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3년 9월 13일(토) - 21일(일) | 9일간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문의 : Tel) 02-720-9782, 02-745-3316
브레송 이전까지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먹는 기생적인 예술이었다면,
브레송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영화’가 나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없었다면
신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이후에도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9월 13일(토)부터 21일(일)까지 현대영화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을 엽니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나단 로젠봄이 ‘마지막 영화작가’라고 칭했던 로베르 브레송(1901-1999)은 누벨바그를 비롯한 현대영화의 어떤 조류에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뤼포, 리베트, 안토니오니, 파스빈더, 벤더스, 스콜세즈 등 동시대와 후대의 영화감독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감독입니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장 뤽 고다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소설이고 모차르트가 독일 음악이라면 로베르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이다”라는 말로 브레송의 위대성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브레송은 화가로 활동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며, 이후 40년 동안 13편의 영화에서 특유의 금욕적인 스타일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뤄왔습니다. 브레송은 세계의 본질을 일체의 허위나 가식이 없이 투명하게 드러내기를 원했고, 영화 자체와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것들은 모두 배제하는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영화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과장된 연기나 꽉 짜여진 이야기를 거부하고 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들을 통해 내면의 운동을 보여주려 했으며, 또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진정한 영화를 발견해낸 영화의 구도자입니다.
브레송의 첫 장편 <죄지은 천사들>(1943)부터 유작인 <돈>(1983)까지 10편의 대표작이 상영되는 이번 특별전은 영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브레송의 각별한 영화세계와 만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 행사 개요
행사명 :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
일시 : 2003년 9월 13일(토) - 21일(일) | 9일간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주최 :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시네마테크 부산
후원 : 주한프랑스대사관, 서울시네마테크,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문의 : Tel) 02-720-9782, 02-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한글도메인 서울아트시네마)
▣ 상영작 목록
죄지은 천사들 Les Anges du péché 1943년 96분 흑백
불로뉴 숲의 여인들 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1945년 90분 흑백
사형수 탈주하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ou Le vent souffle où il veut
1956년 99분 흑백
소매치기 Pickpocket 1959년 75분 흑백
잔다르크의 재판 Procès de Jeanne d'Arc 1962년 65분 흑백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년 95분 흑백
무셰트 Mouchette 1967년 78분 흑백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 1974년 85분 칼라
아마도 악마... Le Diable probablement 1977년 95분 칼라
돈 L'Argent 1983년 85분 칼라
※ 1회 관람료 | 6,000원
인터넷 예매는 행사 1주일 전부터 맥스무비(www.maxmovie.com)에서 가능합니다.
현장 예매는 행사 시작일인 9월 13일 오후 2시부터 전 기간 가능합니다.
죄지은 천사들 Les Anges du péché
1943 | 96min | b&w | 출연 르네 포레, 자니 올트, 실비, 밀라 파렐리
도미니크 수녀회의 수녀 안느 마리는 수녀원에 들어온 여인 테레즈가 연인을 살해한 죄를 지었음을 알고 그녀의 속죄를 위해 애쓴다. 그러나 테레즈는 자신의 죄를 완강히 부인하고, 결국 추운 겨울날 안느 마리는 수녀원 정원에서 숨을 거둔다. 안느 마리의 죽음과 희생에 감화된 테레즈는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청하게 된다.
브레송의 첫 번째 장편영화. 장 지로두의 양식화된 대사와 필립 아고스티니의 명암 대비가 뚜렷한 촬영은 50년대 이후 브레송 영화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고백과 용서, 감금과 죽음, 육체와 영혼에 관한 브레송 특유의 테마들이 이미 완성된 형태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표면적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뤘기 때문에 비시 정권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프랑스 영화대상을 수상하는 등 브레송의 영화로는 유일하게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불로뉴 숲의 여인들 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1945 | 90min | b&w | 출연 마리아 카사레스, 엘리나 라부르데트, 폴 베르나르
자존심 강한 여인 엘렌느는 연인인 장이 자신을 멀리하자 복수를 위해, 카바레에서 춤을 추며 매춘을 하던 젊고 아름다운 아녜스를 소개해준다. 사랑에 빠진 장과 아녜스가 달콤한 행복에 젖어있을 때 엘렌느는 장을 찾아가 아녜스의 과거를 폭로한다. 충격을 받은 아녜스는 병석에 눕게 된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장은 그녀의 곁을 지킨다.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를 느슨하게 각색한 작품으로 장 콕토가 대사를 썼다. 콕토의 우아한 대사와 아름답고 화려한 세트, 마리아 카사레스의 정교한 연기는 이후 브레송이 만들게 될 영화들의 금욕적인 스타일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죄의식과 도덕적 딜레마라는 브레송의 비전이 중심에 놓인 매혹적인 멜로드라마이다. 개봉 당시 혹평을 받았지만, 이후 트뤼포와 고다르, 루이 말, 안토니오니 등 후배 감독들의 찬사 속에서 재평가되었다.
사형수 탈주하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ou Le vent souffle où il veut
1956 | 99min | b&w | 출연 프랑수아 르테리에, 샤를르 르 클랭쉬, 모리스 베르블록
독일군에게 체포된 레지스탕스 대원 퐁텐느는 수용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다. 그러나 수용소에 갇힌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고 세심하게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퐁텐느의 감방에 젊은 죄수 조스트가 들어오고, 조스트가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하던 퐁텐느는 결국 그를 믿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서로 도와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독일군 수용소에서 처형 직전 탈출한 레지스탕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10개월 동안 갇혀있었던 브레송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 위에 사운드를 반복시키면서 탈출을 시도하는 죄수의 행동을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기록하고 있으며,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우연과 예정조화의 은총을 긍정하고 있는 작품이다.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저항>이었다.)
소매치기 Pickpocket
1959 | 75min | b&w | 출연 마르탱 라살, 피에르 레이마리, 장 펠레그리, 마리카 그린
소매치기인 미셸은 타락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범죄 역시 정당화된다고 믿으며 도둑질을 계속한다. 옆집에 사는 젊은 여인 잔느는 미셸의 병든 어머니를 돌봐주면서 그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끼지만 미셸은 그녀의 애정을 거부한다. 그러던 중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미셸에게 잔느가 찾아오고, 감옥의 창살 속에서 미셸은 비로소 잔느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으로, 세계의 악에 범죄로 대항하려 했던 한 청년의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소매치기하는 손들만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는 지극히 단순한 화면을 통해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 한편 다이내믹한 리듬감의 내적 스펙터클을 드러내고 있다. 들뢰즈가 말한 ‘촉각적 이미지’의 직접적인 예증이자, 손에 관한 가장 에로틱한 영화이기도 하다.
잔다르크의 재판 Procès de Jeanne d'Arc
1962 | 65min | b&w | 출연 플로랑스 카레, 장 클로드 푸르노, 마르크 자키에, 로제 오노라
프랑스와 영국 간의 100년 전쟁 당시.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시골 소녀 잔다르크는 마녀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잔은 은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연일 이어지는 심판관들과의 재판 과정은 그녀의 정신과 몸을 갉아들어간다. 최종적으로 화형판결이 내려지고, 잔이 화형대 위에서 숨을 거둘 때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목격하게 된다.
역사적 사료로 남아있는 잔다르크의 재판기록 원본을 그대로 각색하여 ‘재판’ 자체에 집중한 작품이다. 잔다르크와 심판관들의 미디엄쇼트를 번갈아 보여주는 제한된 카메라 움직임, 감옥과 재판정만으로 한정된 공간 등 지극히 미니멀한 형식 속에서 갇힌 영혼의 해방과 구원을 드러내보인다.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 로셀리니의 <화형대 위의 잔다르크>과 더불어 가장 숭고한 잔다르크 영화 중 한 편.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 | 95min | b&w | 출연 안느 비아젬스키, 발터 그린, 프랑수아 라파르주, 필립 아슬랭
어린 소녀 마리의 집에 새끼 당나귀 발타자르가 온다. 세월이 흘러 마리의 아버지가 빚을 지게 되자 발타자르는 빵집에 팔려간다. 마리 역시 첫사랑인 자크와 만날 수 없게 된 후 동네 건달인 제라르의 유혹에 빠진다. 발타자르는 서커스단을 거쳐 밀수꾼들에게 팔려가고, 사랑과 삶에 절망한 마리는 창녀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던진다.
새끼 당나귀와 소녀의 가혹한 삶을 통해 구원에 대한 희망과 은총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 브레송의 7번째 영화이자 그의 영화세계에서 일종의 결절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 이후 브레송은 은총에 대한 긍정보다는 죽음의 문제에 좀더 천착하게 된다. 브레송 스스로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한 영화라고 고백했던 작품이며, 고다르의 동반자였던 안느 비아젬스키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무셰트 Mouchette
1967 | 78min | b&w | 출연 나딘느 노르티에, 마리 카르디날, 폴 에베르, 장 클로드 길베르
14살 소녀 무셰트는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오빠를 돌봐야 하는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소외당한 무셰트는 숲속을 배회하다 갑작스런 비를 만나고, 비를 피하던 중 밀렵꾼 아르센에게 겁탈당한다. 무셰트는 아르센을 사랑한다고 믿지만, 사람들의 눈길은 차갑기만 하다. 게다가 무셰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소녀의 수난과 죽음을 소름끼칠 정도로 가슴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고다르와 트뤼포 등 누벨바그 감독들의 지원에 힘입어 전작인 <당나귀 발타자르> 이후 곧바로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으며, 이 두 편의 영화는 은총과 굴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매편과도 같다. 빔 벤더스가 “70년쯤 전 영화 카메라를 만든 사람이라면 <무셰트>를 보고 이토록 믿을 수 없이 아름답게 사용된 것을 자신이 발명했다는 사실에 환희에 찼을 것이다”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
1974 | 85min | color | 출연 뤽 시몽, 로라 뒤크 콘도미나스, 윙베르 발상, 블라디미르 앙톨렉
성배를 찾으러 떠났던 모험에서 상처입은 랑슬로는 숲속에 사는 노파의 도움으로 아서왕의 성으로 돌아간다. 랑슬로는 왕에 대한 신의와 왕비 기네비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신에게 자신의 소명을 질문하지만 답이 없다. 왕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왕의 곁을 떠난 랑슬로에게 모드레드의 반역 소식이 들려오고, 랑슬로는 다시 한번 전투에 참여한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기사들의 낭만적인 모험담과는 거리가 먼 가장 예외적인 성배 이야기. <시골사제의 일기>를 만든 후 영화화를 계획했지만 재정상의 이유로 20년 이상 지연되었다가 가까스로 완성된 작품이다. 조각난 신체와 파편화된 내러티브 등 브레송의 스타일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절망과 회의주의로 가득한 세계에서 오히려 고통스럽도록 집요하게 구원을 탐색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악마... Le Diable probablement
1977 | 95min | color | 출연 앙투안 모니에, 티나 이리사리, 앙리 드 모블랑, 래티시아 카르카노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어하는 젊은 청년 샤를르는 정치집회와 종교모임 등에 참석해보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다. 정신분석가의 상담 역시 판에 박힌 대답뿐이다. 사랑조차도 삶을 지탱하는 이유가 되지 못하자, 샤를르는 마침내 죽음을 결심한다. 자살을 망설이던 그는 마약중독자인 친구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살해를 의뢰한다.
신문에 난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가장 절망적인 브레송의 영화. 브레송은 이 작품에서 예외적으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면서,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엇이 우연을 예정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마도 악마가’라고 답한다. 영화의 절망적인 비전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자살을 유도하는 위험한 영화라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으며 평론가들에게도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이었던 파스빈더는 이 영화가 ‘최고의 문제작이자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하며,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려 했던 브레송의 의지에 지지를 표명했다.
돈 L'Argent
1983 | 85min | color | 출연 크리스티앙 파테, 카롤린 랑, 실비 반 덴 엘센, 미셸 브리게
용돈이 모자란 고교생 노베르는 사진가게에서 친구와 함께 위조지폐를 사용한다. 나중에야 그것이 위조지폐임을 깨달은 주인은 석유를 배달하는 이본에게 이 지폐를 지불한다. 위조지폐범으로 몰린 이본은 재판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지만 사진가게 종업원 루시앙의 위증으로 패소한다. 일자리를 잃은 이본은 은행을 털다 감옥에 가고 결국 딸과 아내마저 잃는다.
톨스토이의 단편 <위조지폐>의 모티브를 각색한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한 장의 위조지폐를 통해 세계의 악을 지배하는 돈의 이미지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돈이 신의 자리를 대신해버린 현대사회에서 은총이나 계시는 존재하지 않으며 구원 역시 불가능하다. 이 참혹한 결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브레송은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