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제 1주일)
주님의 빛 안에서 기억하고 기다리길
사64:1-9; 고전1:4-9; 막13:24-37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부터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고, 그 첫 번째 절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교회력을 따라서 우리의 일상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조율할 때 맺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성이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된 일상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자 정수임을 체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셨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생생하게 살아 있게 만드는 생명력, 실재가 됩니다. 이 대림시기에 말씀이 우리 안에서 체화되는 은총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이사야서 64장입니다. 이사야서는 글이 쓰인 역사적 배경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성서 비평학에서는 대체적으로 봅니다. 1~39장까지는 이사야가, 40~66장까지는 제 2이사야라고 불리는 인물이 썼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제 2이사야가 쓴 부분에 해당합니다. 유다는 내부적으로 폐망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패권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넘어가고 있는 혼돈과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구원과 회복을 염원하던 백성들은 패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혼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격변의 시기에 활동했던 제 2이사야는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 2이사야가 시작되는 사40:1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전 6세기에 예언자를 통해 전해주신 위로의 말씀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바쁘고, 분주합니다. 집안일은 늘 쌓여있고, 예상치 못한 일들까지 불쑥불쑥 일어납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들이 풀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나가는 일터는 치열합니다. 성과를 내어 존재감을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심 속 건물들만큼이나 단단하고 차갑게 스스로를 만들어 생존을 도모합니다. 이렇게 경직된 몸과 마음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닫히고 경직되어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은 외부의 상황과 맞물려 복잡하게 얽혀서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 상황이 일어나면 상대방과 나 자신을 온전히 존재하도록 창조적인 방향을 모색하기보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쪽으로 가기 쉽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잘 관계 맺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익숙한 무의식의 패턴대로 생각과 감정을 처리합니다. 사실, 자신이 만나주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무의식 속에 켜켜이 쌓여 그림자가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생존경쟁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현생이 고달픈 부모들은 자녀들만큼은 이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킵니다. 자녀가 지닌 본연의 색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기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질들을 갖추는데 더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외부로 향해있을 때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다 같은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그림자는 더 커져서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 본문들은 우리가 고된 현생살이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면서 다시금 하나님께로 우리 자신을 재정향하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에 중심이 되는 이미지는 바로 빛입니다. 현생을 사는 우리의 삶이 암흑과 같을 때,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희망이 됩니다. 이 빛은 암흑 속에서 우리가 절망과 두려움, 분노, 우울, 무기력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우리의 시선이 내면의 깊이로 향하도록 인도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사실 63장 7절부터 시작되는 설교와 기도문입니다. 설교자는 유대인들이 저지른 죄와 심판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모든 다양한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특별한 종파적 관심을 갖고 다른 파벌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주 끊깁니다. 갈등과 분열이 심한 이 사회와 우리 내면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만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 오로지 성전과 성전에 대한 자신의 권리에만 관심을 두던 자들, 최초의 언약사회 자손들만 하나님의 관심과 축복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던 자들, 정치력과 군사력이 회복되길 요구하는 행동주의자들, 시온주의자들의 외침이 기도 사이사이에 끼어듭니다. 이들은 모두 포로기 이후에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페르시아의 정책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인정하길 싫어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먼 옛날 행하신 영광스런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다시 그런 일들이 재현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분열의 외침 속에서 제 2이사야는 그들의 다름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바로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사63:7에서 히브리어 “아즈키르” 즉, ‘내가 기억하게 하리라’라는 말로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64:5, 9에서도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가 나옵니다. 기억과 은총은 구약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아픈 오늘에 서서 내일을 바라보는 길은 바로 이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안의 다양한 욕구들과 욕망들이 한데 뒤엉켜 소란스러울 때, 우리가 그 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게 하는 힘이 바로 기억입니다.
패망한 유다의 고난과 아픔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기억함으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은 장차 태어날 구원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그들이 겪은 고난은 인간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그 자리가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모든 순간에 간직해야 할 단 하나의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아들이고 딸이라는 원 기억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와 변형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땅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는 반드시 깊이 사랑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음을 강조하시기 위해 집주인이 여행을 가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하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고난과 아픔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깨어 있어서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고난과 고통은 그저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시련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있어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주님께 기도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시80:18b-19)
요즘 아침에 집 밖으로 나오면 추위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듭니다. 그러다 햇살이 드는 자리로 가면 움츠러들었던 어깨에 힘이 빠지면서 다시 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햇살은 추위를 없애주진 않지만, 우리의 몸을 열어 이완시키고 긴장을 풀어줍니다. 주님의 구원과 회복은 마치 추운 겨울 아침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 몸 곳곳에 퍼져나가는 햇살과 같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나 장애물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 문제와 고통을 직면하여 끌어안도록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일깨웁니다.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도 빛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블린 언더힐은 대림절의 정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약하고 유한한 피조물로서 비천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원한 시선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까지 올라서려는 기대와 희망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영원을 향한 기대와 기다림이라는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힘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물질적, 지적, 영적 조급함과 불안함을 넘어설 수 있다고 그녀는 또한 말합니다.
대림절의 정신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을지라도, 이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원 기억을 떠올리며 그 하찮음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나약하고 비천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리란 희망을 품는 열린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채워주십니다. 그 빛은 우리를 생생하게 살리는 생명력이고, 우리 있는 그대로의 온 존재를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경이가 언제나 우리의 작은 영혼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우리의 외부 상황에 따라 요동치기 쉬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오고 머물다 가는지를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암흑과 같고, 우리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는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경이는 늘 우리의 작은 영혼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대림시기에 주님의 빛 안에서 기억하고 기다려야 할 일입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 모두가 주님의 빛 안에서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살아계셔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