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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해 아래의 인생, 해 위의 인생(김요셉)
[전1:2-3]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욥기 1장부터 보면 마귀란 놈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여있는 거기에 찾아와 가지고 욥을 헐뜯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칭찬을 하시는데 이렇게 욥에 대해서 안 좋게 얘기를 하니까 <그럼 너 한번 해봐라> 이렇게 해서 욥의 엄청난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해서 재산 다 잃어버리고 자녀들이 10남매가 다 죽고 이런 참 불행한 일들이 이렇게 생겼는데 욥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욥의 세 친구들이 와가지고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느냐, 세상에 죄 짓지 않고도 망한 사람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에게 이런 재난이 닥쳤다고 하는 거는 배후에 반드시 죄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죄를 찾아서 회개해라> 하고 촉구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엘리바스라고 하는 친구가 그렇게 말하고 빌닷이라고 하는 친구는 나와 가지고서 <네가 죄가 없다고 자꾸 그러는데 그러면 네 자식들이라도 죄를 짓지 않았겠느냐. 그러니까 자식들의 죄를 회개해야 된다.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 이것도 얼마나 큰 죄냐> 하고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지만, 그것도 욥이 생각해볼 때는 자기에게 합당치가 않은 얘기예요. 그래서 자기는 <죄가 없다. 나는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 내가 얼마나 더 깨끗하냐?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 이렇게 잘못됐다고 하는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나보다도 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이런 지경까지 나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세 친구들이 죄를 추궁하고 그다음에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조목조목 따지면서 <이거는 욥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왜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크신 분이다. 우리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이 옳다 그르다 이런 판단을 내리고 정죄하고 뭐 시비를 걸고 이렇게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어마어마한 일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밖에는 할 것이 없는 거다> 하면서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변론을 하고 이 세 친구들이 욥의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욥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한 거에 대해서 <이건 너희들이 잘못된 거다> 하고 또 책망을 하고 이렇게 합니다.
둘째 나오는 책이 잠언이라고 하는 책인데 잠언은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지혜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우리가 행한 대로 거둔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그래서 선을 행해라 인간이 가장 많이 유혹받는 게 무엇이냐? 먼저 부모의 그 교훈을 잘 새기고 지켜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런 말로 시작을 해가지고 인간이 가장 많이 유혹을 받고 타락하는 것이 이제 음욕, 여자 문제다 이래 가지고 이런 거를 다 조심히 살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지혜를 구하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 입술을 지켜야 된다, 말과 행동을 다 조심해야 된다, 이런 거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 책은 그런대로 이해하기가 쉬운 책입니다.
지혜문학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있는 책이 이 전도서라고 하는 책이에요. 근데 전도서는 솔로몬이 이거를 썼다 가르치지 않고 전도자가 가로되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전도자라는 게 뭐냐, 전도서라고 하는 건, 히브리 말로 코헬렛이라고 그랬는데 코헬렛이라는 말이 대관절 무슨 뜻이냐. 영어 성경들을 보면 하나는 Teacher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T자를 소문자 t자로 쓰지 않고 대문자를 썼어요. 일반 세상 스승들과는 다른 그러한 참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이게 솔로몬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솔로몬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인생의 지혜를 설명하고 있는 거라 말이죠. 킹제임스는 그렇게 설명하고 NIV 성경은 preache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설교자가 가로되 그러니까 이게 설교자의 책이고 또 스승의 책이다. 지혜서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이런 책이다.
그런데 책에서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게 뭐냐? 이것이 오늘 읽은 2절과 3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 라고 하는 말을 5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킹 제임스 성경에서 vanity 헛되다는 말을 5번이나 이렇게 쓰고 있어요. NIV 성경은 Meaningless 의미가 없다 이 말을 세 번을 겹쳐서 쓰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이라는 게 뭐냐? 허무한 거다. 그러니까 지혜는 뭐냐? 인생이 헛되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지혜가 출발한다고 하는 거죠.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허무하지 않은 것이 뭐냐를 차지해야 될 거 아니에요. 이것이 지혜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 첫 단계가 뭐냐 그건 인생은 허무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전도서가 말하는 지혜라는 건 뭐냐? 인생의 허물을 깨달아라.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장 16절의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은 자연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 자연 만물이 돌아가는 걸 보면서 이것을 돌리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그랬으니까 볼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래야 되는데 이 자연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 이런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자 이것이 이제 전도서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이 세상 것에 마음 뺏기지 말고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게 많으면 좋은 게 아니다. 그런 거 다 버려라. 솔로몬처럼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말년이 되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니까 그 모든 것이 헛되다 말이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은 헛된거라> 그래서 그거를 뭐라고 표현했느냐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다>
해 아래에 사는 모든 수고가 헛되면 헛되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헛되지 않은 게 뭐가 있습니까? 이게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12장에 맨 끝에 가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그러므로 어떻게 해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마지막 절은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선악간에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이것을 기억해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도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십계명 가운데 아홉째 계명이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하는 말씀이에요. 재판석에서 판사 앞에 가서 증인으로 증언을 하는데 증언을 바른대로 그대로 해야지 거짓말을 하지 마라. 거짓말을 하는 건 곧 무슨 의도가 있는 거죠.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는 원고가 있고 피고가 있는데,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하고 말씀했는데 근래에 와서 내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것, 9계명에 그런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우리 하나님 앞에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지혜서의 마지막 책인 이 전도서는 첫째가 허무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라. 그러면 그것을 이겨나가는 길이 무엇이냐? 예수님만이 오셔서 이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잖아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라.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둘로 나눠서 설명한다면, 첫째는 위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라, 이것이 헛되지 않은 세상이다> 그 말이죠. 그리고 둘째계명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이렇게 사랑하면 거기에는 헛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해 아래에서 사는 인생이 되지 말고 해 위에서 사는 인생이 되자. 해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에요. 해 위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살아야 된다 그런 말입니다. 육신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신을 따라서 사는 사람 되지 말고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으로 살아가는 거냐? 죽은 영을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야 내 영을 살려냅니다. 내영을 살려내면 내 몸이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된다 말이죠. 육신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우리가 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허무를 느끼면 결국 죽음을 택합니다. 무엇이 허무하지 않은 거냐? 하나님 잘 섬기면 허무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허무하지 않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허무하지가 않다. 왜 내가 살아야 되는지, 죽음의 삶의 의미를 모르면 죽음을 찬미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생명으로 가는 거고, 근데 생명이 어디 있냐? 이것이 천국, 해 위에 있는 세상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우리는 해 아래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탐내고 세상의 쾌락을 찾지 말고 우리는 이거 다 내던져 버리고 저 해 위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자.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바라보면서 살자.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자.
하나님이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면 우리는 해 아래에서 사는 인생이 되지 아니하고 해 위에서 사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보람이 없는 헛된 세상에 사는 인생이 아니고 우리는 보람이 있고 헛되지 않은 보람을 갖춘 그러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것이 이 전도서가 지혜서가 가르쳐주는 참 지혜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혜서의 마지막 책인 전도서를 통해서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우리는 헛되지 않은 길을 찾아가자. 영원한 행복을 찾고 참 생명을 찾고 잃어버렸던 낙원을 찾아가고, 낙원보다 더 좋은 천국을 찾아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의 세계를 보는 사람
[왕하 6:14-19]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열왕기하 5장에서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고친 이야기가 나오죠. 많은 세월이 흘러 나아만 장군이 세상 떠나고 아람이 다시 이스라엘에 쳐들어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에 쳐들어가기만 하면 이스라엘 왕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길목에 딱 이스라엘 군사들이 지키고 매복해 있다가 쳐서 침략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화가 나 대신들을 모아놓고 야단을 칩니다. 그 중에 똑똑한 신하 하나가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왕의 침실에서 하는 이야기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쳐들어가려고만 하면 벌써 작전 계획을 다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어디로 들어오는지를 다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가 도무지 쳐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람 왕이 그 말을 듣고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다가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제거해버리면 우리가 쳐들어갈 수가 있겠구나>
아람 왕은 엘리사에게는 군대가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만만히 보고 엘리사를 잡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엘리사는 <아랍 왕이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계획을 세우든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친히 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라야 되느냐? 선지자는 영안이 열려진 사람입니다. 적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성을 뺑뺑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옵니다. 이제 곧 엘리사는 꼼짝없이 독안에 든 쥐가 됐죠. 그래가지고 꼼짝없이 잡히게 생겼습니다. 이 사환이 새벽에 바깥에 나가보고서는 깜짝 놀랍니다. 적군이 완전히 포위해가지고 포위망을 좁혀들고 있으니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뛰어들어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보면은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까> 그런데 우리 같으면 그럴 거예요. <대체 무슨 일 있느냐? 너 왜 그러느냐?> 그럴 텐데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이 사환이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태연하게 대답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세상에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죠. 이 사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하고 함께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이에요. 대관절 그의 눈에는 적군들만 보이는데, 우리하고 함께한 자는 당신하고 나하고 둘밖에 더 있습니까? 대관절 누가 있단 말입니까? 나보고 혼자 나가서 저놈들을 다 물리치라고 하는 겁니까?> 아마 이렇게 서운한 생각도 들었을 거고 절망이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니까 적군들이 저 바깥에 뺑뺑 포위하고 있지만, 이 안에는 그들보다도 더 많은 하늘의 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하고 지키고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누구냐? 세상에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적군들밖에는 안 보여요. 육신의 사람들밖에는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영의 사람들을 봅니다. 영의 천사들을 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첫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또 하나님을 친히 본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한 치도 착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서 자신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또 음성을 들려주기도 하시고 그래서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꼭 해야 하겠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라>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이 <너 하나님 만나봤느냐?> 하고 묻죠. <네가 예수님을 만나봤느냐?> 이렇게 물을 때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되는데 이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자신 있게 힘있게 예수님을 전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말씀하죠. 또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그럽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는 자여> 한 번 더 하고서 그다음에 뭐라고 하는 가요? 외쳐야 될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쳐줘요.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라~> 이거 외치라는 거예요. 다른 거 외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눈이 열려야 할 것인가. 첫째는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돼요. 그래야 천국을 가르치고 지옥을 가르치죠. 지옥도 보면 좋겠는데 사실 지옥은 안 봐도 좋아요. 천국을 잘 보는 사람이 돼야지 지옥만 보고 천국은 못 본다? 이거 큰일 난 겁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을 봐야 되겠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 또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천국도 보고 지옥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 나중에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가서만 심판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죄 짓는 사람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지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단 말이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줄 아는 사람 돼야죠. 또 한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성경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금 마지막 때가 되니까요. 이제는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요. 그래서 일반 책들도 보지 않는데 더구나 성경책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성경책은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너무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돼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여 내 눈을 열어서 성경을 볼 수 있게 하시옵소서,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말씀의 놀라운 세계에 들어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무엇을 또 봐야 되느냐? 자기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죠. 베드로도 처음에는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지만, 고기잡이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런 기적을 체험하게 되니까 드디어 자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폭 꼬꾸라지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으로소이다>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 사울이라고 이름하던 젊은 때에는 그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하는 일에 앞장서서 이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녔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살펴볼 줄 알고 자기를 보았더니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큰 죄인이 없구나. 내가 죄인 중에도 괴수로다>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 겸손해집니다. 우리는 신령한 눈이 열려져서 멀리 죽은 후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신령한 눈이 열려질 수 있을까? 옛날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 때에는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실 때 그의 음성만 들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니까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볼 수도 없게 됐고, 이렇게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답답한 인간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신명기 29장 4절 말씀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세요. <이 백성들이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은 아직 받지를 못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귀가 열려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이 놀라운 세계가 이루어지는 큰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이 열어주십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어야죠.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읽지만 말고 <하나님 깨닫게 해주세요. 이 말씀의 뜻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의협심이 불타는 사람
출애굽기 2장 11절-20절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장 11절에서 20절 말씀을 보면 모세에게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가 왕궁에서 왕자로 호화롭게 살아가다가 자기 백성 히브리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려고 그들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곳에 가 봤더니 애굽 사람 하나가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죠.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함부로 이렇게 대하는 거기에 분노가 일어나고 의협심이 일어나서 한방 쳐버렸는데 애굽 사람이 얻어맞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튿날 모세는 그 자리에 또 나가 봤어요. 그날은 히브리 사람들끼리 둘이서 싸우는 거를 보고서 화가 나가지고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너희가 어째서 동포를 치느냐> 그중 한 사람이 <어제는 네가 애굽 사람 하나 때려죽이더니 오늘은 또 우리를 쳐죽이려고 왔느냐> 이렇게 항의를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사람 쳐죽인 거 탄로가 났단 말이죠. 그래서 놀라 도망을 쳐 멀리 미디안 땅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첫째 이야기고.
미디안 땅에 갔는데 목이 말라서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여자 목자들이 와서 물 한 모금 얻어먹고 있었죠.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남자 목자 녀석들이 와서 여자들을 밀쳐내고 지네들 먼저 먹이겠다고 하니까 여자들은 힘이 없으니까 어떡하겠어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데 모세가 이거를 보니까 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이래서 남자들을 야단치고 여자들이 먼저 짐승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랬더니 여자들이 모세에게 우리 집에 가십시다. 그래갖고 모시고 집에 왔더니 집에서 아버지가 있다가 <오늘은 너희들이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느냐> 그러니까는 그날 하루만 그런 일이 생긴 게 아니고 그전에도 계속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자들에게 당하고 꼼짝 못 하고 살았는데 이날은 모세가 도와줬기 때문에 짐승들에게 물을 다 빨리 먹이고 집으로 일찍 들어올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느냐, 불의한 일을 볼 때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을 쓰신다. 이 세상에는 불의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일이 일어날 때 이것에 대해서 반항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느냐,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의욕심에 불타는 사람, 목숨 걸고 의욕심을 가지고 불의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것을 보실 때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불의 안 보고 꼴 보기 싫다고 나도 모르겠다고 피해서 어디로 도망가고 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것에 항거해서 싸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되는 것이고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의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으로 죽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이 제목 의심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이 내용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심이 불타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게 교육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누가 훌륭한 선생님이냐. 의롭게 살아야 하는 걸 자꾸 가르쳐야 된다. 돈 많이 버는 법,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서 나쁜 짓 적당히 하고도 걸리지 않고 잘 살아가는 법 이런 거 가르치는 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 우리는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고난을 감수하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이것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어야 돼요. 우리 역사상에 나타난 훌륭한 분들, 한국에도 훌륭한 분들이 수없이 많고요. 외국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분들의 이야기 책을 많이 읽으면서 우리 마음이 의로운 마음으로 불타오르도록 어린아이 마음에서부터 이렇게 하도록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고 그렇게 길러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룻밤에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죠. 이거 우리 크리스천들이 도둑질하면 안 된다 하는 거를 배웠고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어려서부터 위인전 같은 거를 읽으면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어려서 우리 초등학교부터 선생님들이 애들 가르치는 이 교육이 중요하고요. 집안에서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들을 가르치는 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됩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에서 선생님들한테 또는 목사님들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아가지고 우리는 절대로 남의 것 훔치면 안 되고 탐내도 안 되고, 우리는 그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찾아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 한다. 이것을 어려서부터 잘 자꾸 주입시키고 이것이 훈련되면 나중에 성인이 돼서도 우리는 절대로 남의 것 허탐하지 아니하고 남의 걸 훔치지 아니하고 길에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그거 내가 가져가려고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어려움 당한 사람, 잃어버린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도와줄 수 있는 이런 사람으로 변화받아야 되는데, 이것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불의한 것을 보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의로운 것을 볼 때에 자기 몸을 바쳐서 이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이런 사람으로 우리가 장성해 나가야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이런 사람을 보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에 이 세상 전도 선교지에 직접 나가보면 가난한 사람들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이렇게 남의 것을 탐내고 도둑질하고 그런 게 많습니까? 그런 속에 우리가 이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이런 짓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 받는다. 내가 나쁜 마음만 먹어도 이것도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정신을 아주 마음속에 깊이 새겨 넣어야지 우리가 바르게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땅을 새롭게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의 것을 뺏어서 내 것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좋은 것을 채워주신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늘 기도에 힘쓰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지만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러한 분들을 높이 들어 쓰신 것을 배우면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사모하면서 주여 나를 써주세요. 나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밝아지게 하시옵소서. 내가 이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에 쓰임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진실하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탄생
이사야 11장1절~2절
1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사야서에는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탄생하실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가장 큰 특징은 아기로 오신다, 아기로 태어나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 말씀이 7장, 9장, 11장 이렇게 한 장씩 띄어서 나타납니다. 7장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이죠. 7장 14절 <하나님께서 한 징조를 보여주시는데 이게 무슨 징조냐, 이분이 바로 이 아기가 바로 메시아다>라는 징조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주위에서 잘 살펴보면 이분이 메시아로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징조가 뭡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이 첫째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다, 결혼하지 아니한 숫처녀가 아들을 잉태하여 낳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죠.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제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왜 이 메시아가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시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무슨 얘기입니까? 이 아기로 태어난 그분이 바로 누구? 그분이 하나님이시란 말이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했는데 이사야 7장 14절에 <메시아가 오시므로 메시아의 이름이 임마누엘 곧 우리 사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장에서는 동방박사들이 또 동방이 어느 나라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하여튼 먼 나라에서부터 하늘의 별을 보고 <유대 땅에 메시아가 나셨다, 왕이 나셨다> 하는 거를 알고 먼 길을 산 물 건너 그리고 많은 위험이 있을 텐데도 이거를 무릅쓰고 아기를, 왕을 만나보기 위해서 유대 땅까지 찾아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하고 물어서 온 성안이 소동스럽게 되지 않았습니까?
첫째 증거는 7장 14절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이 함께 계신 것이 누가복음 2장 하늘에 천군 천사들이 나타나 가지고 찬양을 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노래를 했고요. 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하나의 소식을 전하는데 어떤 소식이냐, 온 백성에게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그래서 이 메시아가 오신 소식이 이렇게 엄청나게 기쁜 소식인데 그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게 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해라 그랬죠. 예수라는 이름과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같은 뜻입니다. 예수는 무슨 뜻이에요. <예수는 구원이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뭐냐? 구원이란 아주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체험하면서 사는 거예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 주셨구나,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주셨구나> 우리가 날마다 시간마다 느끼면서 살아야 돼요. 이런 임마누엘이 이루어진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이 사실입니다. 임마누엘이 나에게 이루어졌느냐 안 이루어져 임마누엘이 되었으면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늘 느껴 그러면서 오늘도 이 시간도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구나, 거기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7장 14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거예요.
다둘째, 이 아기로 태어나실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말씀이 9장 6절이죠. 우리에게 징조로 한 아들을 주신다고 그랬어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난다고 말씀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는 9장 6절에 아기의 이름을 쭉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먼저 설명하는 게 <이 아기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정사가 대관절 뭐냐. 영어 성경으로 보니 가버먼트라고 그랬어요. 정부를 어깨에다가 메고 있대요. 또 정치적인 일, 나라 다스리는 일, 그러니까 이 아기의 어깨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메어 있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이분이 통치하신다는 말이죠.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주께서 다스리신다, 예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자 이거를 이 아기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는데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신데, 이분이 무엇을 가지고 통치하시느냐 하는 거를 설명하는 것이 9장 6절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무엇으로 통치하시느냐, 네가지로 설명했죠.
첫째 기묘한 모사요, 기묘한 모사라는 말은 지혜로 통치하신다 말이죠.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큰 지혜를 가지고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은 지혜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지혜를 훨씬 뛰어넘는 인간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엄청난 지혜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야 그거 참 신기하다, 그거 참 놀랍다, 그거 참 아름답다> 이렇게 찬양할 것 밖에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는 뭐라고 했어요. <전능한 하나님이라> 둘째는 <능력으로 통치하신다> 능력이란 말 속에는 지식도 들어가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아야지 그래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특징은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의 이 지혜, 하나님의 이 지혜 하나님 사람의 정책이 영원히 간다.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받고 이 말씀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고 또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통치예요. 아버지 같은 사랑을 가지고 다스리신단 말이죠. 넷째로, 마지막으로, 하는 거는 뭡니까?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죠. <평강의 왕이시라>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통치 방법의 목표는 평강을 주시는 것이다. <환난이 많고 여러 가지 위험한 거 많고 하루도 맘 놓고 살 수 없는 이 극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려고 평화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다> 이것이 9장 6절에서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셋째로 나타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11장 1절과 2절입니다. 셋째로 나타나는 여기에는 뭐라고 설명하느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새의 족보를 타고 한 아기로 태어나신다는 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의 뿌리에서 한가지가 나온다, 누구의 뿌리입니까? 이새의 뿌리예요. 이새의 뿌리가 누구냐 이새의 뿌리가 아브라함입니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러면 아담입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죠. 이새의 뿌리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니까 이 뿌리에서 가지가 하나 나왔대요. 예수님은 누구시냐? 싹으로 난 거는 이새의 가지에서 나와 이 족보를 타고 나오신 분이고 근본은 이새의 뿌리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가지다. 이 가지를 히브리말로 <네제르>라 그랬어요. 네제르 이거를 헬라말로 번역할 때 나사렛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의 예수님 탄생하신 얘기를 설명하면서 <애굽으로 피난 가셨다가 다시 돌아와서 나사렛 동네에서 사셨네, 그래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예언이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는데 구약 성경엔 다 뒤져봐도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는 말씀이 안 나와요. 그런데 나사렛이라고 하는 이름이 이사야서에만 이렇게 세 번 나오는데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11장 1절에 있는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 에스겔 뒤에 나오는 스가랴서 이런 데에 특별히 한가지로 나온다, 싹으로 나온다 또는 이제 숨으로 나온다 이런 말씀들이 많이 나오죠.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신다, 한 순이 날것인데> 하면서 <그분이 바로 왕이시다> 이런 예언들이 쭉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가지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어떻게 통치하시느냐 하는 거를 설명하는 게 이 절입니다. <이 아기 위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다> 이렇게 설명하죠.
그러면서 그 영을 설명하는 말이 그다음에 쭉 나열됩니다.
첫째,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둘째,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그런데 재능이란 말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은 파워예요. 권능의 신이요 재능이라니까 우리는 무슨 재주 이런거 하는데 그런게 아니고 능력이란 말이죠. 그래서 첫째는 지혜 그다음에 능력, 이게 다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셋째로, 나타나는게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다, 이렇게 세 번 나타나는데 쌍으로 둘씩 짝을 지어가지고 세 가지로 설명을 해서 있습니다.
셋째 이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다. 이런 영이 우리에게도 임해야지 한다. 그래서 이것이 임한 사람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리오> 예수님은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어요. 성령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성령의 불을 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모시고 주님께 감사할 때에 우리는 첫째,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돼야 하겠다. 임마누엘을 꼭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주께서 나를 다스리신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이 기쁨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령 충만해서 갖가지 은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생명의 역사가 우리를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의 걸음걸음을 인도하시므로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큰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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