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로 새로운 역사를 쓰다
사기(史記)의 역사관과 평가
<사기>의 집필 목적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일까. ‘태사공 자서’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밝힌 집필 목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보임소경서’) 했다. 이러한 원대한 이상과 포부는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총망라하여 서술함으로써 자신 또한 이 분야에서 경지를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사기>는 조정의 명을 받아 집필한 관찬(官撰) 역사서가 아닌 사마천 스스로 발분(發憤)하여 집필한 사찬(私撰)이다. 이 점은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사마천의 개인적 사관이 좀 더 직접적으로 책에 녹아들 수 있게 했고 당대의 제왕이었던 한무제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능케 했다.
둘째, <사기>는 발분(發憤) 의식의 소산이다. 그가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목숨을 이어 나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역사 기록을 완성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보임소경서’에서 사마천은
“옛날에도 잘살고 신분이 귀했지만 이름이 닳아 없어져 버린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며 오직 평범하지 않은 사람만이 거론될 뿐입니다. (중략)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좌구는 눈이 없고 손자는 발이 잘려 결국 세상에서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물러나 서책을 논하여 그들의 울분을 펼치고 문장을 세상에 전해 주어 스스로를 드러냈습니다.”
라며 자신이 궁형을 감내하면서까지 <사기>를 지으려 했던 속내를 드러낸다. ‘백이열전’에서 ‘천도시비(天道是非: 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론을 제시한 것도, 신념을 위해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모습이 마치 사마천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치욕을 견뎌 내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管仲)이나 오자서(伍子胥), 경포(?布) 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그들의 삶이 사마천이 자신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백이와 숙제를 그린 채미도(采薇?). 사마천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열전에서 다루면서 천도시비론을 제시하였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직서(直書)와 포폄(褒貶)이다.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직서) 그에 대해 역사가가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평가하는 것(포폄)이다. 이는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微言大義: 작은 말 속에 담긴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도 일치되는데, 공자의 역사 집필 원칙을 누군가가 계승하여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넷째,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함이다. 사마천은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진 아버지 사마담에게 자신의 일을 이어받아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듣는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업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하고, 20여 년에 걸친 고된 작업 끝에 결국은 이루어 낸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관과 서술 방식과의 상관성
<사기>가 다른 역사서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그 안에 담긴 사마천의 현실적인 역사관이다. 사마천은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관점을 곳곳에서 드러냈으니, 예를 들어 항우는 제왕이 되지 못하고 한고조 유방에게 패배했음에도 항우의 이야기를 열전이 아닌 본기에 실어 ‘고조본기’ 앞에 배치했다. 사마천이 ‘항우본기’를 <사기본기>에 넣은 것은 그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진한 혼란기에 실질적인 통치 지위를 갖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의제(義帝)가 있었지만 명목상의 존재일 뿐 모든 실권이 항우에 있었으며,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가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제후왕을 임명하는 등 사실상 절대 권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또 있다. 사마천은 유약하고 무능하며 꼭두각시에 불과한 혜제(惠帝) 대신, 실질적으로 천하를 장악했던 여태후를 내세워 ‘여태후본기’를 썼다. 이것 또한 사마천의 현실적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여태후의 군주적 지위는 인정하되, 그녀의 부정적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이는 사마천의 통변론(通變論)과도 연결된다. <사기>의 밑바탕에는 ‘변화(變)’야말로 역사의 기본 틀이며 이것이 없다면 역사의 존재 당위도 없다는 것, 즉 변화가 인류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사마천은 ‘십이제후연표’의 서문에서 “사물이 성하면 쇠하니 진실로 그것이 변화하기 때문이다.(物盛而衰,固其變也)”라고 했으니, 역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기본이며 그런 변화하는 양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역사가 본연의 자세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中原)과 이족(夷族)을 구분 짓지 않는 열린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기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는 오나라가 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越)나라는 우(禹)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부정하는 관점을 담고 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위상이 북방의 전통 강국 진(晉)나라나 동방의 강소국 노(魯)나라, 정(鄭)나라의 위상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주류였음에도, 이 편을 <사기세가>의 첫머리에 두었다는 것은 매우 독창적인 안목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사마천은 덕정을 중시하는 통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근본은 인(人)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면모는 진섭(陳涉), 진승(陳勝)을 열전이 아닌 세가에 편입시킨 데서도 엿보인다. 진(秦)나라 말기 일개 고용살이 신분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이 되었다가 불과 6개월 만에 평정된 진섭을 통해 사마천은 거대 제국 진(秦)나라의 멸망을 그렸다. 진 제국도 일개 고용살이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 즉 보이지 않는 백성들의 힘이 대단히 무섭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후에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집필하면서 진섭을 세가가 아닌 열전에 강등하여 배치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사기>에 대한 평가와 위상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 말미에서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라고 했다. 정본을 숨겨 두려한 사마천의 우려대로 통치자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은 <사기>에는 후세의 누군가에 의해 내용이 삭제되거나 변경된 흔적이 남아 있다. 더구나 한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버지 경제(景帝)와 무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효경본기’와 ‘효무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사기>는 그것이 완성된 전한 시대 때부터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한무제 초상. 사마천은 <사기>에서 당대의 왕인 한 무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출처: <삼재도회>)
이는 90여 년 늦게 나온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달리, <사기>에는 유가 못지않게 제자백가를 두루 다루려는 학문적 균형 감각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마천은 유가보다는 황로 사상에 무게를 두고, 개방적인 사고로 자객, 광대, 점술가, 의사와 상인 등 당시로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도 과감하게 열전에서 다루었는데, 이는 당시 유가적 사회질서를 세우려 했던 통치권자들에겐 못마땅했을 것이다. 예컨대 사마천은 ‘자객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에서 9류(流) 3교(敎) 등 당시 사회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반고는 <한서>에서 ‘동방삭전(東方朔傳)’을 제외하고는 비정통파나 하류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고 역시 <한서> ‘사마천전(司馬?傳)’에서 “그(사마천)가 시비를 가리느라 성인의 모습을 왜곡했으며, 대도(大道)를 논할 때에도 황로(黃老) 사상을 앞에 두고 육경(六經)을 뒤에 놓았으며, 유협(遊俠)을 서술할 때에는 처사(處士)들을 제치고 간웅(奸雄)들을 부각시켰다. 또 화식(貨殖)을 서술할 때에는 세력과 이익을 높이고 천하고 가난한 것을 수치로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가 만든 폐단이다.”라며 사마천을 호되게 비판했다. ▶반고의 <한서(漢書)> 중 <무제기>. <한서>는 24사(史)의 두 번째 역사서로, 앞서 나온 <사기>를 비판한 내용이 많다.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劉知幾) 역시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통(史通)>에서 반고를 기리고 사마천을 깎아내렸다. 특히 그는 ‘이체(二?)’ 편에서, <사기>와 <좌전>을 기전체와 편년체의 비조(鼻祖: 시조)로 삼지만 진정으로 두 문체를 대표하는 책은 반고의 <한서>와 순열(荀悅)의 <한기(漢紀)>라고 했다. 그가 볼 때 사마천이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킨 것이라든지 한나라를 배반한 제후왕인 오왕 비(?), 회남왕 유장(劉長)과 유안(劉安), 형산왕 유사(劉賜) 등을 열전에 편입시킨 것, 심지어 한나라 초기 공신에 불과한 소하(蕭何), 조삼(曹參), 장량(張良),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을 세가에 둔 것이나, 공자, 진섭(陳涉), 외척(外戚)을 세가에 둔 것은 인정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기>는 당대(唐代)부터는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대(宋代)까지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당송팔대가인 한유(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남)’이라고 평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그것을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대(元代)에는 잠시 주춤했으나, 청대(淸代)에 기윤(紀?)과 조익(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양계초(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장병린(章炳麟)도 <사기>와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魯迅)은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이렇듯 오랫동안 회자되면서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 24사(史)의 모범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관찬 역사서도 아닌 사마천 개인의 기록인 <사기>가 후대에 24사(史)의 필두로 거론된 것은 우선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한무제까지 이르는 시기의 유일한 통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마천이 역사가로서 끈질기게 고집한 사실성과 현실성이 <사기>를 오랜 세월 동안 살아 숨 쉬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글 김원중 10여 년간 <사기> 번역에 매진하여 국내 최초로 <사기>를 완역했다. 충남대학교 중문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중문과에서 중국 고전 문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건양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김원중 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사기>, <중국문화사>, <고사성어 백과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정사 삼국지>, <삼국유사>, <정관정요>, <한비자>, <당시>, <송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