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타곤(懶驢 坤) 3-22
머리 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가고---, 오삼계는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 단숨에 술을 들이 킨 후에 한 손으로 진원원을 껴안았다. 눈치 빠른 악사들은 재빨리 밖으로 물러나고---.
그렇게 그가 애첩과 잠시 즐기는 시간에 밖에서 건물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관 하나가 소리쳤다.
"전하, 황제 폐하의 성지가 내려 왔습니다!"
잠시 후 의관을 차려 입고 마당에 나온 오삼계는 바닥에 무릎을 끓고 황제가 보낸 사신이 성지를 읽어주길 기다렸다.
"평서왕(平西王) 오삼계는 들으라.
역도를 정벌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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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듣기로 그대의 아들 중에 오응웅이라는 자가 있어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고 덕망 있는 자라 들었도다
속히 북경으로 보내어 짐을 보필하도록 하라.
오응웅을 보내는 대로 그대의 또 다른 자식 오자성은
운남으로 돌아가 가족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게 하라
-------후략"
긴 장문의 황제가 보낸 성지라는 글은 명의 영력제를 처단한 것을 칭찬하는 말로 가득차 있었지만 말을 종합해 보면 볼모로 붙잡혀 있는 오자성 대신 다른 자식을 보내라는 명이었다.
난봉꾼인 오자성이라는 이름의 자식에 대해 포기하고 있는 오삼계였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물려줄 후손으로 또 다른 자식 오응웅을 점찍고 있던 오삼계였다. 성지를 들으면서 마음속에서는 불꽃이 솟아올랐지만 여기서 반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청나라 황제의 신하인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성지를 다 읽고 난 후에 자리에 엎드리면서 그가 인사했다.
"평서왕 전하, 소인 홍승이 인사 올립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일어서서 절을 받은 오삼계의 입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전하."
엎드려 있던 자는 일어나서 지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성지라 불리는 황제의 명이 담긴 서찰을 오삼계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전하, 보정대신 오배 대인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니 이번에 오응웅 공자와 함께 북경에 와 줄 것을 따로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배 대인이 무슨 일로 날----?"
"소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다만 이 말씀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제의 성지를 가지고 온 삼십이 채 안되어 보이는 젊은 문관을 바라보며 오삼계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어리고 조정에서의 입김도 거의 없는 미약한 자로 보였다. 이런 자가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리가 만무했다.
"알았네, 자네는 그만 물러가도록."
"예, 그럼 소신은 물러갑니다."
뒷걸음질로 물러서는 그 젊은 문관을 바라보며 오삼계는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들린 성지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신하이니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은 황제의 명이 아니라 오배의 명이라는 것을 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의 실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오배야말로 진짜 황제라 할 수 있었다.
"오라니 가야지--. 그런데 그가 무슨 일로 날 불러내는 것일까?"
오삼계는 자신에게 보내진 성지를 통해 소식을 전해 온 오배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고민에 빠져들었다.
조정이라는 곳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 오삼계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에 따라 권력이 오가고, 심한 경우 생명이 오가는 자금성에 가려면 미리 준비하고 가지 않으면 크게 낭패를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부른 오배의 의중을 알기 위해 오삼계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금성 뒤쪽에 만수산(萬壽山)이 있고 그곳에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한 건물이 있었다. 본래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수황정(壽皇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건물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도 찾지 않아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왼쪽 팔이 없는 한 명의 중년 부인이 그곳에서 멍하니 건물 옆에 세워진 나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무 위에 숨어 있는 소구는 짜증이 난 얼굴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뭐야? 언제까지 이곳에서 저러고 있을 거지? 벌써 두시간이나 흘렀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소구는 그 여자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화련 누나가 말해준 비밀통로는 저 수황정이라는 낡고 다 부서진 건물 안에 있었다.
땅이 꺼져라 탄식을 토해내는 외팔이 부인의 입에서는 한줄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왜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있는 것일까---? 모두가 다 죽었거늘---."
그녀의 말을 듣고 소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살하러 온 건가? 안 말릴 테니 죽으려면 빨리 죽어라.'
소구의 생각이었다.
그때 소구의 귀를 울리는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공주님, 그만 떠나시죠. 누가 공주님의 모습을 볼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왜 아직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인가? 나라도 망하고 나는 더 이상 공주라 할 수 없네."
"소신은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제게 맡겨진 어명은 공주님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우, 그대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발 떠나가게. 난 더 이상 장평이 아닐세."
그렇게 말하는 숭정제의 딸 장평 공주는 마지막으로 부황이 자신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 도착하기 직전의 자금성은 혼란의 극에 달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거처인 수령궁(壽寧宮)에 있었다. 칼을 들고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부황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역도들의 손에 욕을 볼 것을 두려워한 부황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너는 무슨 죄로 짐의 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이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단 말이냐?!>
탄식을 토해내며 그렇게 소리친 부황의 검은 자신을 내리쳤지만 목숨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부황은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하고 그 때 왼팔만 자르고 떠나 버린 것이다. 정신을 잃은 사이 시녀들이 자금성에서 그녀를 대리고 도망치고----.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아직도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외치던 부황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하---아, 천하가 넓지만 내가 갈 곳은 어디란 말인가?"
"어딘가 머물 곳이 있겠지요."
"그래, 떠나야지. 떠나야 하겠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을 내 뱉은 그 외팔이 여자는 소나무를 향해 절을 하더니 한 젊은 무사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나무 위에서 뛰어 내린 소구는 조금 전의 외팔이 부인이 서 있던 자리에 가보았다.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한 장소?"
비석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게 된 소구는 놀란 눈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외팔이 여자와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젊은 무사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숭정제가 팔을 잘랐다는 장평 공주로구나---."
방소구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누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불쌍한 비운의 공주를 이곳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는 일--, 과거를 잊고 새 삶을 찾아야 할텐데----."
멀어져 가는 망국의 공주를 바라보며 소구는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다. 아까는 귀찮아서 자살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나라의 공주가 팔은 잘려 나가고 허름한 차림에 노숙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서글픈 일이었다.
그렇게 장평 공주의 행복을 빌어주고 나서 소구는 뒤로 돌아섰다.
먼지 가득한 수황정 내부에서 기관장치를 찾아 헤매는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게 된 소구의 얼굴에는 불만이 어렸다.
"그래도 이곳은 자금성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망한 나라의 황제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 청의 관리들이 너무 소홀히 대하는 구나---."
투덜거리면서 먼지 속에서 소구는 비밀통로를 찾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끼이익'
너무 오래되어서 기관장치의 문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소구는 그것을 힘으로 열어 젖혔다.
"으--, 더럽게 무거운 문이로구나."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선 소구의 눈은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열려진 문을 다시 닫아 놔야 하는 것이다.
"만년한철이었군. 어쩐지 무겁다 했더니---, 그래도 극악봉 보다는 가볍다."
극악한 무게를 자랑하는 혼천문의 수련도구 극악봉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소구는 열려졌던 문을 다시 밀기 시작했다.
비밀통로가 비밀인 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 참, 누나는 어떻게 이 문을 열고 이곳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일까?"
소구의 의문이었다. 누나의 연약한 팔로 이 문을 밀고 들어 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문을 열게 해주는 기관장치는 수십년 전에 파괴된 것이라는 걸 알아본 소구로서는 당연히 가지게 되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소구는 지하를 통해 자금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가 흘렀다.
소구의 핏발이 곤두선 두 눈은 사방으로 갈라진 지하의 비밀통로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자금성의 지하에 있다는 비밀통로는 거미줄 보다 수십배 복잡하게 갈라져 있는 상태였다. 끝없이 튀어나오는 기관과 그리고 마기(魔氣)를 풀풀 날리는 숨어있는 자객들. 그들은 굳이 땅속에서 자신의 기척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충분히 강한 자들이었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상대를 잘 못 만난 탓에 대부분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죽일 생각은 없지만, 굳이 덤벼드는 놈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고---."
소구는 자신의 앞에 개구리처럼 뻗어 있는 또 하나의 검은 천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목숨이 거의 경각에 달해 있는 자객의 복장을 한 자가 고개를 쳐들고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나? 심부름꾼이야. 황제에게 전할 물건이 있어서---."
소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자의 얼굴 위로 억울하다는 빛이 어렸다.
"제--젠장, 이곳은 황궁 무고로 통하는 길인데---. 왜 이곳으로 와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자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숨을 거두었다.
그런 자객의 모습을 보면서 소구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가야 황제의 침실로 가는 거야?"
황궁 무고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는 자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한 상태였다. 황궁 무고를 노리고 찾아온 적도 아니었고, 단지 황제를 만나러 온 사람에게 대부분의 동료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하의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입에서도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 저 괴물을 빨리 황제에게 안내해라.'
황궁 무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위사들의 대장이 전음을 날렸다.
불과 하루 동안이었다. 자금성 최고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무고의 경비를 맡고 있는 자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것은.
기관 함정들 대부분이 파괴되고 위사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지만 이제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한 일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흘렀으면 몽땅 다 죽었을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소구의 눈앞으로 천장에서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뒤덮은 자가 뛰어내려왔다.
첫댓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합니다~감사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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