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과 친일진상규명법을 둘러싼 논란 등을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의 문제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고 있는 가운데 26일로 순국 94주기를 맞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침략원흉을 저격한 독립투사일 뿐 아니라 독실한 신앙인이자 평화주의자인 안의사의 사상과 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애쓰는 가톨릭 사제가 있다. 주인공인 충북 청주시 영운동성당 신성국 신부(43·세례명 노엘)를 성당 안에 있는 사제관에서 만났다.
사제관은 ‘안중근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안의사의 영정과 ‘見利思義見危授命(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등 안의사가 남긴 눈에 익은 휘호들이 내걸려 있었고 관련자료들도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네 차례나 방북해 평양에서 남북 공동미사를 집전한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들도 통일사제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보게 했다.
-군종신부 때부터 생애·사상연구 몰두-
신성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종하면서도 민족공동체 안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한국 가톨릭 신앙인의 표상을 찾다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군종신부로 근무하던 시절 신성국은 생도들에게 ‘참 군인’과 ‘참 종교인’의 표상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사관학교의 정신교육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국가관을 주입하는 데 그치고 있어 구체적인 인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고려대 사학과 노길명 교수의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강연을 듣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안중근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신성국은 안의사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에 몰두했다. 또 미사 강론 등을 통해 생도들에게 안중근을 설파했으며 ‘의사 안중근 도마’라는 책까지 내게 됐다.
군종신부를 마치고 청주에 부임한 신성국은 청소년들이 일제 시기를 포함한 우리의 근현대사에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들에게 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해 조선왕조 500년으로 끝나는 시험과목일 뿐이었다. 그는 청주 인근의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청원군 청소년수련관을 주목했다.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수련관이 대체로 그렇듯이 청원군 수련관의 운영도 전시행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00년 청주교구가 수련관을 위탁운영하게 된 것을 계기로 신성국은 이곳의 문패를 ‘안중근 학교’로 바꿔달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학교 안에 안중근 추모예술관을 열어 안의사의 휘호와 일대기를 담은 자료를 전시했으며, 여순감옥 체험실, 의병체험실 등 안의사의 사상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갖가지 시설과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신성국은 “놀고 즐기는 기존의 청소년수련관에 익숙했던 학생들이 학교를 나서면서 ‘가슴이 벅찼다’ ‘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와 인권이라는 안중근의 핵심사상을 이해한 학생들이 실생활에서도 실천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재정이 빈약한 데다 인력도 충분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청소년수련관이 애들 스트레스 풀어주면 됐지 웬 뜬금없이 안중근이냐’는 주위의 오해와 편견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신성국은 “우리들의 노력과 청소년들의 좋은 반응이 결국 안중근 학교가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안중근 학교의 운영은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가 물려받았으며, 신성국은 교장직에서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면 도움을 아끼지 않는 ‘대부(代父)’ 역할을 맡고 있다.
신성국이 발견한 안중근은 독립투사 이전에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데다 음주가무에 말타고 사냥도 하면서 인생을 즐길 줄 알았다. 신성국은 “안의사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양심과 정의감에 불타는 등 한국인의 가장 좋은 기질만 모아놓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안중근 학교’ 초대교장 역임한 ‘대부’-
신성국은 최근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안중근 정신’을 실현했다. 탄핵철회 집회현장에서 ‘안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구국의 심정으로 혈서를 썼듯이 애국 헌혈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는 “요즘 헌혈 비상 수급을 위해 대한적십자사가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같은 피 부족 상황을 타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가 말살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혈서를 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희생을 보여주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자말자 곧바로 적십자사로 뛰어가 헌혈을 했다는 신성국은 “이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대한적십자사와 논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을 뒤덮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해 그는 성서적인 해석을 내렸다. 신성국은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새 하늘 새 땅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이 땅에 일렁이는 촛불의 물결은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듯 낡고, 더럽고, 불의한 것들을 태워 없애고 새로운 생명과 희망, 질서를 세우려는 민중들의 염원”이라고 분석했다. 탄핵을 주도한 세력들이야말로 이토 히로부미이며 촛불을 밝히는 이름없는 이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안중근이자, 김구이며 홍범도라는 것이다. 신성국은 “촛불집회는 구원의 사건, 해방의 사건, 창조의 사건”이라고 거듭 성서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둠의 땅을 밝히려는 촛불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성국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 동안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지금도 사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로 있으면서 안중근평화상 제정을 주도했는데 초대 수상자는 ‘평화를 여는 가톨릭 청년회’였고 FX사업의 비리를 폭로한 조주형 대령이 그 뒤를 이었으며 올해 수상자는 송두율 교수였다. ‘사제단이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비해 활동이 뜸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시대상황과 조건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시민·사회단체의 비약적 발전과 성숙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성국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집행부위원장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참으로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사건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면서 “법원으로부터 기록공개 판결을 얻어냈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도 점차 거세지고 있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탄핵사태 맞아 ‘애국 헌혈운동’ 벌일때-
1961년 충북 증평에서 태어난 신성국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부모의 권유로 아무런 의심없이 서울 성신고등학교와 광주가톨릭신학대를 나와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 또래의 젊은이들이 대부분 ‘5월 광주’의 강력한 자장권(磁場圈)에 빨려 들어갔듯이 신학대학 1학년때 자신의 두 눈으로 목도한 광주민중항쟁의 충격적인 장면 장면은 그를 번민과 고뇌의 끝으로 몰고 갔고, 마침내 ‘행동하는 사제’의 길로 내몰았다. 신성국은 “항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사실이 평생의 부채로 남았다”고 말했다. ‘호남아(好男兒) 스타일인데 예쁜 여자를 보면 독신 생활에 대한 후회가 생기지 않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신성국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느님이 나를 정상적인 남자로 만들지 않으신 것”이라고 껄껄 웃은 뒤 “그러나 여성을 소유하려는 인간적 욕망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많아 도대체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럴 법도 하다. 정의구현사제단활동에다 안중근정신 구현·KAL사건 진상규명·촛불집회 참여·헌혈운동 전개 등 하나같이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또 있다. 신성국은 성당에 다니는 조무래기들이 주축이 된 ‘안중근 축구단’의 감독이기도 하다. 주말마다 이들을 데리고 청주시내 초등학교 축구팀과 일전을 벌인다는 그는 “골목대장 노릇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