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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37~39절/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오늘 본문을 갖고 두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만일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를 계속 다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초청에 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 앞에서 정직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1. 정직하게 물어야만 할 질문: 내게 영적 목마름이 있는가?나는 영적 목마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 목마름,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그 영적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영적 목마름이 없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목마름이 없다면 그는 주님께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교회는 나와도, 주님 자신에게로 나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 자신의 영적 목마름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들에 대한 목마름입니까? 어떤 면에서 본문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리까지 우리를 몰고 갑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도록 말입니다. 왜 여러분은 교회에 오십니까? 무엇을 얻고자 함입니까?2. 영적 목마름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장애물: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영적 목마름을 잊어버리게 하는 최고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우리가 다른 많은 것들에 의해서 목마름이 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정작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최고의 장애물은 바로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복음의 진리를 전하면서 이 문제를 수없이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우리 교회에 오셔서 처음으로 경험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제가 왜 그토록 자기 의의 문제를 건드리고 다루었는가 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다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아우성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세상 만일까요?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교회마저도 이런 외침으로 가득해지고 있고, 그런 외침을 가장 잘 만족시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오해까지도 생길 만큼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요구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막8;34,ㅁ마16;24,눅9;23)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기 보다는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확인받고자 합니다. 자기 의견이 관철되어야 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따르고 믿는 제자들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목마름이라고는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일 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종류의 목마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 한 가지 예는 자기 연민의 형태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로 나를 좀 알아달라는 외침입니다.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줄 사람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셔야 할 의미와 정체성을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마약보다도 무섭고, 도박보다도 무서운 중독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독인 것입니다. 이 모든 생각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존심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목마름은 간혹 우리의 마른목을 해갈시켜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질식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은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벧전 2장 7~8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버린 돌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이 멀고 귀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이요 들린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참 소망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주님의 몸으로 세워지고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어 우리를 견고하게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믿지 않음으로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지만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3.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바울 사도가 복음을 설명할 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롬 3:21).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의의 개념은 오직 율법의 행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복음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은 율법과 별개로 주어진 의이며,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에 대해서 절망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것은 자기 의에 주린다는 말씀이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의가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 의에 대해서 절망한 사람입니다. 자기 의의 깨어짐을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자기 의가 깨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때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심각한 죄였는가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행한 죄가 어떤 행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피상적으로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자기 사랑입니다. 죄는 자기 의를 추구하고 거기에 목말라 하는 삶의 태도이며, 정신입니다. 종종 저는 회개가 어렵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렇게 느끼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회개가 왜 어려울까요? 회개는 자아 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아 중심의 삶은 성령 충만을 소멸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자기 옛 사람이 못 박힌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회개가 없이 그 삶으로 가지를 못합니다. 회개는 자기 의의 죄 성을 보지 못하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전히 “나를 알아 달라. 나는 억울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혹은 이런 사람이다)”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생각들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나는 희생자다’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억울한 사람인데, 누가 내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자기 의에 목마른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희생자다’하는 의식으로 인도합니다. 희생자는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초청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의의 죄 성을 깨닫고 자기 의를 추구하고 살아온 자신의 더럽고 추함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자기 존재 의미와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쓴 모든 삶의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우상 숭배였는지를 고백하는 사람을 주님은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4. 자기 의의 더러움을 노출시키고 산산이 깨뜨려라.주님의 사역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셔야만 했을까요? 유대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 왕들과 지도자들이 왜 주님을 그토록 미워해서 죽이기까지 해야 한다고 느꼈을까요? 주님이 무엇을 그리도 대단히 잘못을 하신 것입니까? 아무리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런 살의가 섞인 적의를 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받으신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하셨다는 말씀은 그들의 자기 의가 죄악임을 고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미워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자기 의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기 의를 공격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자기 의를 공격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를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자기 의가 무너지지 않은 채,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셨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가 공격을 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는 길은 자기 의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저항하고 자기 의의 더러움을 노출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초청은 그저 ‘오면 좋고 안 오면 할 수 없고’의 수준의 초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의의 목마름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자기 의를 채우려는 욕심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그것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기 의의 목마름이 깨어지지 않은 채,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셨다면 주님께서는 지금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대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 상태로 내게 와도 너는 결코 네 영혼의 목마름이 채움 받는 것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런 주님의 초청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 아십니까?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맛보지 못하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 드립니다. 주님의 약속을 맛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 자기 의에 대한 목마름을 추구하면서 주님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 의의 목마름을 가지고 주님을 계속해서 쫓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보여주게 될 결국은 위선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듣는 수준 이상으로 절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해서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칠 수도 있고,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신앙의 형태일 것입니다.5. 자기 의의 교묘한 형태들을 분별하라.우리가 자기 의의 교묘한 형태들을 분별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사람들은 그런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명성을 추구하고, 성공과 권력을 추구합니다. 누가 이런 것들을 싫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학벌을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고,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들은 다 헛되다고 가르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세상적 추구가 종교적으로 옷을 입게 되면 그것은 신앙의 경력이거나, 혹은 내가 가진 은사 혹은 교회의 직분들로 둔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의의 교묘한 형태들일 뿐입니다.
성경이 한 결 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이런 것들? 이전에는 목숨을 걸고 추구하고 살았으며, 그것들이 마치 삶의 의미라도 되는 양 생각되었던 것들이 다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바울 사도 한 사람만의 고백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것을 동일하게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변화, 가치와 방향의 변화는 바로 참된 회개의 증거입니다. 회개는 자기중심의 삶에서 성령 충만의 삶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것뿐입니다.6. 교회는 목마른 자들의 것이다.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여러분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까? 여러분은 자기 의의 더럽고 추함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자기 의의 깨어짐을, 그 절망을 경험하고 주님께 나오셨습니까? 그런 절박함을 가지고 믿으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내게는 이전의 그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뿐입니까? 교회는 바로 목마른 사람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의에 주린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주린 자들의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의의 깨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