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광륭사(廣隆寺)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은 뛰어난 조각미를 보여 불교미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특히 그 자세나 분위기가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자비로운 모습이어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언제 어느 나라에서 조각된 것일까.
그 동안 일본학자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광륭사로 수학여행을 왔던 한 일본학생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불상을 안게 됐고, 학생의 실수로 불상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면서 일본 국보 1호 불상이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됐다. 그 동안 이 불상이 어떤 나무로 됐는지를 알 수 없었으나 부러진 새끼손가락의 내부를 분석한 결과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경상도 지방에 서식하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 것. 더욱이 일본 아스카 시대의 조각상들이 대부분 녹나무(樟木)인데 비해 반가사유상은 붉은 색 소나무이기에 이 불상이 한국에서 건너온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준 근거가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목조반가사유상을 만든 장인이 삼국시대 사람임이 분명해졌지만 백제, 신라 중 어떤 나라의 사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과 조각양식이 매우 흡사해 이 두 불상의 하나는 원상(原像)이며 다른 하나는 모방작일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었다. 따라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국을 알아내는 것은 일본 목조 불상의 제작국을 알아내는 단서.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대에 제작된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에 대해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해왔다.
이 두 불상에 대한 연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30년대. 한국 불교미술사학의 개척자였던 고유섭 선생은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1931)에서 두 반가상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면서 국보 83호와 국보 78호의 시대적 전후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일본 광륭사 불상과 같은 시기인 600년 전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유섭 선생은 제작국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 들면서 일본학계에서는 반가사유상은 모두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다.
이는 일찍이 △반가사유상이 경주 오릉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설과 △신라 화랑도의 집단이 미륵신앙을 신봉했기 때문에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반가사유상을 많이 제작했을 것이라는 설 △신라 제작이 확실한 석조반가사유상이 봉화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 동안 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정설화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68년 일본 학자 송원삼랑(松原三郞)은 「조선 삼국기의 불상」(미술사 68)에서 83호를 백제, 78호를 신라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83호 불상의 우아한 표정과 전체의 부드러움이 백제와 교류가 잦았던 중국 남조양식의 계보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백제는 인접한 중국과 일찍부터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불상제작기술이 앞섰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 국보 1호 불상도 백제의 장인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해졌다.
이에 대해 황수영 박사는 『한국문화사대계』4 (1970년)에서 삼국시대 미륵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곳이 신라이기 때문에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불상인 반가사유상 역시 신라인들에 의해 제작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홍익대 김리나 교수와 동국대 문명대 교수도 일본 광륭사의 창시자가 신라계 인물이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두 반가사유상 모두 신라의 작품이라고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는 「금동삼산관사유상고(金銅三山冠思惟像攷)」(미술자료22, 1978)에서 “제작 배경과 성격, 양식 변천을 분석하고 중국과 일본 불상들을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면 국보 83호 반가상의 제작국은 백제”라고 반박했다. 이는 당대의 한중일 불교문화 교류의 시대적 배경과 백제, 신라의 조각 기술을 검토하면 신라 장인의 솜씨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국보 불상이 한국에서 전래됐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제작국이 백제인지, 신라인지는 명백하지는 않지만 반가사유상의 인상, 옷 주름, 조각기법 등을 종합할 때 신라 제작설이 한발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권오영/법보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