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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
5 |
순천 |
11 |
목포 |
10 |
보성 |
5 |
담양 |
6 |
여수 |
9 |
영암 |
3 |
곡성 |
3 |
화순 |
7 |
광양 |
2 |
완도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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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
5 |
고흥 |
2 |
진도 |
2 |
구례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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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
4 |
강진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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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나주 |
1+5 |
장흥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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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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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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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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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각 권역별 답사 조장
1. 장성 담양 화순 영광 권 : 노기욱
2. 순천 여수 광양 고흥 : 박상용
3. 목포 영암 완도 진도 해남 무안 : 허상무
4. 보성 곡성 구례 강진 : 신 향
1.지역 답사안(화순)
1. 답사주제 : 수업 중에 접하지 안했던 우리지역 유적을 통해 문화유산 해설 심화 교육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교육내용은 불교유적(진여), 유교유적(서원과 향교), 사림문화(정자), 남도예술과 미술관(양팽손, 송태회, 오지호), 근대유적(쌍산의소, 양한묵) 등을 답사하겠습니다.
2. 답사 일 : 5월 21일 (월)
3. 답사 인원: 장성 담양 화순 영광 권 23명
4. 일 정
-09:00 광천동 터미널 앞 출발
-09:00~9:30 화순도착
-09:30~10:30화순답사(진각국사유적,양한묵유적,벽나리미륵불,최경회장군생가)
-10:30~11:30 능주 이양답사 (주자묘, 영벽정, 해망서원, 능주향교, 학포당, 쌍산의소)
-11:30~12:00 남면 사평 답사 (임대정원림)
-12:00~13:00 점심 식사(사평 한우 불고기 식사)
-13:00~14:00 사평 유마사(진여,열반,법성,실상,무위),사평미술관(송태회, 송운회)
-14:00~14:30 동복도착(사평 한우 불고기 식사)
-14:30~15:30 동복답사 (도원서원, 오지호미술관, 남덕원비)
-15:30~16:00 이서 도착
-16:00~16:30 이서 은행나무답사(하백원), 적벽낙화 무등산규봉 조망(물염정)
-16:30~17:00 금호리조트 좌담 후 해산
예) 답사 토론: 진각국사 혜심
보조국사 지눌은 화순사람 진각국사 혜심에게 그의 불법을 전한다. 1205년(희종 1) 지눌이 억보산(億寶山) 백운암에 있을 때 혜심은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지눌이 다 해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이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날 지눌이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와 대혜종고(大慧宗杲)의 10가지 병을 들어 대중에게 물음에,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혜심은 "3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눌이 다시 "3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1번 내리쳤다. 이에 지눌은 방장에 돌아가 그를 불러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게"했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지리산으로 피하여 오래 숨어 지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시도(示徒) /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
춘삼월 햇빛 모아둘 곳 없어서
버들가지 위에 눈부시게 흩어져 있네.
아깝게도 봄바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물 따라 흘러가는 붉은 꽃잎만 보이는구나
三月韶光沒處收 삼월소광몰처수
一時散在柳梢頭 일시산재유초두
可憐不見春風面 가련불견춘풍면
却看殘紅逐水流 각간잔홍축수류
松根去古蘇 송근거고소
소나무 뿌리에는 묵은 이끼 돋아나고,
石眼迸靈泉 석안병영천
돌 구멍에선 신령한 샘물이 솟아오른다.
快便不易得 쾌변불이득
상쾌하고 편안함 쉬이 얻어지지 않아,
親提趙老禪 친제조노선
직접 조주 선사의 선문답 끌어낸다.
양한묵
3·1운동 33인 민족대표중의 한 사람 지강 양한묵
앵남선산에 묘가 있다. 호남인으로 유일하게 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참가했다. 민족주의자들중 친일파로 변절한 경우도 많으나 3·1만세 주동자로 투옥된 후 일경의 가혹한 가문에 옥사할 때까지 의연한 민족기상의 표상으로 제자리를 지켰다.
주논개의 묘가 고향으로 가지 못한 까닭
육십령에서 경상도쪽으로 고개를 내려서면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있다. 임란 당시 논개의 출생지인 장수군 대곡리에 집성촌을 이뤘던 주씨들 가운데 일부가 왜적을 피해 들어왔다는 곳이다. 덕유산에서 황석산으로 뻗은 산줄기에 기댄 마을은 멀리서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커다란 저수지가 들어서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대곡리는 피적래보다 더 깊은 산골이다. 그럼에도 주씨들은 왜 왜적을 피해 고개를 넘어왔을까?
그 답은 논개의 묘소가 백두대간을 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논개의 묘는 피적래에서 마주보이는 방지마을에 있다. 논개가 민며느리로 팔려가게 된 운명을 거부하고 외가인 안의현으로 도망갈 때 넘었던 고개 민재 아래 첫 마을이 방지마을이다. 논개의 묘소를 찾아낸 이는 전북문화재전문위원인 오치황씨였다. 오씨는 자신의 조부가 남긴 문집 <경독재집>에 실린 글 “장수 의병들이 논개를 부실로 맞은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방지마을에 안장했다”에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진주에서 장수까지 산길 120리를 직접 더듬으며 설화를 확인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찾아낸 방지마을에 전해지는 설화는 최 장군과 논개가 방지마을 뒷산에 안장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의병들은 장수현감을 지낸 최 장군의 주검을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운구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장수에서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지금의 방지마을에 묻었다는 것이다.
방지마을은 논개의 외가인 안의현이 가깝고 논개의 친족들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논개의 부친이 원래 방지마을에서 살았다고도 전한다. 의병들은 피붙이들이 가까이 있으니 묘소를 돌봐줄 것이라는 기대로 방지마을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이런 기대는 헛되지 않아 그 오랜 세월 방지마을 사람들은 묘소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면서도 매년 9월9일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출처: 한겨레21)
첫댓글 21일은 강진다산홍보대회아닌가요?
회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21일에 뵐께요.
심화학습이 되겠어요. 감사해요.
우와~ 정말로 심도있는 답사가 되겠는데요. 감사합니다.
21일은 강진 다산 홍보대회인데....날짜를 조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날짜 여유가 없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