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 플러스 회원국이 지난 2일 하루 116만 배럴의 원유를 추가로 감산하기로 했죠. 회원국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사우디는 하루 50만 배럴 감산 의사를 밝혔습니다. 지난 2월엔 하루 200만 배럴 감산 방침을 유지하라고 했는데, 또 감산하는 겁니다. 유가 80달러 선을 지키려는 조치입니다. 이익이 줄어드는 걸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 OPEC+ 감산에 미국은 속앓이만...
미국은 당혹스럽습니다. 기록적인 기준금리 인상 이유가 바로 유가 상승 같은 물가 때문인데 산유국이 감산하면 기름값이 오르게 되죠. 발표 이후 WTI(서부텍사스산 원유) 선물 가격은 바로 배럴당 80달러를 돌파했고, 6일 종가 기준 0.11% 오른 80.70달러에 거래됐습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면 3월 한때 70달러 밑으로 곤두박질했다가 4월 2일 감산 발표 이후 반짝 급등한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미국에선 물가 상승 이슈는 지나갔고 일부 은행의 유동성 위기가 확산할 것인지, 경기침체를 어떻게 비켜 갈 지가 온통 관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미 정부는 이번 OPEC+의 감산 결정으로 물가 문제를 완전히 책장 안에 넣어둘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감산 결정으로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하는 상황은 쉽게 오지 않겠지만, 사우디를 비롯한 산유국들이 유가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7월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사이만 더 멀어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세계 1위 국가 수장답지 않게 이번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습니다. 발표 다음 날 바이든 미 대통령은 "석유수출국기구의 감산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미국 존 커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80년간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라며 감산 발표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CNN방송은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를 규제하겠다던 약속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왜 이런 반응을 내놓을까요? 지난해와 사뭇 달라진 태도입니다. 당장 유가 상승이 전 세계 물가를 건드리고 자국의 물가에도 악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는데 말이죠. 사우디를 통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Bye-bye 미국·사우디 '밀월'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거래를 100% 달러로만 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고, 미국은 이른바 '페트로 달러'로 인해 기축통화 지위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호적인 두 나라 관계는 9.11테러 이후 미국과 사우디와의 갈등, 미국의 셰일가스 공급을 통한 원유가격 급락, 그리고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가 빈 살만 왕세자를 배후로 지목한 것 등을 통해 계속 악화돼 왔습니다.
이번 사우디 주도의 산유국 원유 감산 외에도 사우디는 중국과 손을 잡으며 미국과의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사우디 수도에서 열린 중국·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의에서 "원유와 천연가스의 위안화 결제를 추진해야 한다"며 미국 달러에 도전한 바 있는데요.
이 기세로 상하이 석유천연가스거래소는 처음으로 중동산 액화천연가스를 위안화로 거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달 사우디 국영 석유 기업 아람코는 중국 정유회사 룽성석유화학의 지분 10%를 위안화로 매수하기로 했습니다.
사우디의 이 같은 움직임은 중국이 이미 원유수출의 최대 국가가 됐기 때문입니다. 중국 경제가 2006년부터 2022년까지 550% 이상 성장하는 사이 중국의 급속한 원유수입량 증가의 절대적 부분을 걸프협력회의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22년에 거의 8,800만 톤을 중국에 선적한 이 지역 최대의 중국 원유 수출국입니다.
사우디 전체 원유의 27%, 화학 제품의 25%를 중국이 사가다 보니, 경제 분야만 보면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바이든 미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를 불편하게 했는데 말이죠.
■ 원유 달러 결제까지 위협받나?
관심은 "달러 결제에 변화가 오냐"입니다. 일단 미국 달러화에 대한 도전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4일 말레이시아 총리는 "중국이 미국 달러화와 국제통화기금 IMF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아시아통화기금 설립에 관심을 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말레이시아가 계속 달러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통신은 전했습니다.
지난달 29일 브라질도 달러화를 배제하기 위해 최대 무역국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국 위안화와 브라질 헤알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은 위안화로 표시된 무역 결제와 투자가 두 자릿수 성장을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제재를 받으면서 러시아가 수출 대금의 위안화 결제 비중을 16%로 늘린 것도 영향을 줬습니다.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중국 위안화의 국경 간 국제 결제금액은 지난해 42.1조 위안(8,060조 4천억 원)까지 올랐습니다. 2017년 대비 4.6배 증가한 규모입니다.
다만 아직 국제 결제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19%에 불과합니다. 금융통신망 스위프트 집계 결과 달러의 41% 비중에 크게 못 미칩니다. 세계 국가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60.8%에서 2022년 58.4%로 소폭 감소한 반면, 위안화 비중은 같은 기간 1.9%에서 2.7%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원유 결제가 달러화가 아닌 위안화로 다변화된다면 그건 일대 큰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될까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제각각이지만 이른 시간 안에 거기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서방에 있는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런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지 않는다"면서 미국 달러의 지배력이 중국 위안화 때문에 끝날 것이라는 우려를 일축했습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보고서도 "위안화의 국제화를 위해 달러화 보유고가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하는 만큼 위안화가 달러화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중국 내 전문가들은 위안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한 과학기술대 재무증권연구소 동덩신 소장은 글로벌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탈달러화 움직임이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년 동안 달러를 국제 기축통화로 남용해 다른 통화와 경제에 피해를 줬다"며 "미국이 더는 세계 최대 무역 경제국이 아니기 때문에 달러 헤게모니는 점차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29일 사우디 국영 SPA 통신에 따르면 사우디는 중국이 주도하는 정치·경제·
안보 동맹인 상하이협력기구에 공식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다수 회원국이 반미 연대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우호국입니다. 여기에 더해 지난 6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우디와 이란의 외무장관, 그리고 중국 외교부장이 서로 손을 맞잡은 장면은 중동에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앙숙이었던 사우디와 이란이 관계 정상화 합의 후 이행 조치를 논의했는데, 두 나라 외교 장관의 가운데에 미국이 아닌 중국 외교부장이 서 있었다는 점이 크게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 변화를 미국이 아닌 중국이 이끌었다는 점, 사우디가 미·중 패권 경쟁 속에 중국과도 손을 잡고 있다는 점은 미국이 더는 '왕년의 미국'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켜줬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재정적·군사적 수단을 통해 달러 패권을 놓지 않으려 시도하겠지만, 중동 외교가 자꾸 흔들리고 페트로 달러가 위협받으면 받을수록 달러 패권은 흔들리고 과거 달러의 위상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박찬형 (parkch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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