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 金鳳秀 (1901 ~ 미상)】 "광복군총영 별동대 유격전, 항일 무장투쟁의 귀재"
1901년 12월 29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수동(靑水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봉수(金鳳秀)이다. 청수동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을 역임한 오동진(吳東振)의 고향이기도 하다. 압록강과 접해 있는 마을로 강만 건너면 남만주의 콴뎬현(寬甸縣)이었다.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이 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27년 중반 정의부(正義府) 의용군 제5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 남만주의 광대한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1924년 11월 24일 성립된 군정부(軍政府)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입법·사법·행정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한인들의 생계·교육·자치 등에 힘쓰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부원이 된 뒤 별동대를 조직해 수많은 국내 진입 유격전을 지휘한 이진무(李振武)를 만났다. 이진무는 애꾸눈에 단신이었으나 1920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시기부터 자신이 선발한 인물들로 별동대를 조직해 유격전을 펼쳐 일제에게 큰 타격을 입힌 항일 무장투쟁의 귀재였다.
1927년 (음)5월경 홍학순(洪學淳, 이명 홍학원(洪學元))·김성숙(金聖淑)·김치복(金致福)·이원진(李元珍)·장기천(張基千) 등과 함께 이진무 별동대의 일원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하였다. 별동대는 인원을 두 조로 나누었다. 대장 이진무와 김성숙·김치복이 1조가 되었고, 나머지 대원들이 2조가 되었다.
김봉수 공판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9.9.12) [판형2] |
7월 20일 다른 2조 대원들과 함께 의주군 가산면(加山面) 방산동(方山洞) 계용수(桂龍守) 집에 들어가 장남 계승호(桂承浩)를 데리고 동리에서 악질로 소문난 삼림감수원(森林監守員) 강영화(姜榮化)를 찾아갔다. 별동대 2조는 그의 만행을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한 뒤 강영화와 계승호를 총살하였다. 그리고 부호인 김시명(金時明)과 황운기(黃雲起)에게 100원씩의 군자금을 갹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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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이진무 조는 7월 24일 평북 구성군(龜城郡) 관서면(舘西面) 조악동(造岳洞)으로 가, 조악경찰관 출장소를 기습 공격해 일본인 순사 시게 타메요시(重爲好)를 처단하였다. 8월 18일 정주군(定州郡) 옥천면(玉川面) 월옥동(月玉洞)에 있는 여인숙에서 투숙객 20여 명에게 410원과 패물을 군자금으로 모금하였다. 이어 이진무 조는 같은 군의 이현면(梨峴面)·천마면(天摩面) 등을 옮겨 다니며 수백 원의 군자금을 모금해 귀대하였다.
가산면에서 활동하던 2조도 8월 18일 의주읍내로 옮겼다. 오후 2시경 먼저 홍학순과 이원진이 한 조를 이루어 용만금융조합(龍灣金融組合)을 습격하여 조합 이사(理事)를 위협해 현금 980여 원을 모금하였다. 이때 장기천과 다른 조를 이루어 금융조합에서 약간 떨어진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공격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식산은행 의주지점에 들어서려는 순간 금융조합 쪽에서 총성이 울렸고, 주변에 있던 일제 경찰이 순식간에 몰려와 습격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제 경찰이 몰려오자 별동대 2조는 빠른 시간 내에 의주읍내를 빠져 나갔다. 이어 최성춘(崔成椿)·박세화(朴世和) 등 정의부 국내 조직원들의 지원을 받아 농민으로 변장해 본부로 돌아가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의주뿐만 아니라 평북 지역의 경찰력을 총동원해 공격을 펼친 감시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1929년 6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 살인 혐의로 징역 13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29년 9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를 취하하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