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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무영신룡단혼도의 신위
청의중년인은 혼자서만 동그마니 앞에 남게 되자 피식 웃으며 고복양
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뇌화신주가 마치 신주 단지라도 되는 양 툭하면 그걸 앞세우
고 있구려. 하지만 원래 그런 신외지물은 그리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오."
고복양은 청의중년인의 음성을 듣자 그가 조금 전까지 중인들 틈에서
말하던 자임을 즉각 알아보았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청의중년인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
다.
"흐흐…… 귀하의 배포는 정녕 부러을 정도요. 뇌화신주가 그렇게 만
만하게 보인다면 어디 직접 당해 보시지."
이어 그는 노잔양에게 눈짓을 했다.
이에 노잔양이 수중에 들고 있던 뇌화신주를 막 청의중년인에게 던지
려는 순간.
"잠깐!"
청의중년인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고복양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왜, 이제야 겁이 나는가? 하지만 너무 늦었다."
청의중년인은조긍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
다.
"그게 아니라, 내게도 마침 약간의 화력을 가진 물건이 있는데
귀하도 흥미가 있다면 한번 보시구려,"
이어 그는 품속에서 오리알만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냥 뇌주라고 하는 건데 아마 뇌화신주보다 못하진 않
을거요."
고복양과 노잔양은 그 구슬을 보자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모양으로 보아 뇌화신주와 너무도 흡사한 게 아닌가!
특히 노잔양은 청의중년인의 수중에 들린 뇌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가 안색이 변한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어디서 노부의 뇌화신주를 훔쳤느냐?"
청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운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요? 이건 귀하의 뇌화신주가 아니라 내
가 십여 년의 연구 끝에 직접 만들어 낸 뇌주란 말이오. 귀하는 착각
하지 마시오."
노잔양은 평생을 화기와 함께 살아 온 인물이었다. 어찌 자신이 심혈
을 기울여 만든 뇌화신주를 몰라보겠는가?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금시라도 청의중년인을 향해 덮쳐 들 기세였
다.
"이놈! 감히 노부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네놈이 어찌 노부의
뇌화신주를 뇌주라고 하느냐!"
청의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당신이 들고 있는 뇌화신주가 어째 내 뇌주
와 모양이 똑같은 것 같소. 아, 알겠다!"
청의중년인은 돌연 무릎을 탁 쳤다.
"나는 뇌주를 딱 열세 개만 만들었는데 얼마 전 누군가가 그것 중 하
나를 훔쳐 갔소.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바로 그 범인이구려."
노잔양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청의중년인
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의중년인은 짐짓 혀를 차며 그를 꼬나보았다.
"쯧ㅉ…… 어째 점잖게 생긴 노인이 그런 몹쓸 짓을 했소? 내가 어떻
게 만든 뇌주인데 그걸 홈쳐 가다니…… 그러고도 그걸 자기 것이라
고 우겨대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너무하지 않소?"
노잔양은 너무 화가 나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 너…… 네놈이……"
청의중년인은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뇌주를 한 움큼 꺼내
들었다.
"보시오. 이게 내가 만든 열두 개의 뇌주들이오. 당신이 들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꼭 열세 개가 되지 않소?"
그것을 보자 고복양과 노잔양의 얼굴이 홱 변했다.
고복앙은 무언가를 느긴 듯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놈! 이제 보니 네놈이 절영곡에 숨겨 둔 열두 개의 뇌화신주를 모
두 꺼냈구나!"
청의중년인은 돌연 히죽 웃었다.
"혜혜…… 사실을 말하면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이 근처 길에 떨
어져 있던 걸 주운 거요. 제법 가지고 놀기 좋게 생겼기에 내가 아끼
고 있소이다."
고복양과 노잔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군웅들은 그제서야 청의
중년인이 회서방에서 설치한 뇌화신주를 모두 제거해 버렸음을 알고
안색이 활짝 펴졌다.
반면 고복양과 노잔양 등 회서방의 고수들은 찢어 죽이고 싶도록 청
의중년인이 얄미웠다.
청의중년인은 수중에 들고 있는 열두 개의 뇌주, 아니 뇌화신주를 다
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이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심심하면 하나씩 꺼내 사용할
테니 두 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누군지 몰라도 이 귀중한 걸 길
바닥에 함부로 뿌려 놓다니…… 정신이 나간 사람이군."
노잔양은 그야말로 귀에서 연기가 나을 정도로 노했다.
"어헝!"
그는 더 이상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갈을 터뜨리며 청의중
년인을 향해 덮쳐 들었다.
꽈릉!
그의 독특한 열화장공이 후끈한 열기를 뿜어 내며 청의중
년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 청의중년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슬쩍 몸을 비틀어 아주 가
볍게 장력을 퍼했다.
노잔양은 더욱 노해 청의중년인을 향해 마구 장력을 갈겨댔다.
와르릉! 와아앙!
주위 사방이 온통 노잔양이 뿜어 내는 열화장력에 휘감겨 버렸다. 그
위력이 어찌나 놀라웠던지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미처 그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엄이 뒤로 물러나 버렸다.
하나 청의중년인은 유연한 신법으로 노잔양의 열화장공 사이를 움직
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고복양은 내심 움찔 놀랐다.
'저놈이 누구기에 저토록 무공이 고강하단 말인가? 안 되겠다. 아무
래도 노잔양 혼자로는 역부족인 것 같구나!'
막 수하들에게 협공하라고 지시를 하려던 고복양은 무엇을 보았는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반격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청의
중년인이 느릿느릿 어깨 부근으로 손을 가져 가는 것이다.
청의중년인의 어깨에는 고색 창연한 보도의 손잡이 부분이 삐
쭉 올라와 있었다.
'저, 저것은……?'
그 보도는 고복양에게는 너무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고복양은 그제서야 청의중년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실색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 버린 원한 맺힌 그 칼을……
그 순간 청의중년인은 번개같이 칼을 뽑아 들고 노잔양을 향해 휘둘
렀다.
파앗!
날카로운 도광이 열화장공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크아악!"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노잔양은 허리가 베어진 채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는 것이 아
닌가!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입을 딱 벌린 채 멍하
니 청의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열화진군 노잔양을 단
일 도에 쓰러뜨릴 수 있는 고수가 있을 줄이야……
고복양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너…… 네놈은 무영신룡단혼도구나!"
그 외침에 군웅들이 다시 한 번 경악하는 순간,
"하핫…… 고복양!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너무 둔하구나!"
청의중년인이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고복양을 향해 덮쳐
왔다.
고복양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 채 악을 쓰듯 소리쳤다.
"모두 덤벼랏!"
그의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 명의 회서방 고수들이 벌메와 같이 강
옥봉을 향해 덮쳐 들었다.
강옥봉은 비록 수십 명의 협공 아래 놓여 있었으나 여전히 여유있게
천룡보도를 휘둘러 댔다.
팟! 팟!
천룡보도가 무시무시한 도광을 흩뿌릴 때마다 시뻘건 혈화가
피어올잤다.
"크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눈 깜박할 사이에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고복양은 이 광경을 보자 두렴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자신도 쌍장을 휘두르며 가세했다.
"이놈! 죽어라!"
하나 강옥봉은 이미 강호무림의 최고고수의 대열에 올라
있는 고수 중의 고수인지라 고복양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뎃발치는 듯한 기세로 천룡보도를 휘둘렀다.
파파파파팟!
"크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몇 명이 쓰러졌다.
채 반각도 흐르지 않아 고복양을 제외한 모든 고수들이 쓰러져 버렸
다.
고복양은 경악과 공포가 서린 눈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도법이기에 저렇게 무시무시하냐?'
하나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의 천룡보도가 가공할 기
세로 덮쳐 들었다.
고복양은 안색이 사색이 된 채 사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다.
하나 어느새 그는 가슴 부위가 후끈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두 눈을 부
릅떴다.
"윽!"
그의 가슴은 어느새 쩌억 잘라져 시뻘건 선혈을 뿜어 내고 있었다.
강옥봉은 천룡보도를 거둔 채 냉엄한 눈으로 고복양을 응시하고 있었
다.
고복양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너…… 저, 정말 무섭구나…… 그 전에는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었
는데……"
강옥봉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부총호법은 어디에 있소?"
고복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네, 네놈은 한 발 늦었다. 그분은 이미 유령동부 안으로
들어가신 지 오래다…… 곧…… 유령동부의 물건은 본 방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안광이 급격히 흐려졌다.
동시에,
쿵!
그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실로 일세
의 흉마답지 않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강옥봉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
다.
"당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돌연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군웅들은 경악과 불신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옥봉은 신광이 번짹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세에 압도되어 숨조차
멈춘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강옥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직접 보신 대로 이곳은 이미 용담호혈이 되어
버렸소. 이번에 회서방의 흥계는 본인이 우연히 알게 되어 막을 수
있었지만 일단 동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누구도 살아서 나온다고
장담할 수 없소. 그러니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생각은 포기하고 어서
이대로 돌아가시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아주 멀리에 있는 군웅들까지 똑똑
히 들을 수 있었다.
군웅들 중 대부분은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한 듯 망설이는 표정을 떠올
렸다.
그때 여의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이번 도움에 정말 감사해 마지않는 바이오. 하지만 우리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유령동부의 보물들은 모두 회서방의 수중에 들어
갈 게 아니겠소?"
강옥봉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보물은 원래 하늘로부터 정해진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돌아가는 것
인데 어찌 회서방 같은 흥악한 무리들에게 넘어가겠소? 그러니 여 대
협께서는 아무런 걱정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여의태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번쩍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어떤 안배가 있단 말이오?"
강옥봉은 입가에 기이한 이소를 머긍은 채 엉뚱한 말을 했다.
"유령동부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보가 필요한데 회서방
과 성심장 모두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보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의태는 그의 말에 깊은 뜻이 있음을 직감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
다.
강옥봉은 곽희연과 운봉랑을 돌아보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소저는 군웅들을 이끌고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어쩌면 절영곡
은 오늘로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떠나도록 하십시오."
곽희연은 조금 머뭇거렸다.
"하지만 만일 군웅들 중 일부가 떠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지요?"
강옥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 화를 자초하겠다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소. 두 분 소저는 떠
나겠다는 군웅들만 데리고 가시면 됩니다. 특히 곽 소저께서는 영존
을 잘 설득하십시오."
곽일진, 여의태, 냉모모 등 세 사람은 강옥봉이 한 말에 대해서 서로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일진은 곽희연이 강옥봉과 아주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중년서생이 무영신룡단혼도란 말인가? 한데 연아가 언제부터 저
자를 알고 있었기에 저렇듯 다정하게 대해 주지……?'
이때 마침 곽희연이 그에게 총총히 달려왔다.
"아버님, 이곳에 계시면 더 이상 위험을 면치 못하니 우리 떠나도록
해요."
곽일진도 마침 여의태 등과 그런 결정을 내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다가 의미있는 눈으로 곽희연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한데 연아야, 너는 언제부터 대명이 자자
한 무영신룡단혼도를 알게 되었느냐?"
곽희연은 갑자기 얼굴을 홍당무처럼 빨갛게 붉히면서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곽일진은 딸의 그런 모습에 불안한 눈빛을 띠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 이유는 소중히 키운 딸을 내력조차 자세히 모르는 중년서생에게
주기에는 무척 아까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옥봉은 운봉랑과 곽희연에게 두서너 마디의 말을 더 하고는
급히 몸을 날려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두 소녀는 안타까움과 걱정 어린 눈빛으로 =1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희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공자님!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
강옥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두 분은 어서 떠나시오."
이어 그의 모습은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두 소녀는 아쉬움과 허탈한 마음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연매, 그분 말씀대로 어서 가자."
운봉랑의 말에 곽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 문득 그녀들은 한달기 조옥환이 몇 명의 군웅들과 함께 강옥봉
이 사라진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조 낭자!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조옥환은 막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다 그녀들을 돌아보고 방긋 웃어
보였다.
"소녀는 반드시 유령동부의 보물을 얻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
요. 그러니 두 분 언니는 저를 앙해해 주세요."
그녀의 웃는 모습은 왠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운봉랑과 곽희연이 뭐랄 사이도 없이 조옥환은 급히 몸을 돌려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운봉랑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단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그녀들은 쓸쓸히 몸을 돌리고는 나머지 군웅들과 함께 절영곡을 떠났
다.
백여 명이 넘는 군웅들 중 강옥봉의 말을 거역하고 무덤 속으로 들어
간 인물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오늘 강옥봉이 군웅들에게 보
여준 신위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인상은 뚜렷한 것이었다.
곧 절영곡에는 십여 구의 시신들만 즐비할 뿐, 더 이상 사람들의 모
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유령동부 안.
칠흑 같은 통로 속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백의가 가끔씩 주위의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
이었다.
백의여인은 바로 한달기 조옥환이었다. 조옥환은 강옥봉보다 조금 늦
게 무덤 속으로 들어왔을 뿐인데도 어찌 된 일인지 강옥봉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 내에는 여러 개의 통로가 무질서하게 뚫려 있어 어
느것이 제대로 된 통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무
덤 속으로 들어온 십여 명의 무림인들도 어느새 제각기 뿔뿔이 흩어
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넘긴 듯 백의 자락 여기저
기가 찢겨져 있었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
다.
그때 문득 그녀는 멀지 않은 통로 저편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알고 눈을 반짝이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이 하나의 석실임을 안 그녀는 보검을 뽑아 가슴을 보호한 다음
다짜고짜 들어가 실내를 살펴보았다. 네 군데 벽에 야명주가
박혀 광채를 발산하고 있을 뿐 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한쪽 문을 열고 옆 석실로 들어갔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연거푸 칠팔 칸의 석실을 통과한 그녀는 내심 의아했다.
'이 동부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무림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그때였다.
"흐흐흐……"
뒤에서 돌연 음침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얼음굴 속에서 뻗쳐 나오는 냉풍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조옥환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회의를 입고 눈빛이 홍백으로 번뜩이는 청년이 만면에
기이한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회의청년의 기이한 눈빛을 보자 그녀는 내심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눈빛에서 한 줄기 음탕함을 알아차린 것이다.
회의청년은 그녀의 전신을 쓰윽 훌다가 말했다.
"낭자는 혹시 무림에서 사대미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한달기 조옥환
이 아니오?"
그녀는 회의청년의 안광이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상대가 예사 고수가
아님을 알았으나 태연한 태도로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제가 바로 조옥환이에요. 한데 공자는 누구시죠?"
회의청년은 그녀의 요염한웃음과 꽃 같은 얼굴에 심신이 흔들
리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본인은 음양공자 음적양이라고 하오. 조 낭자는 혹시 본
공자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
조옥환은 상대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사대공자 중의 하나임을 알자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
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 보니 바로 그 유명한 음 공자이셨군요. 듣자 하니 공자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라서 적수가 없다고 하던데, 공자
께서도 유령천자의 무공을 노리고 이곳에 오실 줄은 몰랐군요."
그녀의 말은 비록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 담긴 뜻은 날카로운 것이었
다.
음적양도 그것을 알고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보물은 원래 인연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기에 본
공자도 인연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오. 한데 이곳에서 뜻하지 않
게 조 낭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인연이 아니고 무엇
이겠소?"
조옥환은 상대의 말에 내심 움찔했다.
"공자의 말씀은 무슨 뜻이죠?"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냉랭해졌다.
하나 음적양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이곳은 아주 호젓하고 아무도 없
으니 나는 우리의 인연을 확실히 맺어 볼까 하오."
조옥환은 은근히 살의가 떠올랐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남녀간의 야합을 죽도록 싫어하는 성미예요. 당신이 진
심으로 나를 좋아한다면 당당히 중매쟁이를 놓아 청혼을 하세요."
음적양은 얼굴에 음흥한 웃음을 떠올렸다.
"물론 그럴 것이모. 하나 지금은 일단 낭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소."
이어 오른손을 번개처럼 돌려 움켜잡아 왔다.
조옥환은 낯빛이 달라지며 보검을 휘둘러 그의 가슴팍 부근에 있는
아홉 군데의 주요 혈도를 엄습해 왔다.
쐐애액!
검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매서운 검기가 휘몰아쳤다.
음적양은 그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낭자의 솜씨가 너무 악랄하구려."
입으로는 말을 지껄이면서도 그는 어느새 우장을 가볍게 내밀었다.
우우웅!
나직한 굉음과 함께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음적잉은 그녀를 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가공할 음양
수의 무공은 펼치지 않았다. 하나 그의 간단한 장영 속에는 천변만화
가 내포되어 있어 장강대하와도 같은 기세가 몰려나와 그녀를 연거푸
퇴각시켰다.
조옥환도 사납게 고함을 치면서 검을 휘둘러 맞서 갔다.
파파팍!
그녀의 산화검법은 얼른 보기엔 아무 질서도 없는 듯했으나 실은 독랄
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적양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수세만 취해 그녀의 검세를 착착
막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연거푸 절초를 펼쳤는데도 음적양의 옷깃 하나 건드리
지 못하자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음적양은
번개같이 그녀의 겅세 속으로 뛰어들며 식지를 튕겨 그녀의 좌측 유
방을 찔러 왔다.
팟!
"악!"
조옥환은 유방의 감각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면서 보검을 떨
어뜨리고 쓰러져 버렸다.
음적양은 두 눈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어 서슴없이 그녀의 윗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조옥환은 흔비백산하여 정신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음적놈아! 네놈이 사대공자 중에 하나라고 자처하면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
하지만 음적양은 여전히 야수와 같은 괴소를 입가에 흘렸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낭자의 정조를 무너뜨리기가 좀 안되었지만 낭
자가 한번 나에게 정조를 바친 다음 나와 함께 마음에 맞는 곳에 가
서 영원히 지내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어 빠른 솜씨로 그녀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그러자 백설같이 새하얀 피부와 소담스러우면서도 탐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유방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가히 사대미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황홀한 것이었
다.
음적양은 이것을 보자 더욱 욕정을 걷잡지 못하고 성급하게 치마를
벗겨 냈다.
곧 속옷이 드러나자 그는 그것마저 찢어 버리려고 손을 내뻗었다.
"아아……!"
조옥환은 거의 까무러칠 듯 절규를 터뜨리면서 몸부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샘솟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자결
을 해버리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한데 음적양이 막 그녀의 속옷을 찢으려는 순간,
"도저히 더 이상은 눈뜨고 못 보겠군. 천하의 음적양이 겨우 이런 작
자였을 줄이야……"
갑자기 어디선가 냉랭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음적양은 전신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청의중년인 하나가 석실의 입구에 서서 냉랭한 눈
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록 욕정에 눈이 어두웠다고는 하나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
올때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예사 놈이 아니다!'
음적양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해꾼을 노려
보았다.
한편 조옥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무영신룡단혼
도임을 알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와 미칠 것만 같았다.
음적양은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흐…… 감히 본 공자의 좋은 일을 방해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군 네놈은 누구냐?"
청의중년인, 강옥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너 같은 음적만을 전문적으로 해치우는 단음객이시다."
음적앙은 상대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알고 눈빛이 냉혹해졌다.
"흐흐…… 네놈이 감히 본 공자를 놀려……?"
꽈릉!
강맹한 위력을 띤 장공이 강옥봉의 전신을 짓누를 듯한 기세로 몰아
쳐왔다. 강옥봉은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슬쩍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꽝!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터지면서 음적양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
났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 어린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네놈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음적양의 눈빛이 어느새 흥백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그의 양손은 각기 붉고 하얀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강옥봉은 상대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경각심을 돋우었다.
음적양은 악독한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네놈은 곧 본 공자를 건드린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뼈
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는 번개같이 양손을 휘둘렀다.
와르르룽……
그러자 그의 양손에서 각기 붉고 횐 기류가 물밀듯이 뿜어져 나왔다.
"음양수?"
강옥봉은 깜짝 놀라 다급한 경호상을 터뜨리며 마주 쌍장을 휘둘렀다.
와르릉…… 황!
석실 전체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뒤흔들렸다.
그와 함께 무지막지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질풍 노도처럼 주위를 횝쓸
고 지나갔다.
그 여파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조옥환의 몸도 강
기에 휘말려 벽 쪽으로 날아갔다.
쿵!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자 그녀는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급히 앞을 바라보았다.
강옥봉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있었
다. 하나 음적양 또한 세 걸음이나 격퇴당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음적양은 자신의 음양수로도 상대를 물리칠 수 없자 경악과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강옥봉을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어떻게 내 음양수를 견뎌 내느냐?"
그의 질문은 몹시 어리석게 들렸다.
하나 강옥봉 또한 그 점을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원래 음양수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한 극양공과 극음공이 합쳐진 것으
로서,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라도 음양수에서 발출되는 열기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즉, 상대의 무공이 더 높다 하더라도 음양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
이한 힘을 견뎌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데 강옥봉은 정면으로 음적양의 음양수와 격돌하고도 아무런 부상
도 입지 알고 멀정하지 않은가!
강옥봉도 조금 전에 자신이 약간의 열기와 한기를 느꼈을 뿐 별다른
기이한 점을 느끼지 못하자 의아해졌다
'음양수의 위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그는 내심 어리등절했으나 또한 불 같은 호기가 일어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등뒤의 천룡보도를 뽑아 들었다.
"하하하…… 음양수의 맛은 잘 보았다. 이제 내 칼 맛 좀 보아라!"
이어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음적양에게로 달려들며 천룽보도를 기이하
게 그어댔다.
파팟!
섬뜩한 도광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음적양은 천하무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자신의 음양수가
상대에게만은 별다른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자 짙은 의혹과 함께 기가
꺾여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의 도법이 자신으로서는 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급히 일장을 날려 상대의 공격을 저지시킨 후 급히 석실
밖으로 달아났다.
"어딜 도망가느냐?"
강옥봉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음적양의 경
공은 확실히 뛰어나 금세 석실의 한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뒤쫓던 강옥봉은 멈칫 몸을 세우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땅을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중얼거
리더니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석실로 돌아오자 상체를 송두리째 드러낸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
옥환의 고혹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옥환은 강옥봉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흥시처럼 새빨개졌다.
다 큰 처녀가 외간남자에게 가슴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누워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쏜가?
강옥봉은 급히 몸을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낭자는 어서 옷을 입으시오."
조옥환은 얼굴이 더욱 달아올라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저…… 저는 혈도를 찔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강옥봉은 그녀의 말을 듣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물었다.
"어느 부분의 혈도를 찔렸소?"
조옥환은 그야말로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강옥봉은 더욱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어디란 말이오?"
조옥환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좌측 유, 유방……"
끝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강옥봉은 일시지간 난감해졌다.
또한 조옥환의 딱한 처지에 내심 동정심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의 젖가슴을 만질 수 있
겠는가?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조옥환은 개미 소리만한 음성으로 물었
다.
"절 구해 줄 생각이 없나요?"
강옥봉은 할 수 없다는 듯 나직이 탄식을 토해 냈다.
"오늘의 사건은 낭자의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낭자는 누구에
게도 이 사실을 얘기하지 마시오. 괜히 나까지 남에게 애매한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오."
조옥환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대협이 저의 명예를 위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제가 어찌 외인에게 이
런 말을 하겠어요?"
강옥봉은 그제야 획 돌아서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탐스러운 젖가슴을 송두리째 드러낸 채 그가 하는 대로 맡기
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이 화끈 달아올라 바르
르 떨고 있었다.
강옥봉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으나 막상 그녀의 우윷빛 살결과 젖
가슴을 보자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유방과 탄력있는 피부는 사나이의 욕정을 불러일으켜 당장 열기
의 도가니 속으로 끌려들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공인된 네 명의 미녀 중 하
나가 아닌가!
강옥봉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뛰는 가슴을 억제해야 했고, 터질
것 같은 혈맥으로 인해 하체가 확확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녀의 젖가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그녀의 풍만한 계곡 사이에 엷은 흥색을 띤 지흔이 찍혀
있었다.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악독한 놈이로군. 여인에게 이런 독수를 쓰다니……"
강옥봉는 단번에 그 지흔이 음적양의 삼양신지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전의 야릇했던 감정
과 욕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강옥봉은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손에 태극혼원신공의 진기를 모아
조옥환의 젖가슴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잡념을 억제했으나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에 짜릿한 맛이 전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누르고 있었다.
조옥환은 처음에는 미치도록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사지가
나른하게 풀려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촛불 하나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떼었다. 다시 그녀의 살결에 눈이 돌려지자 당장 점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으나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
"낭자, 이제 낭자의 혈도는 풀렸으니 아무 이상이 없을 거요."
진기가 유통되고 행동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몹시 부끄러운 마음으로
급히 옷을 주워 입고 강옥봉 앞으로 돌아가서 넙죽 절을 했다.
"소녀는 대협의 은덕에 죽는 날까지 보답하겠어요."
강옥봉은 바삐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남의 위급을 구해 주는 것은 우리 무립인의 의무인데 그게 무슨 말
씀이오? 한데 낭자께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그녀는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무덤 앞에서 대협을 뵈었어요. 대협께선 바로 요즘 대명을
떨치시는 무영신룡단혼도가 아닌가요?"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도 무덤 앞에 계셨다니 그때 내가 한 말도 들었겠구려. 그
런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들어오셨소?"
그의 준엄한 추궁에 조옥환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는 금시라도 눈물 방울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
다.
그러다가 그녀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협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소녀는 피맺힌 원한에 몸부림치고
있어요. 그래서 유령동부에 숨겨져 있는 무공비급을 기필코 수중에
넣어 원수를 갚아야 해요."
"낭자의 원수는 누구요?"
조옥환의 눈에서 원한으로 가득 찬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화도인이에요."
강옥봉은 흠칫 놀랐다.
"마화도인이라면 칠대흉인 중에서도 서열이 셋째에 속하는 인물이 아
니오?"
"그래요. 그자는 바로 소녀의 선부를 살해한 철천지원수예요."
그녀의 아름다운 볼에서는 어느새 가느다란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내심 그녀의 처지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 하나 마화도인
은 강호무림에서 누구나가 두려워해 마지않는 일세의 거마로서
지금의 그녀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
다.
강옥봉은 잠시 멈칫하다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선부의 원수를 갚겠다는 낭자의 효성은 참으로 가상하오. 그러나 너
무 조급히 서둘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서는 안 되오. 더
구나 이미 회서방과 성심장의 고수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으니 유령동
부의 비급을 얻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요."
강옥봉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설사 낭자께서 유령동부의 비급을 얻
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마화도인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요."
그는 조옥환이 실망에 젖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자 다시 입을 떼었
다.
"낭자는 너무 낙담하지 마시오. 유령천자의 무공비급이 비록 현오
하다 해도 무림에는 그보다 뛰어난 절학이 얼마든지 있으니 낭자
가 인연이 닿는다면 복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요."
조옥환은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처연히 웃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각오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반
드시 성공할 거예요."
"하늘의 가호가 낭자에게 내려지길 빌겠소."
조옥환은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어 강옥봉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강호에 알려진 바로는 무영신룡단혼도는 아직 나이가 많
지 않은 소년영웅이라고 하던데, 대협께서는 혹시……?"
강옥봉은 그녀가 묻는 뜻을 알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하…… 본인은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역용을 했소이다."
"아! 그랬군요."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협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강옥봉은 일시지간 난처해 하며 머뭇거렸다.
"그건……"
조옥환은 원망스런 눈초리로 강옥봉을 주시했다.
"대협께서는 이미 소녀의 몸까지 보시고도 저를 외인 대하듯
하십니까?"
강옥봉은 어리등절해 있다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낭자? 나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조옥환이 돌연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흐느꼈다. 그 울음 소리는 마
치 여우나 원숭이가 적막한 산중에서 우는 것같이 매우 처량하게 들
렸다.
강옥봉은 총명 절세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당황해
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낭자……"
조옥환은 흐느끼면서 원망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강호의 여인은 여인이 아닌 줄 아십니까? 제게도 지켜야 할 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협께서 이미 제 몸을 보셨으니 저를 소유하신 것
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얼굴조차 보여 주려 하시지 않으
니 이건 저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강옥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어찌 낭자를 무시하겠소? 하지만 낭자도 알다시피 조금 전의
상황은 부득이한 일이지 않았소? 그러니 낭자께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옥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정 그렇다면 소녀는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겠어요!"
그녀는 돌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검을 집어 들고 스스로 가슴을 찌
르려 했다.
"엇?"
강옥봉이 즉시 그녀의 손을 뿌리치자 단검이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강옥봉은 나직하게 탄식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어 그는 얼굴을 손으로 슬쩍 문질러 본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아……"
눈물로 얼룩졌던 조옥환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실로 절세적이라 할 수 있는 강옥봉의 용모가 아닌가!
쭉 뻗어 올라간 짙은 검미와 별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이지적인
눈동자…… 태산준령 같은 장쾌한 콧날과 사나이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듯 두툼한 입술……
그야말로 여인의 방심을 뒤흔들기에 족한, 영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조옥환은 한동안 정신없이 강옥봉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강옥봉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불쑥 물었다.
"이제 만족하시겠소?"
조옥환은 돌연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생각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
다.
"아이…… 모, 몰라요!"
그녀는 교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하……!"
강옥봉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그녀의 마음에는 어느새 달콤한 감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그
들이 있는 석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 온 것이었다.
잠시 기이한 감정에 빠져 있던 두 남녀는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
주보았다.
강옥봉은 잽싸게 다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가봅시다."
이어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조옥환은 아쉬운 눈초리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몸을
날려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강옥봉은 한곳에 우뚝 서서 무거운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정신없이 그의 뒤를 따라왔던 조옥환은 급히 시선을 내려 장내를 바
라보고는 짤막한 비명을 토해 냈다.
"앗?"
바닥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죽은 모습이 하나같
이 참혹하여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윽환은 그들을 살펴보더니 더욱 놀랐다.
"이자들은 저와 함께 동부에 들어왔던 고수들인데……"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아악!"
또다시 구슬픈 비명 소리가 동굴을 뒤흔들었다.
"저쪽이군!"
강옥봉은 나직이 외치며 몸을 날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쏘아 갔다.
그의 신법은 전광석화와도 같아 비명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들린 곳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방금 죽은
듯한 노인 두 명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들은 상산쌍로예요."
조옥환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들도 낭자와 함께 들어온 인물이오?"
강옥봉의 물음에 조옥환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옥봉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였다
"필시 회서방이나 성심장의 고수들이 무덤 안에 들어온 군응들을 주
살하고 있는 것이오. 이럴 것을 염려해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
라고 했거늘……"
그 말이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것 같아 조옥환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강옥봉은 그녀의 내심을 알아차리교 씁쓸하게 웃었다.
"낭자보고 한 소리는 아니오. 하지만 일이 다급하게 됐으니 낭자는
내 뒤에서 두 걸을 이상 떨어지지 마시오."
조옥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들이 어두운 통로 속을 반 마장 가량 전진했을 때였다.
강옥봉은 앞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차가운 검빛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웬 놈이냐?"
강옥봉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번개괌이 쌍장을 앞으로 내뻗었다.
꽈르릉!
장력과 검광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꽝!
"크으윽!"
암습했던 인물은 자신의 검광이 눈 녹듯 사라지며 동시에 가슴팍이
뻐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강옥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성처럼 그자에게 달려들어 맥문
을 움켜잡았다. 그자는 설마 강옥봉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리
라고는 미처 상상치도 못했던 듯 꼼짝못하고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는 전신에 흑의를 걸치고 눈이 쭉 찢어진 삼십대의 중년인이었다.
강옥봉은 한눈에 그자의 복장이 회서방의 독특한 복장임을 알아보았
다.
"회서방의 인물이냐?"
흑의중년인은 움찔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강옥봉은 냉랭하게 웃었다.
"흥! 내가 물어 볼 걸 먼저 묻는군. 너는 회서방에서의 지위가 무엇
이냐?"
흑의중년인은 움찔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중년인은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였다.
"내게서 무엇을 알아 낼 생각은 하지 마라. 사실 나는 본 방에서 그
리 변변치 않은 인물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옥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즉시 그
의 몇 군데 혈도를 찔렀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다."
이때, 흑의중년인은 갑자기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옥봉은 잠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
다.
"이제 슬슬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흑의중년인은 조금 전에 혈도를 짹힌 순간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느
꼈다.
그는 고통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이마에서는 녹두알만
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말…… 말하겠다. 그러니 내 혈도를 좀……"
강옥봉은 여유있는 미소를 흠뻑 머금었다.
"때가 되면 풀어 줄 테니 우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 나는 팔십사호 전서인 독룡검 위천량이다."
"흠……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무덤 안에 들어온 군웅들을 살해한
것은 모두 너희들 짓이냐?"
위천량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본 방의 전서급 인물 열두 명이 암도 속에 숨어 있다가……
군웅들을 보는 즉시 살해하기로 되어 있다."
"그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이냐?"
"부, 부총호법께서……"
"부총호법이라면 음양공자 음적양 말이지?"
"그, 그렇다…… 제발 이 혈도를 좀……"
위천량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강옥봉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기에도 끔찍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손과 발을 벌벌 떨면서 어
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흡사했
다.
강옥봉은 그의 혈도를 두 군데 더 찍으며 호통을 치듯 무게있게 압력
을 가했다.
"오늘 이 무덤에 들어온 회서방의 고수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7"
위천량은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심을 느꼈으나 아직도 몸이 근질근질해
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는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부총호법님과 세 분의 온서, 그리고 스물두 명의 전서급 인물들이
오."
강옥봉은 회서방의 고수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내심 흠
칫 놀랐다.
"세 명의 온서란 누구누구를 말하느냐?"
"온이호님과 온구호님, 그리고 온십일호님이오."
강옥봉은 깜짝 놀랐다.
"이호 온서도 왔다고?"
"그렇소. 그분이 오늘 일의 책임자이시오."
회서방의 일호부터 삼호까지의 온서는 모두 특이한 직분의 인물들이
었다.
그들은 비단 같은 온서급 인물들보다 권한이 막강할 뿐 아리라 그들
을 호령할 수도 있었다.
"이호 온서는 누구냐?"
위천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강옥봉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황
급히 입을 열었다.
"혈영추혼 양만균이오."
강옥봉과 조옥환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영추혼 양만균은 칠대흥인 중의 하나로, 장력과 경공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서운 고수였던 것이다.
강옥봉은 몇 가지를 더 물은 후 더 이상 위천량에게서 알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되자 그의 흔혈을 짚어 잠을 재운 후 조옥환과 함
께 앞으로 달려나갔다.
얼마쯤 가자 통로가 막히며 그들의 앞에 석벽 하나가 나타났다.
강옥봉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석벽을 더듬더니 조옥환을 돌아보며 말
했다.
"조 낭자, 석벽을 열 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조심하시오."
조옥환은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강옥봉은 벽을 조심스래 살피다가 어느 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끼! 끼-- 이익!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며 돌연 동굴 벽이 옆으로 물러났다.
순간,
콰콰콰콰콰……
갑자기 열려진 동굴 벽에서 엄청난 한기를 동반한 강풍이 물아 닥치
는 것이 아닌가?
"악!"
조옥환은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강풍의 위력이 너무도 막강하
여 뒤로 주르르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강풍 속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독한 한기가 담겨 있어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
그녀는 순식간에 몸이 얼어불어 이를 닥닥마주치며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바로 그때 강옥봉이 그녀의 옆으로 날아오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풍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 안기자 그토록 매서웠던 한기가 껏은듯이 사라지
는 것을 느끼고 부끄러움 이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이분은 어째서 이 지독한 바람 속에서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그때 그녀의 귓전으로 강옥봉의 믿음직스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 이것은 지하의 깊은 곳에서 뿜어 나오는 광한쇄골풍이라는 것
이오.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으니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내 품
에 안겨 계시오."
조옥환은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하나 동시에 흐뭇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품에 바싹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강옥봉의 오른쪽 손목에 하나의 기이한 모양의 금팔찌
가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굵기가 어른의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만했는데 전신에는 여
러가지 동물 모양의 조각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데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한기가 거세질수록 그 금환에서 기이한 열
기가 뿜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기라도 하듯 때맞춰 강옥봉의 음성이 들
려왔다.
"니는 광한쇄골풍을 막아 주는 천양금환이란 기보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광한쇄골풍의 영향을 받지 않소. 이제 동부 속으로들어갈 테니
낭자는 내게서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으시오."
조옥환은 그 음성을 듣자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의 굵은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짙은 남성의 체취가 물씬 풍겨 왔다. 하나 그녀는 마치 어미새의 품
속을 파고드는 어린 새처럼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숙이 안겨
있었다.
광한쇄골풍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했다.
강옥봉은 자신의 가슴팍에 그녀가 내뿜는 숨결이 닿자 간지러움을 느
꼈고, 게다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생생하게
피부에 전달되어 내심 기이한 감정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더구나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의 가슴을 바짝 압박하고 있지 않
은가?
하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굳게 먹고는 열려진 석벽 속을 향
해 몸을 움직였다.
콰콰콰콰……
미친 듯이 불어 닥치는 광한쇄골풍도 천양금환에 의해 보호되는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해가 될 수 없었다.
과연 석벽 속에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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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ㄷㄱ~~~`````````````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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