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둥이와 함께 보낸 지상의 마지막 밤
박기현|묘지번호 1-08
이름 박기현 묘지번호 1-08
생년월일 1966년 2월 8일 직업 학생(동신중학교 3년)
사망일시 1980년 5월 20일
사망장소 계림극장 밑 동문다리
사망원인 머리 타박상
증언자 이정애(어머니)
부산에 시집가서 살고 있는 누나가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딸의 산후수발을 위해 그곳에 가 계셨다.
곁에서 챙겨주어도 엄마가 보고 싶은 중학생 기현이는 부산으로 전화했다.
수학여행을 가야 한다고. 갓난아이의 삼칠일도 지나고 해서 어머니는 기현의 여행 준비를 위해 광주로 오셨다.
무엇보다 한참이나 보지 못한 늦둥이 기현이 보고 싶었다.
그 날 밤 어머니는 기현이와 함께 누워 잠이 들었다.
그 밤이 두 사람이 함께 잠들 수 있는 지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날 기현은 수학여행을 가고 어머니는 대전으로 향했다.
기현의 이모가 병원에 입원해 돌보아야 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올 날짜에 맞추어 어머니는 다시 광주로 올 계획이었다.
5월 20일, 어머니는 광주로 올라오는 버스를 탔어야 했다.
그런데, 차를 타지 못했고, 다음날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1일 아침, 광주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기현이 엄마, 기현이가 어지께 저녁에 나갔는디 아직 안 들어오고 있당게. 시방 광주서는 데모를 하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막 잡아다 죽인당게. 겁나 위험헌디 기현이가 안들어온당게. 기현이 아부지가 어지께 밤새 찾았는디, 아직 못 찾었어. 얼릉 와야 쓰겄네.
기현이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날 집을 나갔다.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기현을 보는 아버지는 새삼스러웠다.
어린 자식의 오밀조밀한 마음을 받는 것이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로 정겨웠다.
기현이는 심심했다. 기다리는 엄마는 오시지 않고,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여운이 남아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나마 보고 있던 TV마저 중단되었다.
문화방송이 불타고 KBS방송국도 분노한 시민들의 응징에 불태워지는 바람에 통에 방송이 중단되었다.
시민들은 골목골목 몰려나와 불타는 방송국을 바라보며 환호했다.
마음이 들쭉날쭉 좀이 쑤시던 기현이도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에만 있으라고 하시니 괜히 심술이 나기도 했다.
아버지가 끓여준 라면을 먹으면서 국물이 너무 많다는 둥 투정을 부리던 그는
결국 책을 사와야 한다면서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그런데 계림동 책방에서 책을 한 권 사 가지고 나오는 순간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계엄군 두어명이 막 자전거를 타려는 어린 기현이를 낚아채 끌었다.
왜 그러세요? 저는 중학생이에요. 동신중학교 3학년이에요. 왜 그러세요?
너,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데모꾼들 연락해주고 다니지? 너 연락병이지?
아니에요. 저는 중학생이에요.
그러나 소용없는 항변이었다.
육중한 진압봉이 기현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야윈 몸의 기현이는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스르르 쓰러졌다.
이미 쓰러진 아이에게까지 계엄군의 방망이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끌고 가버렸다.
어둠 속에서 중학생 아이가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는 걸 지켜보며
가슴만 치던 아주머니들이 있었지만 나서지 못했다.
그들의 잔악성을 익히 보고 들었던 그들로서는 차마 말릴 용기가 없었다.
아버지가 찾아 헤맸지만 기현이는 시내 어디에도 없었다.
밖이 소란해도 집에 꼭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기현이는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를 갔기에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
어머니는 바로 짐을 꾸렸다. 그런데 고속버스는 광주까지 닿지 않았다.
장성 어디쯤에 내려, 버스기사가 일러주는 역을 찾아갔다.
통제하는 군인에게 통사정을 했다.
광주에 사는데 아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제발 기차에 타게 해주라.
그러고는 송정역에 도착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상무대에서 막혔다.
정신이 없던 어머니는 신발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맨발로 군인들을 피해 험한 길을 걸었다.
발바닥이 돌에 긁히고 유리가 박혀 피가 흘러도 알지 못했다.
한나절이나 걸려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썰렁하기만 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기현이의 책만 펄럭이고 있었다. 이웃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어지께 방송국이 타부렀는디, 그놈 구경한다고 나간 것 같으네.
그놈들이 아무리 그악하기로서니, 기현이가 아직 애긴디 설마 뭔 일이야 있겄소. 금방 들어올 것인게 지달려 봅시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현이는 돌아오지 않고, 밤이 되어서 남편이 들어왔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렸다.
남편은 길에 받쳐 있는 자전거만 보아도 아들이 어디 들어가 있나 싶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단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아이만 보이면 무조건 붙잡아 세우고 보았단다.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는 하루 종일 주린 배로 아들을 찾아다니다 돌아왔던 것이다.
다음날, 큰집과 작은집 식구 할 것 없이 새벽 같이 기현이를 찾아 나섰다.
기현이 같은데, 전대병원으로 들쳐 업고 들어가더라
하는 아는 사람의 언질에 어머니는 전대병원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남편이 있었다. 그리고 얼굴만 천으로 가려진 기현이의 교복바지가 보였다.
기현이의 시체 위에는
박기-라고 쓰인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소진되어가는 마지막 숨을 다해 기현이가 알려준 자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가려진 천을 들쳐 낸 어머니는 기현이를 확인하는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다.
쓰러진 아내를 옆에 두고, 아버지는 아들의 관을 준비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내가 깨어나면, 가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려고 입관하지 않은 채.
기현이는 그렇게 망월동으로 향했다.
여름에 입으려고 맞춰 놓고 아직 입어보지 못한 여름교복을 깨끗이 차려 입고,
뒤에 남은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을 노자 삼아 떠나고 말았다.
누나와 형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어린 것 혼자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기현이가 죽었는데 서울에 있는 큰아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학교의 소개로 서울로 가 직장에 다니던 큰아들은 한동안 연락이 안 되었다.
큰아들에게까지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늙은 부모는 애간장이 다 녹았다.
다행히 큰 아들은 기현이가 가고 보름 남짓 지나서 내려왔다.
기현이가 죽은 뒤로, 집 앞에서 진을 치고 떠나지 않는 미운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자식이 죽었는데,
또 누굴 잡아가겠다고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감시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다 못해 나가 따지기라도 하면
시켜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만 할 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을 못 이긴 큰아들이 그들과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부모의 가슴은 다시 오그라들었다.
중학생도 죽였는데, 무슨 짓을 한다한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식을 한번 잃어본 부모는 분하지만 큰아들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은 곧 군대를 가고,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는 부산 딸네로 갔다.
아버지는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아들을 앗아간 이들에게 분을 토하며 고된 나날을 보냈다.
짐만 쌓아두고 살림을 하지 않은지 오래된 집에 혼자 들어가 고달픈 잠을 청하면서도 가족들의 그만두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 기현이 죽인 놈들 내 다 죽여야 한다. 이대로는 그냥 못 있는다.
아버지는 유족회 재무를 맡아 열심히 활동했다.
가슴에는 온통 죽은 아들 기현이 생각뿐이었다.
시위에 나갔다가 쫓겨 다니고,
날아든 독한 최루탄을 마셔가며,
매를 맞아가며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서울에서고, 어디서고 경찰서에 붙들려 가는 횟수가 집에 들어가는 횟수보다 많았다. 그
러면서도 아내에게는 당신의 고단한 날들을 다 털어놓지 못했다.
건강하지 못하기는 아내도 마찬가지기에 혼자서 짐을 떠안았다.
결국 가슴의 멍은 아버지에게 병을 주었다.
뇌출혈로 쓰러져 5년간을 고생하시다 1990년에 떠나셨다.
막내를 기억할 수 있는 무엇도 손에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짓던 아버지는
추억하는 것에 지쳐 당신이 직접 아들을 찾아 떠나셨다.
아버지가 가신 몇 해 후에 기현이는 신묘역으로 옮겨졌다.
이장하기 위해 꺼낸 아들의 유골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설레었다.
살아있는 아들집을 방문한 듯한 기쁨이 잠시 지났다.
그러고는 기쁨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이 짓눌렀다.
해골이 없었다. 교복 안에 다리뼈는 그대로 있는데,
머리뼈는 부수어져서 가루로만 남아 있었다.
처음 아들의 시신을 보았을 때는 그 지경까지인 줄 몰랐다.
피 한 방울 없어도, 온통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는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보고
많이 맞은 줄은 알았지만 뼈가 온통 다 바서지도록 몰매를 맞은 줄은 몰랐다.
그 모진 매를 맞으며 죽어갔을 아들을 생각하니
그 날에 느꼈을 그 고통이 그대로 어머니의 가슴으로 전해오는 듯 가슴언저리가 저리도록 아팠다.
아들을 잃은 지 20년, 남편까지 떠나보내고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간은 유수처럼 잘도 흘러간다. 가슴에 드리워진 그늘을 한 꺼풀도 벗겨주지 않고 세월은 그저 흘렀다.
가슴에 담은 아들의 기억만으로 견디기에 그 동안의 세월이 너무 길다.
기현이의 일기라도, 상장이라도 그대로 둘 것을 왜 그리 서둘러 불태워버렸는지 어머니는 회한이 남는다.
기현이는 1학년 때부터 우등생들이 받는 금배지를 한 번도 내주지 않고 줄곧 가슴에 달고 다녔다.
상장을 불태울 때 다른 유족들이
아까운 아이가 갔다면서 안타까워했을 만큼 기현이는 재능이 많았다.
기현이의 소식을 듣고, 기현이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제는 추억하고 싶어진다. 눈물이 흘러도 좋고, 가슴이 아파도 좋다.
아들을 추억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다 가지고 싶다.
세월 따라 옛 일들은 희미해져 가는데,
그리움은 어쩌자고 커져만 가는지 어머니는 오늘도 죽은 아들의 희미해진 일상을 더듬더듬 짚어 가신다.
그러다 웃음이 나면 웃고, 눈물이 나면 운다.
첫댓글 동신중학교 3학년....그것도 매맞아 죽어야하다니... ---- 그리움은 어쩌자고 커져만 가는지 어머니는 오늘도 죽은 아들의 희미해진 일상을 더듬더듬 짚어 가신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이렇게 억울하고 가슴이 미어지는데....그 어머니맘은 감히 짐작이나 하겠습니까?...어린 자식이 그렇게 고통속에서 간걸 알고 어머니 맘이 어땠을지...눈물만 앞을 가리네요...
정말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되는데 시간이 흘렀다는 핑계로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고 살았네요. 언제나 기억하고 기현이는 항상 우리들 맘속에 살아 있을 겁니다
도대체 김대중은 왜 전두환노태우를 사면시켜줍겁니까? 왜 .... 누가 용서하고 누가 사과했나요?
고인에 명복을 빌고 빌고 또 빕니다 ..... 있을수 없는일에..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한창 꿈을 키워야할 중3의 나이에 그토록 처절하게 죽여야만 했을까~~~도대체 누굴위해~~왜~왜~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