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남방불교의 전래설화가 전해오는 고즈넉한 산사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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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사천왕문(四天王門) |
미황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이 우리가 반가운지 주차장까지 흔쾌히 마중을 나왔다. 활짝
열린 그를 지나 숲길을 거닐면 맞배지붕을 지닌 사천왕문이 나타나 속세의 번뇌와 영 좋지 않
은
여러 기운들을 최종 점검한다.
사천왕문의 주인인 사천왕(四天王)의 검문을 통과하면 전통차와 불교용품을 파는 선다원(禪茶
院)이 나오고 그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육중하게 생긴 2층짜리 자하루(紫霞樓)가 경내를 가리
며 시야를 막는다. 이곳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길래 이렇게까지 경내를 가리고 있을까? 기
대감과 호기심을 품으며 그의 밑도리를
지나면 달마산을 뒷배경으로 삼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미황사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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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에서 달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 전통차와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선다원 |
미황사는 전남
서남해에서 대흥사 다음으로 명성이 자자한 절이다. <이곳은 대흥사의 말사(末
寺)임>
달마산 남쪽 능선에 있는 도솔암을 제외하고 본토(부속도서와 잃어버린 땅 제외)의 최남단 고
찰(古刹)로 749년에 의조(義照)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749년 8월, 돌배 1척이 인근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를 들은 의조는
뭔가 상서로운 느낌이 들어 제자 100여 명과 목욕재계하고 그곳으로 나갔더니
때를
맞추어 배가 육지에 상륙했다. 그래서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法華經)','비로자나불','문수보살과 보현보살','40
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 탱화' 등이 푸짐하게 들어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들을 육지로 싹 꺼내 부근에 임시 보관했는데 그날 꿈에 금인이 나타
나 왈
'나는 인도의 국왕이오. 금강산(金剛山)이 1만 불을 모시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배에 싣고 갔
더니만 벌써 많은 절들이 들어차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소. 그래서 되돌아가다가 이곳 풍경이
무지하게 좋아 길을 멈추었소. 내가 가져온 것을 모두 그대에게 주니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
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꼭 절을 지어 모시시오. 그러면 국운과 불교가 흥창하리다~~!'
이에 의조는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이동했는데,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통
교사(通敎寺)를 세우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무지하게 아름다워서 '미(美)', 금인의 빛깔이 황금색(누런색)이라 하
여 '황(黃)'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 창건설화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53불 설화와 조금 비슷하며 인도에서 보낸 불상으
로 절을 세웠음을 강조하고 있어 인도의 남방불교(南方佛敎)가 들어와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남방불교는 이미 가야(伽倻) 초기에 들어와 가야 지역에 정착을 한 이력이 있다. 흔히
가야를 경남 지역으로 아주 좁게 보고 있으나 가야의 본거지는 중원대륙 양자강(揚子江) 주변
에 너른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야와 오랜 라이벌이었던 신라 또
한 산동반도(山東半島)부터 강남까지 중원대륙에 많은 땅을 거느리며, 인도, 동남아와 활발히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도의 남방불교를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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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바라본 자하루 |
▲ 자하루 옆에 자리한 달마대사상 |
고려
후기에는 남송(南宋)의 학자와 귀족들이 미황사를 종종 찾았다고 전한다. 1264년 그들이
배를 타고
달마산 동쪽에 상륙해 달마산에 예를 표하며 미황사를 참배했다. 남송 애들은
1294
년까지 순례를 왔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절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해남 달마산을 달마대사(達磨大師)가 해동(海東)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라 여겼다고
하며, 미황사도 스스로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항상 있는 곳'이라 칭해 자부심을 크게 드러내
보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시절에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598년 중건했으며, 1660년
에 성간(省侃)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751년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했다. 고승 유일(有一)이 이곳에 주석했으며, 1858년에는 의현(義玄)
이 만일회(萬日會)를 열기도 했다.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넓은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세심당, 감로당, 범종각, 달마선원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어
해남에서 대흥사 다음의 규모를 자랑하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응
진당, 괘불탱, 천불전 등의
국가 보물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및 시왕상 일괄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그 외에 조선시대에 조성된 부도군
2곳과 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事蹟碑)가 전하며, 절과 달마산은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9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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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미황사 샘터(석조) |
▲ 미황사 종무소(宗務所) |
미황사는 바위 능선이 일품인 달마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바다가 있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변 풍경이 눈과 마음을 살살 녹일 정도로 일품을 자랑하며, 해남 서부와
바다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걸작이다.
또한 10월마다 이곳의 자랑인 괘불탱(보물 1342호)을 내걸며 '괘불재
산사음악회'를 열고 있
는데, 이제는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해남의 으뜸 행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템플스테이로도 많
이 재미를 보고 있다.
* 미황사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미황사길 164 ☎ 061-533-3521)
* 미황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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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947호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대웅보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무거운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짠 다포(多包) 양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은 1751년에 중수된 것으로 1982년 보수공사 때 1754년에 작성된 '대법당 중수상
량문(重修上樑文)'이 나와 미황사의 부족한 일기를 채워주었다.
원래 단청이 칠해져 있었으나 장대한 세월이 색을 모두 거둬가면서 단청이 말라버렸으며, 그
로 인해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 중후하고 고색이 깊어 보인다.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이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대동하며 앉아있으며, 천장은 우물천
장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태인데 범어(梵語)로 쓰인 글자와 일천불 벽화가 새겨져 있
어 소소하게 장관을 이룬다. 게다가 천불이 그려져 있다 보니 대웅전에서
3배를 올리면 1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불에게 3배를 했기 때문에 3,000배를 올린 것과 같다고 함, 이
런 기적의 논리도 있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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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절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와 반야용선
(般若龍船)을 상징한다고 하며, 괘불재의 주인
공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괘불이 담긴 괘불
함이 대웅전에 들어있다. (보관장소는 변경될
수 있음)
건물을 받치는 주춧돌 중 앞면 4개와 옆면 2개
는 연꽃무늬와 자라, 게 등이 조각된 돌을 사
용했으며, 나머지는 자연석 그대로를 가져와
붙였다. |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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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전남 유형문화유산 323호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넓적한 얼굴이 다들 후덕해 보인다. 그들 뒤로 색채가
강한 후불탱이 걸려있으며, 그 위에 색이 조금 바랜 닫집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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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까지 알뜰하게 꾸며진 대웅전 우물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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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대들보에 그려진 천불
대들보에 불상이 그려진 것은 여기서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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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신중탱
법당 수호용 그림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가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색이 조금 바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건 그림 밑 화기(畵記)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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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명부전(冥府殿) |
대웅전 옆구리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인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내부에 봉안된 시왕상(十王像)은 윤선도(尹善道
)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윤두서는 아들이 없어 애를 태우던 중, 절 근처의 은행나무를 베어 시왕상을 조성해 절에
봉
안했다. 그랬더니만 그 정성이 명부전 식구들을 울렸는지 무려 10명의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4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 그의 4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고 한다. 우연인지 그럴싸하게 이어 붙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윤두서의 정성이
담긴 건물임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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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 전남 유형문화유산
324호 |
불이 이글거리는 듯한 광배(光背)를 지닌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
존자(道明尊者). 시왕상, 판관, 녹사, 금강역사 등이 명부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이들 36
구는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이들은 '미황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남 유형문화유
산 324호로 지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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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부전 시왕상과 판관, 녹사, 금강역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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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응진당(應眞堂) - 보물 1183호 |
대웅전 뒤쪽에는 석가여래와
16나한(羅漢)의 거처인 응진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집으로 지붕 처마의 선이 마치 하늘로 훨훨 날라갈 듯 아주 시원스럽다.
대웅전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1751년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으며, 2001년 보수공사를 하였
다.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선필의 경지를
보일 정도로 우수하며, 기둥 윗
부분에 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경내에서 가
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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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진당 목조석가여래3존상과 나한상 |
응진당에는 석가여래삼존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사자상, 동자상 등 18세기 중기에 조성된 26
구의 조각상이 있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묶어 '미황사 응진당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남 유형문화유산 325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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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응진당 식구들 (16나한상과 인왕상,
사자상, 동자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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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삼성각(三聖閣) |
명부전 뒤쪽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인 삼성각이 있다. 산신탱
과 칠성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탱은 1943년 인근의 송지면 대죽리에 살던 김사숙
일가가 시주하여 만든 것이며, 독성탱과 칠성탱은 같은 해에 완도읍에 살던 이유복, 장순복이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시주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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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 경내에서 바라본 달마산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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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황사를 나오며~~~ (계단 너머에 자하루가 있음) |
미황사 구경은 생각보다 좀
일찍 끝났다. 부도군(浮屠群)과 사적비 등 놓친 것이 여럿 있으나
그리 당기지는 않았으며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괘불을 빼고 모두 친견했으니 크게 아쉬움은
없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겨버리면 그만이다. 허나 미황사 괘불재가 은근히
구미가 당겨 괘불재 기간에 맞춰서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을 계획이다. (어디까지나 계획임,
실천 확률은 장담 못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