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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하여” |
여기까지가 정각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오득하자는 것이냐. 진리를 오득하자는 것이다. 무슨 진리냐. 일원의 진리이다. 일원의 진리는 무엇이냐. 불조정전의 심인이다. 불조는 부처님과 조사입니다. 다른 말로 제불제성입니다. 일원상을 세 가지로 설명하면,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하지요. 세 가지가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입니까. 일체중생입니까. 제불제성입니까.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하면 심인이라 하면 도장이거든요. 도장은 어제 찍으나, 그제 찍으나, 작년에 찍으나, 내년에 찍으나 똑같거든요. 제불제성은 마음이 도장 같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똑같냐 하면, 중도에 맞다는 것입니다. 경직된 마음이 아니라, 도에 맞는 마음입니다. 진리를 여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항상 원만행이요, 항상 은혜를 생산하는 마음입니다. 제불제성을 정화신불(正化身佛)이라 합니다. 일체중생을 편화신불(偏化身佛)이라 합니다. 둘 다 부처님입니다. 그렇지만 제불제성은 정화신불이라 하고, 일체중생은 편화신불이라 합니다. 정화신불은 마음을 써도 도장 같은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은 마음을 쓰면, “오늘 피곤하니까 가지말자.” “갑자기 감기가 올 것 같아” 그래서 일체중생은 심인이라 안 써줍니다. 일체중생은 자행자지하거든요. 하고 싶으면 하고, 그치고 싶으면 그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자행자지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은 아니고, 본래의 성품이 일원상입니다.
정전(正傳)은 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제불제성에는 여러 분이 계시잖아요. 여러 분들이 전하는 것이 있어요. 바른 자리입니다. 정각이란 바른 자리를 깨쳤다는 말이거든요. 정은 중이고 원만입니다. 중은 유가에서 나옵니다. 희로애락미발지중이라 합니다. 희로애락이 아직 나오기 전의 자리라는 말입니다. 똑같은 소리입니다. 정(正)각은 중(中)각이요 원만(圓滿)각입니다. 정행은 중도행이요 원만행입니다. 제가 간사 때 세 가지를 책상에 써놓고 있었습니다. 평상심, 원만행, 중도행ㅡ 간사 때 제 마음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돈오돈수다,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수행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각정행이라 하면, 수행에다가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대강령을 보시면, 뒤에 두 글자는 전부 실행입니다. 정각‘정행’, 지은‘보은’, 불법‘활용’, 무아‘봉공’. 실행을 하자는 겁니다. 어떤 실행이냐. 도덕적 실행입니다. 도를 실행에서 나오는 덕으로서의 실행ㅡ도덕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도는 우리 수행이요, 덕은 신앙이잖아요.
“심인을 오득하여”에서 오득은 깨달아서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득한다, 진득한다, 견성한다, 다 비슷한 소리겠지요. 오도 어떤 오가 있어요? 점오가 있고, 돈오가 있습니다. 그 오가 되려면, 선결이 필요합니다. 정각을 하려 했더니, 뭐가 필요하지요? 서원과 신이 필요합니다.
서원 or 신(信)⊇정각⊇정행
정행을 하려 하는데, 믿음이 있어도 어느 정도 정행이 됩니다. 정각을 하면 더 확실히 정행이 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비례하는 면이 많습니다. 전신전수전수(全信全修全受) 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온전히 다 믿으면 시키는 대로 수행을 하게 돼있고, 그러면 온전히 은혜를 받습니다. 반만 믿으면, 반만 실천합니다. 그래서 반만 받습니다. 반신반수반수(半信半修半受)입니다.
설사 신이 있다가도 깨달음이 없으면, 이 회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한때 신이 지극해도, 화가 나보세요, 이 회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반대로,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보물 중에 가장 큰 보물을 선물 받았거든요. 진리를 통해서, 스승을 통해서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어요. 인과(因果)로 다시 말씀드리면, 과(果)라는 각(覺)이 있으려면요. 연(緣)을 만나야 합니다. 연은 스승이나 법, 또는 회상이나 진리입니다. 타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누가 인(因)이냐. 자기가 인입니다. 내 자신이 타력이라는 연을 만나서, 각이라는 과를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승만 있으면 깨달음이 된다지만, 스승은 타력일 뿐입니다.
원불교에서 정각의 반대말은 무지입니다. 무지라는 것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이냐.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삼법인으로 이야기합니다. 삼법인의 첫째가 제행무상(諸行無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행은 무상이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에도 어제 발을 담근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의 세계를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변합니다. 각주구검 (刻舟求劍)이라는 소리 들어보셨어요? 새길 각, 배 주. 어떤 사람이 좋은 칼을, 강물에서 배타고 가다가 빠뜨려버렸어요, 빠뜨린 배 끄트머리에다가 표시를 해뒀어요. 나중에 여기서 찾는다고요. 나중에 찾겠어요, 아니겠어요? 여러분, 제가 지난주의 제가 아닙니다. 지난주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세포가 바뀌었고요. 죽음의 길에 조금 더 다가갔습니다. 시간으로서의 제행무상입니다. 그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에 무지하면은, 자꾸 ‘왕년에’ 소리 하고 있지요. 자꾸 과거로 가요. 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닌텐도가 그렇게 큰 소리 치다가, 지금 망해가기 직전입니다. 변하거든요. 한때 어떤 사람이 신심 있어서 큰소리 쳤어도, 한 마음 변하면 변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현재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가 과거의 종합이면서도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업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의 이 마음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삼법인의 둘째가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여기서 법은 교법이 아니라 현상을 말합니다. 모든 현상은 무아라는 말입니다. 현상은 대상을 의미합니다. 모든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를, 상담학에서는 탈동일시라고 말합니다. 무지는 착심에 사는 것이고, 착심은 대상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착각 중에 하나가, 내가 비싼 가방을 들면, 내가 비싼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이 동일시입니다. 버스타고 가는데, 밖에 쳐다보니 나보다 공부 못했던 동창이 에쿠스 타고 있어요. 갑자기 초라해져요. 버스와 나를 동일시한 것입니다. 이게 착각인 거거든요. 무지입니다. 버스는 버스이고, 가방은 가방입니다.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나와 대상의 관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지라 합니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로 알고 있습니다. 무지지요. 그러니 일체개고라 괴롭습니다. 그 고는 나라는 존재가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를 보십시오. 제가 보이지요. 저라는 대상을 여러분이 보는 무언가 있지요. 보는 감각기관이 인식을 하는데, 눈을 통해서 상대의 대상을 보고 내 안에서 인식합니다. 그런데 대상은 대상일 뿐이고, 기관은 기관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상과 기관을 자꾸 나로 알아요. 나의 가방, 나의 몸. 내 몸을 나로 알아요. 나의 손, 나의 머리, 나의 명예를 나로 압니다. 무지입니다. 고통은 어디서 옵니까. 고통의 핵심은 아견입니다. 아상입니다. 금강경의 핵심이 무아입니다. 무상입니다. 무아와 무상을 알지를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니까. 항상 나라는 것이 들어있어서 말이에요, 내가 누구를 좋으면 환장하게 좋아버리고요, 그 사람이 변심을 하면 죽어버리고 싶거든요. 왜냐하면 그 사람을 나랑 동일시 했거든요 .
정각한다는 것이 여태 우리가 배운 교리입니다. 맨 처음에 원력, 서원이 중요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해봤더니, 그 사람들은 생각의 대부분이 내가 이룰 꿈에 대한 것이랍니다. 가난한 사람들 생각을 분석해봤더니, 거의 번뇌망상입니다. 번뇌의 원인이 아견입니다. 나라는 생각을 하고 사니까, 상대적 세계에서 번뇌하며 사는 것입니다. 속은 줄도 모르고 속고 사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아견은 끝없는 욕망이요 끝없는 고통의 세계입니다. 고통은 찔러서 아픈 것이 아니라,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만족이 안돼요. 만족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면 정견을 못한 셈입니다. 인생에 고통이 없지 않습니다. 찌르면 아픕니다. 병 걸리면 아프지요.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 좋고, 맛없는 것 먹으면 기분 나쁩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는 나와 나를 동일시 해버리는가, 어떤 물건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나를 동일시해버리는가가 문제입니다. 특히 엄마가 자식에 대해 동일시 해버리지요. 철저하게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에요. 그러면서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한다는 것, 유무자리입니다. 중생은 단견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단견이 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어제 출가위 어른을 만나고 왔습니다. 회사를 운영하세요. 상장회사입니다. 그 회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수십 년 되었습니다. 그 회사에는 노조가 없답니다. 안산, 울산, 중국에 공장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그야말로 그 양반이 정각정행입니다. 당신은 가장 큰 재미가 뭐냐고 했더니, 회사 직원들의 행복이라 합니다. 회사 발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직원이 행복하면, 우리 회사는 알아서 발전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 행복이 뭐냐하면요. 이분이 직원들 자녀들에게도 장학금을 주고요, 장학금을 몇 억씩 교당에다 냅니다. 연초가 되면 종법사님이나 여러 교무님들 스물 몇 분한테, 기관 오십 군데에다가 돌려요. 당신의 재미는 돈 쓰는 재미래요. “교무님은 이 재미 모를 거예요”라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소아의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베풀 때 안 베풀고, 자기 것을 챙겨먹습니다. 이 분은 무아가 자기인 줄을 알아요. 부자가 되려면 보시해야 하거든요. 그것이 인과의 원리입니다. 중생은 인과를 몰라요. 그래서 중생은 부자 되려고 훔치고 도둑질하고 빼먹습니다.
이분은 원리를 압니다. 회사가 잘되려면 직원이 행복해야함을 알고요. 내가 영원히 잘 살려면 보시해야함을 알아요. 실생활이 정각정행입니다. 사훈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합니다. 원만행입니다. 노태우 때 노조를 열어서 안산 민노총 직원이 회사에 와서, 노조를 결성하라 말했습니다. 직원들이 “우리 노조위원장은 사장님이여”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를 가장 생각하는 사람이 사장님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노조가 만들어진 적이 없어요. 세무서도 비자금이 없는 것을 불신하더랍니다. 이 분은 집 한 채 있어요. 다른 부동산 하나도 없습니다. 다 희사합니다. 직원들이 다 좋아하다가 연말에만 싫어한답니다. 연말에는 사장님이 사정하거든요. “나 원불교에 돈 좀 내려하니까, 장학금이랑 기부금 좀 달라”고요. 당신 돈은 별로 없어요. 그야말로 무아시더라고. 놀래버렸습니다. 원불교 교도로서 무아를 기업에서 그대로 운용해서, 비자금 하나도 없어요. 세무서 표창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세무서 직원들이 회장님을 격려해주고 간다니까요. 세무서 직원들이 회장님을 걱정해요.
법을 그대로 활용하셔요. 외환위기 때는 전철을 타고 다녔답니다. “회사가 어떻게 되게 생겼는데, 제가 자가용타고 다니면 안 되지요” 말씀하십니다. 그때 직원들이 자체로 제품을 개발해서 수출했답니다. 그래서 외환위기 때, 회사가 더 커버렸습니다. 직원들이 주인이 돼서, 더 해버린 것입니다. 이분은 정행을, 원만행을 하셨는데, 그 원만행은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확실히 아신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무아임을 아셨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진짜 나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아십니다. 단견이 아닙니다. 매년 몇 억씩을 희사해도, 상(相)내는 것도 없습니다. 교당에서 보면, 교무들이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심 장한 교도들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신심 장한 교도가 아견 (我見)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정각을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교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내 원이 무엇이냐 계속 생각한 사람은, 또 내 신이 지극한 사람은, 수행을 하게 됩니다. 아침에 수양시간을 갖는 것이 정행입니까, 안 갖는 것이 정행입니까. 일기를 기재하는 것이 정행입니까, 안 기재하는 것이 정행입니까. 잘 아시네요? 정행을 중도행이라 합니다. 중도행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정행으로 넘어갑니다. 대종사님이 뭐라하셨냐,
(2) 정행이란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그 진리를 체받아서”ㅡ 체 받아서 사는 것과 나름의 양심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체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 공원정의 진리, 일원상의 진리, 무아의 진리, 무상의 진리, 그 진리를 체 받아서 해야 합니다. 체 받지 않으면 되려해도 잘 안됩니다.
“육근을 운용할 때 불편불의하고”ㅡ 편은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편향, 편착입니다. 편착안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김장하다가 이야기하는데, 딸과 며느리에 대한 비교를 하시더라고요.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라고요. 딸과 며느리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원만행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렇게 안되거든요. 하나이면서 둘이니까요. 정이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그 안에서 내가 원근친소에 끌리느냐가 문제입니다. 딸한테는 김치 두 박스 주고, 며느리한테는 한 박스 주는 것은 안 됩니다. 원근친소에 끌린 것이고 편착된 것입니다.
정각이 되면 평등한 자리, 성품자리는 평등한 자리거든요. 그때의 평등은 구별이 있는 평등입니다. 평등이라고만 말하면, 평등에 집착하더라고요. 평등은 무분별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평등한 그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바로 깨달아서 그대로 하는 것이 불편불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여기서 누구만 많이 이뻐하면 어쩌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성질나지요. 그런데 이쁜 것도 이쁜 것입니다. 그것은 불편불의한 것입니까.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할 일도 안하고 뺀둘뺀둘한 것이 이쁨 받으려 해요. 아니지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이쁨 받으려하면 착각입니다.
“과불급이 없는”ㅡ공부를 너무 과하게 하면 핑 돌 수 있습니다. 그런 분 몇 번 봤습니다. 옳은 것도 과하면 안돼요. 며느리가 예절이 너무 과하다쳐요. 시어머니가 부담스러워서 안가요. 적당히 맞아야지요.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한약의 원리도 똑같습니다. 과불급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서비스로 하나 알려드립니다. 영단이라는 소리 들어보시었지요? 육도윤회 들어보시었지요? 육도윤회와 영단의 관계를 제가 설명 드리려 합니다. 육도는 두 가지인데, 심상육도와 현실육도입니다. 현실육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상, 인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입니다. 지옥은 햇빛과 공기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주로 땅 속에 사는 생명들입니다. 지렁이라든지, 우리 뱃속의 기생충이라든지요. 영단의 크기가 단계에 따라 그대로입니다. 그 사람이 수양을 통해서 영의 세계가 얼마나 밝고, 또는 지혜가 있고, 맑냐에 따라서 그대로 육도윤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수양을 안할 수 없지요. 깨닫지를 못하니까, 육도윤회와 영단의 관계에서 무지하니까, 수양을 하라고 해도 안하는 겁니다. 한때 암만 잘 살아봤자, 제행무상입니다. 갈 때 하나도 못 갖고 가거든.
땅 속에 사는 생물은 영의 힘이 땅 위에 나올 수 없는 정도로 낮은 힘입니다. 그래서 땅 속에서 몸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알면 하게 돼있습니다. 이것만큼 내 생에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데서 무지하면, 정행이 안됩니다. 즉 수행을 안 합니다. 기부하고 희사하고 보시해야 내가 부자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정각하지 못하니까, 정행을 안 합니다. 정각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정각을 하기 위한 서원과 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모르면 시키는 대로라도 하라고 하지요. 대종사님 시키는 대로 해서 무슨 손해를 보겠어요. 시키는 대로 하세요. 시키는 대로 안하니까, 깨달음과는 거리를 유지하고요, 그러니까 실행도 멀고요.
영원한 고는 가난한 놈이 부지런하지도 않고 보시도 안하고, 그리고 무식한 사람이 배우지 않는 것이라 말씀 드렸지요. 나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요. 핑계대고 공부방에 빠지고요. 복 지을 때 도망가고 배울 때 도망가면, 나는 영원히 고통 속에 가난 속에 무식하게 살겠다는 소리입니다. 가난해도 부지런하게 노력하고, 모르면 물어보고 찾아보고 배우고 적극적으로 하면, 그 고통이 영원한 고가 아니라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고라는 것이 있잖아요. 정당한 고는 잠깐의 고이고, 낙이 올 고입니다. 여기 올 때 기분 좋게 오겠어요? 피곤하지요. 오늘 우리 식구들은 김장해서 다 뻗었습니다. 덕무님 엄청 피곤할거예요. 그런데 앉아계시거든요. 그것은 고통이지만 잠깐의 고통이니까요. 내 낙을 가져올 고통입니다. 고통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선도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선을 중도를 넘어서 착심을 내면서 하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을 하면서 선을 하면요. 내가 진짜 나라는 존재가 중(中)자리 희로애락미발지중ㅡ 희로애락이 나오기 전의 그 오롯한 그 마음 일원상의 그 마음 부처님의 그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무시선 안 되는 사람들은 낮에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최소한 아침저녁에는 그 마음을 챙기자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원기 98.11.20. 수요공부방 [정각정행]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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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원교우님 감사합니당 ^^ 바쁘신 와중에 너무 잘 정리해 주셨어용 ~~~ ♥
도원 교우님 감사합니다!! 서원과 신심으로 정각정행하는 교도가 되겠습니다~!
와우~ 도원 교우님 감사합니다.^^
ㅎㅎ정리 정말 잘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