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네덜란드에 이미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령 인도의 셀레베스섬의 Menado에 있는 비행장을 탈취할 목적으로 일본 해군 공수부대를 점프시켰다. 그러나 일본군 공수부대는 유럽의 그것과는 틀린 컨셉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당시 남서태평양을 공격할 기항거리 리미트에 전투기를 주둔시킬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셀레베스 섬이다. 이 섬의 점거를 위해서 일본군 공수부대를 먼저 낙하산으로 투입 공격하고 이후 상륙부대를 투입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Menado가 그 최초 목표였고 일본군은 창설된 공수부대를 최초로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뛰어난 공수부대의 보유를 작전을 통해서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전선후방의 목표를 공격할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최초에 점프한 부대는 1st Special Landing Unit로 제1요코수카 부대였다. 2개의 중대를 토요아키 호리우치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리핀의 다바오 비행장에서 비행기에 올랐고 1001 Daitai(공중수송대대)의 28대 수송기를 이용했다. 항공기는 G3M이었다. 일본 해군 공수부대원들은 1942년 1월 11일 오전 9시에 저고도로 점프했다. 도시의 남쪽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Langoan 비행장이었으며,
그곳에는 네덜란드군 1,500명이 지키고 있었고 네덜란드 주둔군의 사령부가 있었다. 이 공수공격으로 미나하싸Minahassa 반도는 놀라움에 휩쌓였다. 네덜란드군은 흩어져 있었고 특히나 해안의 침공에 대비하는 형태였다. 이 놀라움에 이어 4시간 후에는 일본군의 상륙군이 해안에 밀어닥칠 예정이었다. 324명의 일본군 공수부대는 비행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중 한 대의 수송기는 실종되었다. 아마도 바다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이것이 중기관총 등을 실은 화물낙하산 수송기였다는 것이다. 일본군 공수부대원들은 화기가 부족했다. 일본군 공수부대 역시 화기와 중화기는 컨테이너로 떨어트리고 개인은 권총과 수류탄 등 만을 가지고 뛰었다. 이것은 독일군 팔쉬름예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론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에는 시기적으로 느리지만, 실질적으로 미군보다는 2년 정도 공수부대 개발이 앞섰다.)
공항의 네덜란드 수비대는 약했고 일본군 공수부대원들은 방어선을 넘어 오버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부 찾은 낙하산 콘테이너로 받은 경기관총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공수부대의 타격도 이미 큰 상태였다. 네덜란드군의 단편적인 대공사격으로 이미 130명의 요코수카 부대원들이 죽거나 부상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머지 대원들에 의해 공항은 오전 10시 30분 신속히 점거되었다. 이들은 집결하여 공항의 방어를 구축하고 샹륙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상륙군은 바로 공항까지 오지 못했고 공수부대는 더 버텨야 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월 12일에는 다시 18대의 동종 수송기로 185명이 추가로 점프하였다. 그리고 장비도 투하하였다. 바로 활주로 상공에 낙하산을 뿌렸다. 네덜란드군은 낙하산 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 반격과 상륙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 쇼크는 바로 회복될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군은 유기적인 전투를 하지 못하였다. 너무 놀란 것이었다. 공수와 상륙의 양공은 성공적이었으나, 이 요코수카 부대원의 70%가 전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공수부대가 상당히 공격적인 장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크레타에서의 이러한 비슷한 손실을 보고 대규모 공수작전을 중단시킨 반면, 일본군은 몇 놈 뒤져도 별 상관을 안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전쟁후기에 일본군 공수부대가 작전을 못한 것은 태평양이 무대였다는 것이 문제였고, 항공기 전함의 부족과 해상견제로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신풍어택도 불사하는 친구들이니......다잉 밴드 어브 브라더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 섬을 점령한 후에, 여단 규모의 대규모 공수작전을 팔렘방 수마트라 섬에서 펼친다. 이 작전의 주역은 일본 육군 제1낙하산군(1정진단)이고, 그중 세이 이치 쿰 대령이 지휘하는 425명의 낙하산습격연대가 주인공이었다. 이것은 원래 그냥 2낙하산연대였으나 그들은 자신을 낙하산기습연대라고 불렀다. 역사상 일본의 두 번째 공수기습작전이었다.
1낙하산기습연대는 하이난 섬의 하이코에 남아 있었다. 공격의 제1파는 소령 니하라가 지휘하는 270명의 대원들로 이들은 마닐라의 카항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1942년 2월 14일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 강하시에 일본군의 중폭격기가 엄호했다. 이때 초계중이던 영국군 허리케인기들이 이 항공선단을 발견했으나 무전기의 통신거리 이탈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 허리케인기들은 원래 일본군 상륙군을 폭격할 영국군폭격기들을 엄호차 가던 길이었다. 그러자 야마가 돈 허리케인기들은 이 항공단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기의 피해는 미미했고 그들은 목표로 전진했다. 그리고 점프가 시작되었다. 으찌 니 산 뛰어부러!
(기억하기로 일본군 공정부대도 예비낙하산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팔쉬름예거의 쌈박한 전통의 유산이 아닐까 한다. 과거에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백마부대 헌병대 중사가 불쏘시게 하려고 던져 놓은 책에서 분명히 이 니뽄 버터플라이의 내용을 읽었었다.)
이 일본육군의 돌격대원들은 도로를 차단하여 증원을 막고 나머지는 비행장으로 들어갔다. 근접전이 시작되었다. 2시간 후에는 말레이시아 크루앙 비행장에서 뜬 60명의 다른 대원들이 12대의 수송기를 타고 와서 다시 Pladjoe란 곳에 점프했다. 그들은 오전 9시 30분 600피트 상공에서 점프했다. 히로시 노부타카 중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이 뛰어내린 위치는 정유공장이었다. 그들은 정유소를 점거하고 파괴한 후에 목표를 달성하고 늪지도 퇴각하였다.
또한 다른 30명이 비행장의 활주로 부근에 점프했다. 그들의 손실률은 80%에 달했으나 결국 Pladjoe을 점거했다. 다음날인 1월 15일, 다시 94명이 수송기에서 뛰어내렸다. 연합군도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후 증강이 되지 못했고 일본군 공수부대는 수세에 몰렸다. 오후가 되자 이들은 팔렘방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때 다행히 이들은 무시 강을 따라 올라오던 상륙한 일본군 38사단 229연대를 만났다. 그러자 이들은 다시 비행장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2차 목표는 팔렘방 근처의 2개 정유시설이었다. 일본군은 무지비했고 또한 전투력이 강했다. 이들은 이후 2주간 작전하고 복귀했다.
또다른 낙하산을 이용한 일본군의 공격적인 특수작전이 네덜란드령 서 티모르 섬에서 있었다. 요코수카부대의 3대대였다. 그러나 이번 역시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보병의 댓가는 컸다. 제3요코수카 부대는 코이치 후꾸미 중령의 지휘아래 630명이라는 거대한 병력이 동원되었다. 또한 공수와 상륙의 양공이었다. 지역은 역시 Usua(모모소님이 사는 우사란 뜻은 아님)란 곳의 비행장이었다.
1942년 2월 20일 이른 아침 일본군 공수부대의 제1파 약 반대 대대에 해당되는 308명이 약 25대의 G3M수송기(2차대전 비행기는 모 드라마에 나왔던 콜세어 외에 별로 모름)를 타고 켄다리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나머지 요코수카부대원들은 예비대로 대기중이었고 상황에 따라서 투입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영어로 정확히 말하면 Airborne marines에 속했다. 이들은 바다 위를 날다가 수평선상에 멀리 보이는 작은 섬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장비와 낙하산을 점검하고 점프준비를 했다. 이때 상대방의 목격담은
“그런 터무니 없이 부피만 큰 일본군 비행기가 폭탄도 안떨어트리고 Usapa Beser와 Penfui의 상공을 쓸데없이 돌고 있었다."
첫 번째 요코수카 분견대가 Usua 부근에 점프를 했다. 그리고 재빨리 DZ의 안전을 확보했다. 대원도 받고 컨테이너 낙하산으로 장비도 받아야 했다. 일대는 수 백명의 일본군 낙하산대원들이 떨어졌다고 급하게 통신이 퍼져나갔다. 연합군은 대략 바부아의 북서쪽 5마일 지점으로 보고 있었다. 섬은 중앙에 도로가 단 하나 있었다.
일본군은 이 도로를 점거함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와 기타 연합군과 다른 부대의 교통을 막고, 자신들의 무기와 탄약, 의무장비, 기타를 공중에서 받아야 했다. 장비를 유실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셀레베스 섬의 작전에서 요코수카부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해안상륙부대는 그곳에서 6마일 떨어진 곳에서 세군데에서 상륙하고 있었다. Paha강의 입구와 해안이었다. 경천차도 상륙을 시작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예비대가 드롭존에서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신속히 행동했다.
연합군은 이 거대한 장면을 멀리서 목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장악을 시도하고 있는 Tjamplong 도로에서는 계곡의 모든 곳을 잘 관찰할수 있었고 펜포이Penfoi의 비행장도 보였다. 연합군은 쌍발엔진이 달린 일본기가 계곡에서 비행장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에 띄게 엔진소음이 조용한 비행기였다. 그리고 얼마후 거한 구름과도 같이 수백개의 낙하산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낙하산에는 색깔이 있었는데, 그 색깔은 지휘관의 계급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화물낙하산도 눈에 띄도록 색깔이 있었다. 연합군 병사들은 공포를 느꼈다. 어느 영국공군조종사는 섬을 탈출하여 미 해군 잠수함에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소리쳤다.
“신이여, 오스트레일리아를 구원하소소!”
(프로스펙스 조깅화를 X포맨에게 지원받아 내려주마!)
일본군 병사들은 기대공사격을 받았고 일본군 병사들도 내려오는 동안 총을 쏘기도 했다. 일부 일본군공수부대는 Babua에 10시 50분 쯤에 도착했다. 병력이 모자라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약 2개 소대가 그들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소총과 권총, 그리고 대검뿐이었다. 일본군보다 무장이 약했다. 그러나 반자이 어택에 대가리 오버로드 걸린 호주군은 오후에 마을에서 밀려났다. 그때 호주군 11공병중대 2소대의 두명의 호주군병사가 경기관총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Babau의 주도로로 넘어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기관총반 파이팅!)
이 2명으로 인해서 일본군은 약 3시간 동안 지체되었고 그 때 후퇴했던 호주군 병력들이 다시 발길을 돌려 돌아왔다. 호주군 D중대의 예비대도 도착하였다. 그러나 바부아에 대한 공격은 4시 30분쯤 가까워진 일본군에 의하여 서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호주군 소대는 마을의 동쪽 옥수수밭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때 호주군의 중화기가 도착하였고 호주군 2개 소대는 박격포와 중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을의 시장쪽을 이동하였다.
보강된 호주군을 만난 일본군 공수부대는 이 전투에서 많이 전사했다. 일본군의 38구경권총과 경기관총도 노획되었다. 호주군은
“일본놈들은 모두 녹색 군복이다!”
라고 전달하면 일본군을 찾았다. 이미 호주군은 보강되어 6.5밀리 카빈과 경기관총을 가지고 있었고 2인치 박격포도 사용하고 있었다. 호주군은 당시 일본해군 낙하산 육전대의 체구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인들에 비하여 상당수 키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일본군 시체가 무장한 무기와 장비들을 보고도 놀랐다. 기존 일본군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자동화기까지 앞세우면서 호주군의 진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호주군은 지탱이 힘들어졌으나 안간힘을 쓰면서 저항했으나 밤이 되자 일본군 공술부대원들은 점차 마을에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일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녹색군복의 일본군들이 무리지어 마을에 들어와서 전투가 격렬해졌고 호주군은 Ubelo로 후퇴하여 방어를 준비한다.
다음날 일본군 지휘관은 나머지 병력을 낙하산으로 보강투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호주군은 이미 동쪽으로 후퇴하여 티모르 지역으로 들어가는 주도로를 타고 있었다. 일본군의 2차 점프는 18대의 수송기로 185명이 뛰어내렸다. 이들의 낙하산은 멀리서 완두콩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고 일부는 컬러색과 아예 하얀색 낙하산을 타고 있었다. 일본군의 전투기들이 지원을 했으므로 이 점프도 거의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이들 일본군들은 밤이 되면 많은 저격수들을 전방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다시 야마가 돈 호주군은 새벽 5시 30분을 기해 중대급으로 반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옆의 옥수수밭으로 일본군들이 몰려들었고 호주군은 공격을 중단한다. 그러나 거꾸로 옥수수밭의 일본군은 고립되었다. 이때 한 일본군 장교가 옥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죽었는데, 자전거를 탄 상태로 두 개의 신호용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일부가 그 장소로 기관총과 작은 구경의 박격포를 가지고와서 호주군의 박격 화점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 옥수수밭에서 일본군이 많이 전사했음, 여러분, 옥수수밭에서 턱치지 마세요. 밑에 일본군 시체가.....한국인은 전통적인 물레방아깐이나 메밀꽃피는 곳에서...흠.)
그러자 밀리던 호주군은 후퇴를 하지 않고 중대를 왼쪽으로 빠르게 우회시켰다. 결국 이 호주군의 전술행동으로 일본군은 밀렸고 옥수수밭에 있던 일본군은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다음해 옥수수 씨알 컸겠다!) 결국 호주군은 다시 Babua 마을로 돌아와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당시 한 건물은 일본군의 본부로 보였는데, 여기서 호주군은 계급이 높은 장교과 10명 정도의 일본군에어본을 죽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후퇴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때 호주군 1개소대가 대공포를 무게차에 실어서 전투장소로 실어왔다. (신문선-아, 니뽄군 몰리고 있어요.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가운데 다리 근 섬유가 늘어나고 있어요) 이날 사실 일본군은 별로 좋지 않았다. 호주군은 2차 강하를 대비하고 있다가 영국제 대공포로 총 14대의 일본기를 떨어트리는 분전을 이미 하고 있었다.
그중 몇 대는 쌍발엔진이었으니 아마도 공수대원들도 같이 죽었을 확률도 있었다. 당시 영국군 중위였던 C.W. 스코트는 회상하기를 “전날과 같이 일본군의 그 flying boat가 일본군 공수부대원들을 태우고 왔다.”라고 했다. 당시 날아온 비행기중에는 IJN transport H8K2-L Seikuu(뭔 비행기냐? 알아야 말이지. 안창남 선조가 탔던 복엽기는 아니겄제)가 있었는데 이것의 연합군측 암호명이 flying-boat였다. 이게 나중에 자라서 우주전함 야마토가 되나?
그러나 이때 요코수카부대는 큰 증원군을 얻는다. 일본군 228연대의 중대급이 도착하였고 이들은 중화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요코수카부대는 힘겹게 방어로 전환하고 있었다. (신문선-아, 일본 살아나고 있어요! 요코수카 선수 경계해야 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결국 일본군 해군 육전대 낙하산부대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원래 비행장을 정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호주군을 막아야 했다. 만만치 않은 군대였다. (본인은 그래서인지 AC/DC 상당히 좋아함) 호주군 40대대 2대대 그룹은 도로를 따라서 후퇴했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전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일본군 상륙부대가 Usua로 가는 도로 옆의 고지대에 참호를 파고 지원에 나선 것이다. 근처네에는 아마리 강의 교량이 있었다. 이들은 능선에 기관총과 박격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호주군 중대를 공격하였고 이를 통해서 총 2일간 전투가 벌어진다. 그로 인해서 그 능선은 거의 지옥을 방불케하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공격에 호주군이 버틴 것은 호주군이 가지고 있는 자동화기 덕이 컸다. 호주군의 희생도 컸지만, 호주군 대대의 3개 대대가 규합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측면으로 이동하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사격하여 일본군이 막았다. 결국 전투는 호주군의 흩어진 소그룹과의 혼전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일본군의 소수는 명령 없이 호주군의 차량을 몰고 길을 따라서 방어선을 돌파하여 Babau 향해 질주했다. 이 일에 호주군도 자존심이 상했으나 오후에는 거꾸로 일본군의 박격포화를 15분간이나 정상에서 받았다. 능선은 연기와 먼지로 가득찼다.
그러자 호주군이 반격을 시작하였고 도로차단점에 은밀히 특공대원을 보내어 지키고 있던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다시 거점을 회복했다. 그러자 호주군은 B중대가 지원하는 가운에 A와 C중대가 과감한 전면공격을 감행했다. 빅커와 브렌 기관총이 지원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소화기 사격와 수류탄으로 호주군은 공격에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호주군은 일본 육군과 해군 병사들이 참호를 구축하고 있는 능선의 정상부근에 도착했다. 참호는 상당히 망가져 있었고, 호주군은 총에 착검했다.
그리고 첫 번째 참호를 향하여 뛰었다. 사격과 기동이 계속되면서 참호가 하나 둘 씩 격파되어 갔다. 일본군은 분산되어 사라졌다. 유기적인 저항은 사라졌고 능선의 일본군 진지는 호주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그러나 호주군의 차량을 탈취하여 달리는 일본군 소수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은 하강세였다.
일본군 지휘관은 방어선을 넘어 후퇴를 결정했다. 서쪽의 네덜란드군까지 조여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곳만이 그러했고 1941년 12월 이후 다른 지역이 말레이시아 섬들은 하나둘씩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일본군의 보급도 점차 늘어났다. 공군력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공수부대를 이용한 공격은 거의 사라지게 되다가 ‘나 돌아갈래’의 현실적인 맥아더의 역공으로 미군 11공수사단이 루손섬에 상륙했을 때, 같은 공수부대인 11공수사단 지역에 일본 육군 공수부대가 공격을 시도하나 이미 맥아더가 팔씨름의 정상을 넘어선 상태였다.
하여간 이 당시 호주군이 일본군과 싸우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공중지원이었으나 그것이 없었다. 다음날 호주군 지휘관인 레서트 중령은 후퇴를 결정한다. 본대와 통신도 끊켰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강력한 일본군 상륙부대가 Koepang이미 들어와 신속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빼앗은 비행장을 이용한 공중지원을 앞세우면서. 호주군도 지쳤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 해군육전에 낙하산부대는 총 550명이 전사하고 78명 만이 살아남았다. 특히나 일본군 공수부대는 박격포화에 많이 죽었다. 화가 난 일본군 지휘관은 그 호주군 대대장을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Usua 능선에서 호주군에 패한 일본군도 연결하여 구조했다. 피해는 컸지만 일본군 공수부대의 공격적인 작전은 제국주의에서나 나옴직한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 일본군 해군과 육군의 공수부대는 동남아시아의 침략전의 전초에서 연합군에게 상당한 쇼크를 주었었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호주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용감히 싸웠다. 호주으 선조가 원래 한 깡다구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베트남전 초기에 미국은, 정글전에 강한 호주군 고문단을 일부 받아 들인다. 후기에는 사라진다)
Japanese Airborne Attack on Elements of the 11th A/B
By: Brig. Gen. Henry J. Muller, Jr.
"수송기?“ ”일본놈?“ ”일본군 공수부대?“
1944년 12월 7일 오후 6시,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에서 보고 있던 병사들은 11공수사단의 점프를 해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송기를 보고 무언가 공수부대의 작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일본군 수송기다!............아, 일본군 공수부대다!..............”
장교들이 식당 텐트에서 뛰어나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난 12개 정도의 낙하산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병사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 45구경 권총으로 두 탄창을 가장 가까운 낙하산에 대고 쏘았다. 대부분은 우리 본부대를 지나서 떨어졌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산 파블로 활주로였다. 몇 명의 일본군은 우리의 가까운 북쪽에 떨어졌다.
난 사무실로 들어가 군단 본부에 전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불통이었고 난 무선통신을 이용하여 상황을 알렸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뛰어내린 비행장에서는 적지 않은 총소리가 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밤에 일본군 저격수가 쏠 수 있으니 제네레이터를 끄고 불을 모두 소등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텐트 주변에 참호를 팠다. 밤 동안, 보급 장교는 우리 보급부대와 본부대의 잡다한 병력을 모아서 보병 대대로 편성했다.
해가 뜨면 비행장에 침투한 일본군에 반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나와 부관, 그리고 운전수를 대동한 스윙 사단장을 직접 지프를 타고 비행장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갔다. 우리 부대원들이 진압작전을 하고 있었다. 저항은 작았고, 괴롭히던 몇 명의 일본군 저격수들은 활주로 북쪽의 숲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몇 대의 경비행기에 불을 지르고 항공연료에도 불을 놓았다. 그리고 불탄 일부는 산악의 작전중인 사단 병력에게 공중재보급할 것들도 있었다. 비행장이 보급부대에는 큰 인명피해가 없었고 모두 참호를 파고 있었다.
일본군 공수부대는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첫 번째 비행기에서 떨어진 일본군들은 대략 600피트를 벗어나서 사단본부 쪽에 잘못 떨어졌다. 나머지도 활주로를 지나서 키가 큰 나무들이 있는 곳에 대부분 떨어졌다. 그중 한 명은 생명줄이 제구실을 못하여 낙하산을 짊어진 채 그대로 떨어져 죽어 있었다. 그들의 규합은 비행장 공격의 실패였다.
우리 진압대는 일본군들이 아무 방향으로나 돌아다니고 있으며, 정확한 목표가 없어 보였다고 말했고, 술에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일본군은 여러 전투에서 임하기 전에 술을 먹고 용기를 내는 방법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군은 어색한 발음과 문법으로 영어를 소리치고 있었다. 좀 부정확하게 교육받은 것 같았다. 사태가 좀 진정되자 스윙 사단장은 경비행기를 이용한 중요한 공중재보급을 계획대로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사단 본부로 돌아왔다. 본부에 도착하자 난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THE AFTERMATH
이 일본군 공수부대의 공격전날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정보과에 근무한 나의 경력상으로 일본군이 그날따라 전에 보이던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편집증적인 나의 사고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노트에도 이러한 점을 적었으니 업무에 집중하는 나를 걱정할 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정보과는 원래 정신력이 강하고 활력이 넘쳐서 적을 분석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후 어느 동료가 말했다.
“이봐, 핸크. 자네는 어떻게 일본군의 점프를 예감할 수 있었지?”
“그것은 논리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생각하면 돼. 어차피 진주만 공격이나 이 일본군 공수부대의 공격의 특징은 해가 지기 전에 감행됐다는 공통점 정도가 있다고.”
그러나 난 당시 허풍선이로 몰릴까봐 들어내놓고 말을 쉽게 하지는 못했다. 우리 정보부의 모든 말은 상급 사령부에 능력평가에 지표가 되므로 또한 쉽사리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우리는 당시 "crystal ball"이라고 불리는 정보 메시지를 상부로부터 받고 있었다. 사실상 작전명령도 이것에 포함이 되었는데 우리는 항상 불안했고 언제 명령이 떨어지거나, 일본군의 정보가 투여될지 몰랐다. 일본군은 이동중이거나 은닉하여 항공정찰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땅굴을 파고 들어가니까.
포로에 대한 정보가 날아오기도 했고 일본군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혹은 우리 연합군의 작전성공에 대한 뉴스이기도 했다. 당시 이런 정보는 필리핀 반일게릴라들에게서 많이 나왔는데, 그들은 정말로 명예스러운 활동을 했다. 얼마후 매셔 대령이 방문을 했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는 그 사생아 놈들(일본군 공수부대)이 뭘 할건지 알고 있었어.”
우리는 나중에 Willoughby 장군의 의견이 정확히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 장군 야마시타는 제1공수여단과 2개의 공수연대를 낙하산으로 비행장에 떨어트려서 공격하고, 이는 일본군 26사단의 공격과 병행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산악에서의 공격과 공중공격을 동시에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예정된 12월 7일 일본군은 그것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윙장군도 일본군이 그만한 병력을 공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그러한 작전에 경험이 없었다. 일본군은 아마도 노르망디의 D-Day에 큰 인상을 받고 따라하려고 한 듯 하다. 결국 그들은 1개연대를 먼저 보내기로 생각했다. 1개 연대 정도를 나를 비행기는 일본군의 것을 총동원하면 가능할 수준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돌아오면 다시 병력을 실어서 점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점프가 가능한 수송기는 대략 500명의 수용이 가능했고 이는 한 연대의 1/3 수준이었다. 이것도 25대의 수송기로 3회를 루존에서 레이테로 공수해야 가능한 인원이었다. 그러나 한번은 실어날났으나 두 번째인 다음날은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병력을 이용한 카미카제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후 공수는 취소되었고 작전을 불필요한 상황이 되어 첫날 뛰어내린 병사들은 그저 사자의 밥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정보력도 좋기는 했으나 일본군 역시 필리핀게릴라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했다. 필리핀 게릴라들은 무선이 아니더라도 잠수함을 통해서 보고서 형식으로 아주 자세히 보고서를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의 동태파악은 무선도청이었는데 난 이것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착각이었다. 미 해군과 육군은 이미 독일군과 일본군의 1급암호를 해독하는 기계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발전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정보능력을 또한 보안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우리 하급자들은 전혀 정보를 받지 못했다. 워싱턴의 사람들이 오히려 이 정보를 빨리 알았으며, 일본의 어떤 큰 공격이 있다고 해도 육군성은 야전 지휘관에게 그 몇 시간 전에 통보를 하곤 했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아이젠하워 장군, 맥아더 장군, 니미츠 제독, 그리고 그들 사령부의 정보책임자들 뿐이었다. 도청과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이 몰라야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맥아더 장군이 이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양 산호해에서 일본군의 함대를 불시에 기습하고 파괴한 작전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비행기를 격추시킨 것도 같은 정보력에서였다. 야마모토는 일본해군의 최고사령관이었고 진주만공격을 지휘한 자였다.
전선의 정보장교인 나도 이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된 계기도 그것이 얼마나 보안성을 요구받았는가 알았다. 미시간의 상원의원 호머 퍼그슨이, 미군 당국이 진주만 공격을 사전에 예측하고 있었다고 폭로한데로 알게 된 것이다. 퍼그슨 상원의원은 조사과정에서 미군에 일본군 암호해독능력이 있으며 그것이 1급보안으로 지켜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투루먼 대통령이 이 퍼그슨의 조사를 그만두게 하려고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 헤드라인 뉴스를 읽고 나의 경험을 살려보면, 대부분 일본군의 공격은 적어도 하루 전에서 한시간 전에는 우리 정보부가 알고 있었다는 가정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