 바다로 둘러싸인 3 면에 점점이 보이는 섬들로는 대마도의 여러 섬이 저기 조그맣게 보입니다.’
생각하여 보면 뜬구름 같은 인간 세상이 가련하기도 하다. 술독 가운데 기생하는 초파리 같은 인생인데, 옳고 그르고 기쁘고 슬픔을 간직한 채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내가 오늘 여기에서 바라 볼 때에 하늘과 땅도 역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 공간에 있는데, 하물며 이 산봉우리 하나야 이 천지 가운데 한 개의 조그마한 물건이 아닌가? 그렇거늘 이 조그마한 산에 올라와 이 산이 높다고 감탄을 아끼지 않으니 더더욱 가련한 일이다. 저 신선의 기술을 익힌 안기생(安期生)이나 악전(偓佺) 같은 무리가 난(鸞)새나 학의 등에 걸터앉아 9만 리 높은 하늘에 올라가 내려다 볼 때에 이산의 모양은 한 개의 털끝만 하게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성모사 밑에 작은 초막이 하나 있는데 잣나무 섶을 엮어서 비와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중이 이르기를 이것이 응막(鷹幕)이란다. 매년 8,9월이 되면 매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이산에 그물 발을 쳐놓고 그 매가 걸리기를 여기서 기다린단다. 매는 잘 나는 놈이기 때문에 이 천왕봉도 단숨에 날아 넘게 되고 또 이 천왕봉에서 잡힌 매는 재주와 용맹이 뛰어나기 때문에 관청에 바치는 매는 모두 이곳에서 잡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바람을 무릅쓰고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 자가 관청의 위압 때문에만 그러하겠는가? 다분히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여기에 건 자도 있으리라. 한편 생각하면 밥상위에 놓인 맛좋은 반찬은 그저 한 번 맛보는데 불과한 것이지마는, 그 반찬을 장만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날이 저물 무렵에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왔다. 향적암은 천왕봉에서 수 리쯤 되는 지점에 있었다. 향기로운 풀잎을 끓여 차를 만들었다. 거기서 남대(南臺)를 내려다보았다. 어지럽게 널린 바위들이 온갖 형태를 하고 이 조그마한 암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암자의 북쪽으로는 천왕봉이 쳐다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이곳의 산세(山勢)는 웅장하여 외산(外山)들과는 매우 달랐다.
4월 5일(갑술), 일찍이 향적암을 떠나 위로 늙은 나무들을 치다보고 아래로 얼음 판위에 걸쳐놓은 나무 사닥다리를 밟으며 남쪽 방향으로 내려왔다. 앞서 가는 자는 아래에 있고 뒤따르는 자가 위에 있으니 결국 앞서가는, 지체 높은 사람은 낮은 데 있고 지체가 낮은 동자들과 하인들이 높은 곳에 있다. 곧 천한 자의 신발은 지체 높은 자의 상투를 밟고, 존경을 받을 자의 머리는 천한 자들의 발을 이고 가는 것이다. 인간사 중에는 이러한 유의 경우도 역시 많은 것이다.
길가에 집채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다. 몸을 솟구쳐 거기에 오르니 여기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었다. 지난번에 저 아래에서 쳐다 볼 때에는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던 곳이 아닌가?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물가물하여 땅이 안 보일 듯하였다. 내려다보는 산들은 전부 조그마한 언덕 같이 보이니 참으로 천왕봉 다음 가는 장관이었다. 여기서부터 내려가는 길에는 무릎 높이만큼 자란 면죽(綿竹)이 짝 깔렸다. 우리는 이것들을 깔고 앉아 쉬었다. 털로 만든 방석처럼 푹신하였다.
우리는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와 영신암(靈神菴)에 들렀다. 여러 산봉우리들이 사면에 둘러싸여 마치 우리를 향하여 읍을 하는 것 같았다. 비로봉이 그 동쪽에 있고 좌고대(坐高臺)가 그 북쪽에 솟아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이 그 서쪽에 서 있으며 가섭대(迦葉臺)가 그 뒤를 누르고 있다. 우리는 지팡이를 버리고 손과 발을 다 이용하여 비로봉에 올라갔다. 너무나 위험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영신암에는 차를 끓이는 솥과 향로가 있지마는 거기에 사는 중은 보이지 않았다. 흰구름 깊은 골짜기에 나무를 하러 갔는가? 아니면 이 속세의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산속에 숨었는가?
날씨가 온화하여 비로소 두견화(진달래)가 반쯤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겠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의 기후가 그래도 산꼭대기보다는 따뜻하다는 것을 알겠다.
영신암으로부터 40 리쯤 되는 곳에 이르니 산세가 험하여 중국의 촉나라에 있다는 검각(劍閣)보다 더 험할 듯하였다. 돌길로 곧바로 내려가는데 마치 하늘에서 바로 황천(黃泉)을 향하여 떨어지는 것 같다. 댕댕이 넝쿨을 붙잡고 그곳을 내려오는데 묘시(오전 8시경)에서 신시(오후 4시경)까지 걸렸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부릅뜨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깨물며 지나온 위험을 뉘우쳤다.
우리는 깊은 골짜기로 내려와서 키큰 대나무들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가 유숙하였다. 그날 밤에 두견새 소리가 요란하고 시냇물 소리가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인간 세상이 가까이 있음을 비로소 느끼겠다. 나는 여기에서 의신(義神)과 각성(覺性)이라는 두 승려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태승암(太乘菴)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시로써 이름이 나 있었는데 그들의 시는 격식이 맞아 읊기에 알맞았으며, 특히 각성의 글씨는 왕희지체를 닮아 가늘면서도 법도에 맞았다. 나는 두 승려에게 이르기를,
“당신네는 속세를 떠나 그리 깊지도 못한 숲 속에 왜 들어 왔소? 내가 지나온 자취와 비교하여 볼 때에 나는 일찍이 속세의 함정을 떠나본 일이 없으니 당신들이 사는 곳이 궁벽한 곳이기는 하오. 그러나 당신네는 푸른 소나무를 벗하고 흰사슴과 무리지어 사는데 불과하오. 나는 지금 푸른 소나무와 흰사슴이 노는 그 밖에서부터 내려 왔으니 내가 당신네보다 훌륭하다 하겠소.”
하였다. 두 승려는 손바닥을 만지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시를 낭송하며 술잔을 돌리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4월 6일(을해), 우리는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왔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는데 개울위에 큰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중이 그것을 가리키며 사자의 이마「獅頂」라고 불렀다. 우리는 늙은 소나무가 그림자를 지워준 시냇가에 가서 푸른 이끼를 자리하고 앉았다. 영산 보허(靈山步虛)의 곡조를 비파로 타게 하였다. 불경을 외는 듯한 가락으로 노래하며 꽹과리와 북으로 반주를 하니 깊은 산속에서 악기 소리라고는 듣지 못하던 중들이 모두 모여 들어서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들었다.
좌석을 기담(妓潭)위로 옮기니 깊이 고인 물은 푸르름을 더하고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거문고 소리와 비슷하다. 이곳을 홍류라고 한 것은 돌로 된 절벽애서 붉은 샘물「紅泉」이 솟아났다는 옛 시(詩)에서 따온 것인데 지금 이곳을 기생이라는 뜻이 담긴 기담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이 좋은 경치를 욕되게 하는 명칭이 아닌가?
두 사람의 승려가 작별을 하였다. 나와 유순지는 이별이 아쉬워서 그들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중이 말하였다.
“합하를 따라 하연(下淵)에 가서 놀고 싶습니다마는 속세가 너무 가깝습니다.”
중은 시축(詩軸)을 말아 넣고 훌쩍 떠나버렸다. 가는 걸음이 하도 빨라서 어느덧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곳에서부터 쉬엄쉬엄 걸어서 맑은 물, 좋은 경치를 만나면 아무데나 앉아서 시도 읊고 술잔도 기울이며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먼저 도착한 동행은 이미 마루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그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나가니 그 시냇물은 대일봉(大日峯)과 방장봉(方丈峯) 사이에서 흘러온 것으로 그 깨끗한 물에 씻긴 개울가 반석은 6,7십 명의 사람이 앉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였다. 그 바위에는 누가 썼는지 모르겠으나 큰 글자로 ‘세이암(洗耳巖)’이라는 3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귀를 씻는 바위라는 뜻이다. 속세의 더러운 소리를 씻어버리라는 뜻인가? 그리고 이 골짜기 이름을 삼신동(三神洞)이라고 하는데, 영신. 의신. 신흥의 3 절이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란다. 이곳 사람들이 귀신을 숭상하는 사실을 이것으로 보아 알 만하였다. <비지(秘志,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적은 책?)>에 이르기를 ‘근년에 최고운(崔孤雲, 치원)이 푸른색 나귀를 타고 나는 듯이 독목교(獨木橋)를 지나가므로 강(姜)씨 집안의 창두(蒼頭, 종)가 말고삐를 붙들고 쉬었다가 가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채찍으로 말을 두들겨 떠나고 말았다.’라고 쓰여 있고, 또 ‘고운 선생은 죽지 않고 오늘날까지 청학동에 와서 노니는데 청학동에 사는 중이 하루 3 번씩 고운 선생을 만난다.’라고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세상에 참으로 신선이 있다면 고운 선생이라고 신선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고운 선생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 좋은 곳을 버리고 어디 가서 노닐겠는가?
이날 유순지가 먼저 칠불암(七佛菴)으로 가고 나는 뒤따라가서 그곳의 중을 불러 물어 보았다.
“이곳 칠불암에 기이한 봉우리가 있는가? 볼 만한 폭포가 있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시내가 있는가?”
그러나 그 중은 오로지 칠암정사(七菴精舍)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하였다.
‘절안의 금부처와 채색 그림은 그 동안 싫도록 보지 않았는가? 때 마침 녹음방초 우거진 초여름을 당하여 볼 만한 경치도 없고, 또한 그 동안 산을 오르고 내리느라고 너무 피로하여 감흥도 이미 식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개울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좋은 경치가 있거든 쉬어 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마침내 홍류교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고 여공대(呂公臺)에 앉아 노닐었다. 그 동안 깊은 못을 구경하고 폭포 소리를 들으며 갓끈을 풀고 얼굴도 씻고 물을 움켜 입도 가시었다.
드디어 쌍계석문(雙溪石門)에 이르니 거기에 최고운의 필적이 있었다. 글자의 획이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 필체는 가늘며 힘이 있었다.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굵고 연한 필체와 달라 참으로 기이한 필체였다. 김탁영(金濯纓, 일손)은 이 글씨를 아동들의 습자 같다고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탁영이 문장은 잘하였으나 글씨에 있어서는 배우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끼 낀 바위위에 앉아 하얗게 흩어지는 폭포와 맑게 고인 물을 감상하는데 동자가 날이 저물었다고 알려 왔다. 몸을 일으켜 쌍계사에 들어가니 절 안에 비석이 서 있고 그 비석은 용머리를 쓰고 거북을 밟고 있는데 이마에 ‘쌍계사 고진감선사 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쓰였다. 전서체(篆書體) 글씨가 기괴하여 판독하기 어려웠다. 끝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봉교 찬(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쓰여 있다. 곧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인 광계(光啓) 연대에 만든 것으로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지금으로부터 7백 년 전의 일이다. 그 동안 흥망이 몇 번이었든가? 이 돌은 그 때의 돌인데 사람은 그 때의 사람이 아니구나. 이 비석을 보며 한숨짓는 것보다 신선의 기술을 배워 오래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새삼스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는 일찍이 고운 선생의 필적이 힘찬 것을 좋아하여 그의 글씨「墨本」를 구하여 벽에 걸어놓고 늘 즐기었는데 임진난을 겪는 동안 집과 그 글씨를 함께 잃어 버려 늘 한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금오문사랑(金吾問事郞)의 관직을 임명받아 문안(文案, 공문서)을 정리하는데 곁에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내 글씨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이르기를 ,
“자네는 일찍이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서체가 특이하기도 하네그려!”
하였다. 그랬는데 지금 고운 선생의 진본인 필적을 대하니 옛일을 생각하는 감회가 새롭다. 나는 종이와 먹을 찾아 그 글씨를 찍어 내었다.
이 쌍계사에는 대장전(大藏殿)과 영주각(瀛州閣)과 방장전(方丈殿)이 있고 옛날에는 학사대(學士臺)가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버렸다. 저물녘에 유순지가 칠불암에서 왔다.
4월 7일(병자), 유순지가 작별하였다. 그는 연전에 청학동에 가보았기 때문에 다시 가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김화도 역시 청학동은 여러 번 가 보았다고 하면서 농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갔다. 나는 두 사람과 작별하고 신상연 등과 함께 동쪽 고개를 올라가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골짜기는 황혼동이나 월락동과 비슷한데 키큰 왕대나무들이 길을 메웠다. 새로 올라오는 대순이 마치 송아지 뿔처럼 묵은 잎사귀를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가끔씩 이 길을 지나다니는 중들의 신발에 채어서 부러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대나무가 귀한 북쪽 지방 사람이므로 이런 것을 보니 매우 아까웠다.
절벽에 이르자 중들이 나무를 베어 사닥다리를 만들어 걸쳐 놓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밑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불일암(佛日菴) 앞에 도착하니 거기에 평평한 바위 대(臺)가 있다. 바위 앞면에 완폭대(玩瀑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에 오르자 푸른 봉우리 절벽 사이로 폭포수가 날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높이가 수백 자는 될 것 같다. 중국에 있다는 여산 폭포가 높다고 하나 나는 보지 못하였고 우리나라의 폭포로는 박연 폭포만 한 것이 없는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가 거기보다 두어 길쯤 더 높을 것 같다. 하지만 물이 길게 뻗은 것으로는 그보다 길겠지마는 중간에 막힘이 없이 곧바로 내리 쏟아지는 것으로 볼 때에는 거기가 여기보다 더 높을 듯하다. 하늘에서 비단을 내리 걸어 놓은 듯한데 온 골짜기가 천둥소리처럼 울어댄다.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눈처럼 휘날리는 폭포수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 한다. 이날 본 장관은 진실로 내 평생에 두 번 다시 볼 것 같지 않았다.
남쪽으로 향로봉이 있고, 동쪽으로 혜일봉(慧日峯)이 있으며, 서쪽에 청학봉이 있다. 중이 절벽위에 멀리 바라보이는 구멍을 가리키며 학소(鶴巢, 학의 둥지)라고 하였다. 옛날에 붉은 머리에 푸른 날개를 가진 학이 살다가 이곳에 오지 않은지 여러 해 되었다고 하였다. <비록(秘錄)>에 쓰여 있기를 ‘지리산의 청학이 무등산으로 옮겨 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예언이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보니 당나귀만한 산양(山羊) 한 마리가 향로봉 꼭대기에서 한가롭게 누워 있다가 비파 소리와 통소 소리에 놀라 일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옛날 금화산(金華山)의 신선이 길렀다는 저 산양이 이 산속에 노닌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당돌하게도 나를 유혹하여 신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심산이구나. 나는 말채찍을 들고 그놈을 향하여 큰 소리로 호령하니 그제야 산양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내가 구경을 끝내고 동구로 나오자 관아에서 보낸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을 타고 길을 나섰으나 마치 아름다운 미인을 이별한 듯이 발걸음이 느리다. 그 동안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천 길이나 되는 아름드리나무가 바늘처럼 가느다랗게 보였다. 마을 이름을 물으니 화개동(花開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다른 곳보다 특히 따뜻하여 꽃이 맨 먼저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옛날 정일두(鄭一蠹 , 여창汝昌)가 이곳에 별장을 지어 놓고 후학을 가르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두가 이산에 올라갔다가 힘이 빠져서 허리에 새끼를 매고 중을 시켜 앞에서 끌어당기게 하니 탁영(濯纓, 김일손)이 그것을 보고 이르기를,
“중은 어디서 저 죄인을 잡아 왔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에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이지 못하고 이 텅 빈 산속에 말라죽도록 버려두니 조물주의 편에서 보면 애석한 일일세. 그러나 역시 타고 난 수명은 다 누리겠지?”
하였었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나온 소리인 것이다. 마음은 본래 허명(虛明)한 것인데 말로써 표현하였을 때에 어떤 징조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어찌하였든 그 뒤에 일두는 일찍 요절하고 탁영은 비명에 죽었으니 그들의 운명은 과연 조물주가 애석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이 또한 말꼬리에 나타난 징조가 아닌가? 대개 천도가 인사와 모르는 사이에 합치되고 운명은 시운과 합치되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점필재와 탁영의 지리산 기행을 보았는데 그들이 이산에 올라왔을 때에는 모두 비바람으로 인하여 산행에 있어서 많은 낭패를 보았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이 바르고 훌륭한 것은 하늘과 땅이 다 아는 바인데 장차 일어날 일의 징조를 산신령이 미리 알린 것인가? 오늘날 나와 유순지가 이 산에 들어온 뒤에 날씨가 맑고 온화하였으며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왔으나 하늘은 금시 맑아져서 만 리 먼 풍경을 조금도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 비록 한 때 신과 용이 노하여 소나기를 내리기는 하였지마는 이는 오히려 다음날 더 화창한 날씨를 선사하였으니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한낮에 섬강(蟾江)을 끼고 서쪽으로 가다가 와룡정(臥龍亭)에서 말을 쉬었다. 이 정자의 주인은 생원인 최온(崔蘊)이다. 큰 언덕이 하나 강 가운데까지 깊숙이 들어가다가 강물을 막고 있는데 그 강기슭에는 맑고 깨끗한 백사장이 마치 흰 비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 그리고 그 백사장 뒤로 반석이 널찍하게 깔렸는데, 그 위에 3,4 간의 초당(草堂)을 짓고 그 둘레에 푸른 대 푸른 솔을 심어 그림처럼 둘렀다. 속세를 멀리한 듯한 곳이다. 이날 밤, 본부(本府)의 남창(南倉)에서 잤다.
4월 8일(정축),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위에 잠시 쉬고 본부로 돌아 왔다. 처리하여야 할 공무가 가득하고 공문서들이 책상위에 쌓였다. 여장을 풀고 지팡이를 버린 뒤에 속리(俗吏)가 할 일로 돌아가니 부끄러울 뿐이다.
생각하여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방탕하여 유명한 산과 물을 찾아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아직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에 삼각산을 집으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백운대에 올랐으며 청계산. 보개산(寶盖山). 대마산(大摩山). 성거산(聖居山) 등지에서 독서를 하였다. 그리고 벼슬길에 올라 사명(使命)을 띠고는 8도를 돌아 다녔는데 곧 청평산을 보고 사탄동(史呑洞)에 들어갔으며, 한계산과 설악산에 노닐었고, 봄에서 가을에 걸쳐 풍악의 구룡연과 비로봉을 본 뒤에 동해에 배를 띄우고 영동(嶺東) 9군(九郡)의 산수를 두루 돌아 보았다. 또 적유령(狄踰嶺)을 넘어 압록강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마천령과 마운령을 건넌 뒤에 칼을 집고 장백산을 넘어 파저강(波猪江)과 두만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북해(北海)에서 배를 돌려 돌아오다가 삼수갑산을 구경하고 혜산의 장령(長嶺)에서 앉아 쉰 뒤에 백두산을 굽어보며 명천(明川)의 칠보산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을 넘고 서해바다로 돌아 구월산(九月山)에 올라 보고 백사정(白沙汀)에 정박하였다. 중국을 3 번 들어 갔는데 요동에서 북경까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 쳐놓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세(地勢)가 동남이 낮고 서북이 높아서 남쪽에 있는 산의 꼭대기는 북쪽 지방에 있는 산의 발꿈치에도 못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리산이 비록 명산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돌아본 뒤에는 풍악이 명산의 집대성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바다를 보고는 강물을 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 지리산도 한낱 돌덩이 정도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지금 천왕봉의 제일봉을 올라본 뒤에 그 산이 크고 웅장하여 우리나라의 산 중에 조종이 됨을 깨닫겠다. 이산은 흙이 많고 바위가 적어 더욱 높아진 것임을 알겠다.
지금 저 지리산은 그 근원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4천 리를 뻗어 내려오다가 빼어난 힘찬 기운이 남해에 닿아 그 영기가 우뚝 솟은 것이다. 이산은 12 개의 고을로 둘러있고 그 주위가 2천 리나 되는데 안음과 장수(長水)가 그 어께에 달려 있고, 산음과 함양이 그 등에 업혀 있으며, 진주와 남원이 배에 안겼다.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에 차였고, 하동과 구례가 그 무릎을 베고 있으며, 사천과 곤양(昆陽)이 그 발에 밟혔는데, 그 산이 차지한 지방의 태반은 호남과 영남이다.
저 풍악은 북쪽 지방에 있으면서도 4월이면 눈이 녹는데 이 산은 남쪽에 있는데도 5월에 아직 얼음이 굳게 얼어 있으니 그 산의 높이를 이로 미루어 보아 알 만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이 세상에서 큰물은 3 군데가 있는데 황하와 장강과 압록강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압록강은 서울의 한강 정도에 불과하다. 이로 보아 실지로 가보지 않고 그냥 등위를 매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전하여지는 기록도 다 믿을 것이 못된다.
나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바다와 산을 내 두 다리로 직접 답사하였다. 여행에 대하여서는 중국의 자장(子長, 사마광)같이 온 세상을 돌아다닌 사람에게도 그리 양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가본 곳에는 그 높이로 보아서는 지리산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만일 앞으로 인간 세상의 영리를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 산다면 이 산이 가장 은거하기 좋을 듯하다. 국가의 안위나 경제를 깊이 아는 것에 대하여는, 나 같은 백수 서생(白首書生)이 어찌 알겠는가? 오래지 않아 허리에 찬 인끈을 풀어 버리고 나의 이 숨어 사려는 뜻을 이루겠다. 진실로 산수가 깨끗한 곳에 한간짜리 방이나 하나 빌릴 수 있다면 나의 고상한 감흥만 풀겠는가? 그 동안 내가 돌아다닌 곳을 조용히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역 39년(1611년, 광해3) 4월 일에
묵호옹(黙好翁)이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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