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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을 놓기 힘들고,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앞설 때,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사는게 힘겹고 재미가 없어진다.
음식에 양념이나 MSG가 들어가야 감칠맛이 나는 것처럼, 팍팍해진 삶에도 그런 요소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감칠맛을 원할 때 인위적으로 MSG를 넣지만, 실상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우리도 모르게 감칠맛이 숨어
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인생에는 ‘렛잇비(Let It Be)’가 필요할 때도 있고 ‘퀘쎄라쎄라’가 필요할 때도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문해보지만 실상 대답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혈액형을 이야기할 때 나는 트리플A형 이라고 말한다.
그 만큼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내 단점들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팍팍함이 더해진 소심한 소시민의 일상에 정신이 바짝 차려질 만한 감칠맛도는 프로포즈가 들어왔다.
팔봉이가 전화로 소승폭등반을 가자고 한 것이다.
설날연휴 시작일이어서 귀성차량은 많지만, 강원도로 가는 차량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어서 차량정체도 없고,
클라이머들 역시 고향을 가진 국민들이라 한산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조없는 트리플A형인 나는 팔봉의 그 카사노바 같은 제안을 덥썩 물고 말았다.
필요한 준비물이야 각자 준비하면 될 일이고, 팔봉이와 희상이가 100M 로프를 하나씩 가져오기로 해서
난 내 장비만 챙기면 되었다.
숙식은 한계리 준교형네 집을 예약한다고 해서 그렇라고 했다.
1997년 모 등산학교에서 만난 팔봉이는 나와 희상이가 있던 산악회에 가입을 했고, 그 이후로 셋이서
등반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산악회원들은 어찌어찌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 셋은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았지만, 우리들도 점차
각자 나름대로의 삶과 등반의 영역으로 흩어졌다.
희상이는 당시 우리 산악회의 등반대장이었고, 테크니컬적인 면에서 섬세하거나 뛰어난 산악인은 아니었지만,
체력적으로 아주 뛰어나고 열정적인 산악인이었다.
하드프리 등반보다는 기존바위와 알파인 등반을 아주 잘하는, 나보다 세 살이 적은 후배였다.
팔봉이는 처음 이름을 듣는 사람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그야말로 순박하고 토속적인 이름을 가졌다.
그의 이름을 듣고는 사람들 중에 진짜 이름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웃으면서 팔봉의 동생이름이 ‘구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더더욱 믿지를 않았다.
처음에 팔봉은 겁도 많고 등반도 잘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부천에 있는 실내암장에서 저녁 때마다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리더니 마치 예전 중국의 무당파를 세운
장삼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 봉우리 세 개를 보고 홀연히 깨우치고 무당파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장삼봉으로 바꾼 것처럼, 팔봉도 암벽등반의 묘리를 깨우치게 된다.
그 이후 팔봉은 희상과 내 뒤 자일을 따르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이 맨 앞에서 리딩을 서기 시작했다.
선인봉과 인수봉의 루트들을 섭렵하던 팔봉이는 그야말로 일취월장, 괄목상대했다.
팔봉은 하는 일이 늘 고됐다. 노동일을 하던 팔봉이는 몸으로 때우는 피곤한 일을 하루 종일 하고선
저녁에 실내암장에 와서 또 몇 시간씩 매달리곤 했다.
종로의 실내암장 아트클라이밍에서 운동 할 때는 일이 끝나는 경기도 광주, 여주, 이천 등지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로 와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거나, 아침 일찍 출발했다.
그런 팔봉을 보면 눈물겨웠다.
집안 형편상 많이 배우지 못한 팔봉은 등반처럼 자신을 몰입시키는 대상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불나방처럼 몰입하는 팔봉을 2001년 여름, 내가 꾸미고 추진한 알프스 등반대에 끼워 넣었다.
거기서 팔봉과 나는 자일을 묶고 봉블랑을 올랐고 마터호른을 올랐었다.
그 뒤 팔봉이는 내 품을 떠나 매킨리 등정을 했고, 세준과 배핀 아일랜드 등반을 했다.
둘 다 성공적인 등반이었다. 그렇게 팔봉은 조금씩 큰 등반을 해치우면서 성장했고,
김형일, 민준영과 히말라야 스팬틱 신루트 등반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일약 주목받는 산악인이 되었다.
팔봉은 어떤 등반을 해도 고소증세 한 번 앓은 적이 없다.
나와 울릉도를 갈 때도 풍랑이 심한 날씨에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고소증세와 멀미와 상관관계가 있을 듯
도 싶었다.
내가 의학적인 지식이 있거나 여건이 주어진다면 한 번 깊이 연구해 보고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그 후 내 품을 떠나 장기헌과 만나고 그 인연이 다시 지금 자리잡은 크럭스존 암장 트레이너로 있게 된
과정은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인생항로다.
팔봉이가 안양에서 자리를 잡은 후 이맘 때쯤 되는 설 명절에 내가 쥔장 강수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그 문자는 팔봉이를 잘 보살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는데, 뒤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팔봉이의 친형
이나 혹은 후견인도 아니면서 그런 문자를 보낸 건 아니었나 싶어 조금 난감했었다.
팔봉의 전화를 받고 나도 장비를 점검하고 다시 짐을 꾸렸다.
퇴근을 하기 전 다시 팔봉의 전화가 울렸다.
“형, 관리공단에서 문자가 왔는데, 기상특보 때문에 등반허가가 취소되었대요. 어떡하실래요, 형…”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리는 전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는 노릇.
소승폭 등반은 못해도 매바위에서라도 등반을 하고 오자는 내 제안에 팔봉도 동의를 한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차량정체가 극심하다. 귀향차량행렬이 벌써 시작되었나 걱정이 된다.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하고, 짐을 꾸려 바로 나섰다. 시간은 10시가 조금 안되었다.
희상이는 안 간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출발해서 운전 중에 팔봉의 전화가 왔다.
“정말 오랜만에 팔봉과 너와 나 셋이 모여서 밤늦도록 한 잔 하면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꼭 소승폭은 아니더라도 우리끼리 오랜만에 자일을 묶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지 않겠니?”
고집쎈 희상이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상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의 고집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함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며 설악산방향으로 핸들을 향했다.
춘천가는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준교형 집까지 두 시간도 안 걸려 도착할 듯 싶었다.
일부러 차를 천천히 운전했고, 즐겨듣는 라디오 채널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복잡한 심사에는 이런 호젓한 환경이 좋았고, 사람들과 북적거리며 있을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해결되지 않는,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무는 피곤한 시퀀스 속에서 이따금씩 생각은 가닥이 잡히기도 했다.
수도권을 벗어나면서 라디오가 직직거리기 시작했고, 손에 잡히는 CD 하나를 빼넣었다.
백지영이 부른 OST ‘그 여자’가 흘러나온다.
그 녀만큼 발라드 쟝르를 잘 소화해내는 가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 녀의 발라드 목소리의 결정판이
바로 이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한다고 특정 쟝르를 잘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카라얀, 정명훈 같은 명지휘자의 역량의 차별성이 결국 ‘곡 해석’에 있는 것처럼 그 녀의 발라드 곡
소화력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가수 이상우가 부른 드라마 OST ‘비창’ 이 그랬는데, 노래 ‘비창’은 가수로서의 이상우를
다시 돌아보게 보고, 가수로써 한 단계 성숙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노래였다고 했다.
결국 가수 이상우의 보컬의 결정판은 ‘비창’이다.
미시령가는 길과 한계령가는 길 삼거리 즉 민예삼거리에서 한계령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조금만 가면 준교
형이 운영하는 가게가 나온다.
그 곳, 민예삼거리에서는 단 한 번의 우회전아니면 좌회전으로 우리는 속세를 벗어나 설악의 품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 곳을 지날 때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 곤 했다.
준교형이 옥녀탕 휴게소를 운영하다가 이리로 온 지 2년 정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차를 세우는데
마침 소설가 이외수를 빼닮은 매점쥔장 준교형이 문을 열고 나온다.
영락없는 시골동네 가게 주인의 모습이다. 많지도 않은 수염 몇 가닥을 길렀고, 부스스한 머리를 묶어
넘겼는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김세준의 머리결과 비교하면 흡사 밍크털과 돼지털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속으로 낄낄 웃어댔다.
내가 낄낄거리는 것도 모르는 형은 방으로 들어오라며 권한다.
매점 안에 딸린 작은 방이 있고 형은 거기서 가게 일을 보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옆에 떨어져 있는 살림방에 거실과 주방, 그리고 방이 두 개가 있다.
매점이긴 하지만 물건들 수가 많지는 않다.
아무래도 동네주민들이 주 고객이다 보니 그렇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옥녀탕 휴게소를 운영하지 못하게 된 점이 아쉽기만 하다.
커피를 타서 한 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팔봉이가 들어선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배가 고프다는 팔봉은 밥을, 준교형과 나는 소주를 마시기로 하고 살림집으로
건너갔다.
형수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팔봉이는 자주 찾는 편이라 아주 반갑게 대하고 스스럼없었지만 아무래도 날 기억 못하는 것 같아,
예전 옥녀탕 휴게소 있을 때 인사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었지만 역시나 였다.
하긴 새벽시간에 어두운 곳에서 인사를 했고, 2년이 지났으니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 때 우렁각시처럼 휴게소 주방에서 일을 하던 형수님을 보고 준교형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 보았을 때,
형은 아주 여유있는 웃음으로 인생 다 그런 것 아니겠냐는 투의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 때 모 기업의 설악산 산행 가이드를 위탁받아 김세준 변성호, 김형욱, 준교형 그리고 나 다섯 명은
설악산 오색약수에서 대청봉을 거쳐 천불동계곡,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까지 가이드 산행을 했었다.
사고없이 산행을 마친 우리 가이드들은 물치항으로 향했고, 준교형은 일정이 있어 먼저 내설악으로 갔다.
물치항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우리들은 택시를 타고 승용차를 놓아둔 오색약수로 가자고 했고
다들 택시에서 잠이 들었다.
다들 술이 취해 행선지를 자세히 말하지 않고 오색약수라고만 말했던 것같다.
택시에서 내려보니 기사가 내려준 곳은 호텔 주차장과 2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인사불성인 일행들은
자리에 널부러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누구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가져와 인도에 앉아서 먹으면서도 술은 깨지를 않았고, 차있는 곳까지
걸어갈 체력과 정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가장 정신력이 강한 나와 형욱이가 차를 가지러 갔고, 1KM쯤 걸어가다가 형욱이마저 길가
인도에 드러 눕고 만다.
할 수 없이 마지막 남은 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젖먹던 힘까지 짜내 겨우 차 있는 곳까지 가서
운전을 해서 형욱을 태우고 세준과 성호를 태우는데 다들 그런 인사불성이 없었다.
자신의 술이 가장 쎄다고 형욱이가 운전대를 잡고 한계령을 오르는데, 변성호는 창문을 열고 계속
오바이트를 한다.
값비싼 회를 먹고 바로 확인을 하니 아까워 죽겠다고 뭐라고 했더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그깟 회가
중요하냐고 대꾸를 한다.
홍천쯤이었나 운전하던 형욱이가 휴게소에 차를 세우더니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겠다며 잠에 곯아 떨어지고,
휴게소 차안에서 다시 몇 시간 동안 잠을 자고 약간의 기력을 회복한 우리들은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틀 뒤 다시 모여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니, 다들 기억을 못한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 걸 보니 역시 내가 술이 제일 쎈거 같다며 앞으로 술로는 까불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기를 눌러 놓았었다.
암튼 이외수같기도 하고 인도의 영적 스승인 ‘구루’같기도 한 설악산 로컬 준교형과 형수, 그리고
팔봉과 마주 앉아 밤 깊은 줄 모르고 술을 마셨다.
기상특보 때문에 등반허가가 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실망하고 많은 눈이 쌓여 있을까 긴장된 마음으로
왔는데 먼지 풀풀날리는 이른 봄날의 풍광이 뭐냐고 내가 볼멘소리를 했다.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것도, 기상특보 때문에 등반허가가 취소된 것도 준교 형이 책임질 일도, 해명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소주 한 병을 비운 내가 졸린 눈으로 표정이 풀어져 헤롱거리고 있을 때, 팔봉이가 지난 주
영동빙장에서의 사고를 이야기했고, 사고자가 서울시 연맹 이사라는 말도 들렸다.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었나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준교형이 산악회와 이름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술이 확 깨며 머리를 쳐들었다.
“상우요? 김상우? 알죠, 저랑 함께 등반도 했었고, 40대 초반일 거에요. 등반도 잘했고, 아주 열정적인
친구였는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바로 상우였다니…
정말 세상이 좁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네요”
벽시계 시침이 세벽 네 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준교 형은 나보다 더 풀어진 눈이 되었고, 그 풀어진 눈으로 내일 아침 소승폭 등반이 가능하게 손을
써보겠다는, 내설악 최고의 로컬다운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매바위를 가던 소승폭을 가던, 당초 새벽 일찍 서두려고 하던 생각은 바꿔야 했다.
소승폭으로 가더라도 등반허가가 나지 않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매바위 등반도 아침 일찍 서둘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 보일러를 돌리는 준교형 집은 따뜻했다.
팔봉을 벽쪽으로 눕히고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알람을 아침 8시 30분으로 맞춰놓았다. 눈을 감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알람이 울려 깨보니 세팅된 시간이었다.
팔봉을 깨우고 얼굴을 씻고 베낭을 정리하는데, 팔봉이가 핸드폰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관리공단에서 기상특보해제로 등반이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어차피 포기하고 매바위로 가려고 했고, 물론 준교형이 등반이 가능하게끔 해준다 했지만,
상황은 변했고 우리는 당당하게 등반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포기하고 체념하고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지 하는 순간, 포기했던 것들이 되살아나오는 그런 상황말이다.
그 것이 헤어지려고 포기한 여인이나 꿔준 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의 경우는 정승권등산학교에서 강사를 하는 최기련의 경우가 딱 그렇다.
기련이 연모하는 여인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프로포즈를 받은 여인은 거절을 한다.
거절을 당해 낙심한 기련은 해외지사 발령을 지원하고 마는데, 마음을 돌린 여인이 프로포즈를 수락한다.
해외지원을 신청한 기련은 신청을 철회하는데 그만 시기가 늦어 떠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국 멀리 떨어져서 비싼 국제전화료를 많이 날렸다고 하나, 시간이 흘러 기련이 귀국하고 둘은
해피 엔딩의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
지금 그 여인은 두 아이를 둔 기련의 집사람이다.
소승폭을 향해 오르는 계곡은 참 좋았다.
예전에도 그랬던 감정이었지만, 난 그 소승으로 오르는 눈쌓인 계곡을 사모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눈이 날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쏴하고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에 오염된 눈의 내음이 끼쳐왔고, 코가 싸하게 아려왔다.
코 안에 콧물이 들어차 훌쩍거렸다. 한 쪽 손으로 콧구멍을 눌러 막고 팽하고 눈 위에 코를 풀었다.
도시에서는 못하는 원색적인 행동이다.
손에 약간의 콧물이 묻어있다. 옆에 서있는 나무둥치에 손에 묻은 콧물을 쓱 닦아내었다.
팔봉(八峯)이 본명이다.
이름이 왜 여덟 개의 봉우리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아버지가 술 드시고 지었다고 했다’는 게 그가 알고 있는 이름풀이의 전부다.
전남 함평 생이다.
사투리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열다섯 살 때 서울로 전학을 왔기에, 이제 고향의 기억은 가물하다.
생각나는 것은, 동네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서해바다가 나왔고,
그래서 김팔봉은 산에 올라 그 자메이카의 해변 같은 바다를 넘겨다보곤 한 것이다.
“놀 데가 산 밖에 없었으니까요.” 학교는 일찌감치 그만 뒀다.
농사짓는 게 꿈이었다.
농사짓는 아버지가 가장 존경스러웠고, 서울로 전학을 와서 교과서에 시달리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 학교 안다녀” 그러곤 그냥 산으로 갔다.
(중략)
가끔 원효리지로 백운대를 올라 우이동으로 하산하며 백운산장 뒤 빌라캠프장에서 인수봉 남면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그런 건 특수부대 출신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람들 말이 암벽등반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14에 전화를 걸었더니 한국등산학교를 알려줬어요.” 바위에 매달리며 힘은 들었지만 특별한 감회도 없었고,
굳이 안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수료 후 졸업생들의 모임인 큰뿌리산악회에 들었고, 등산학교 동기이자 인생 선배인 한상섭씨를 만났다.
그리고 함께 인공암장에 나가 운동을 시작했다.
“막노동을 했는데, 암장 운동에 재미를 들리다 보니 다음날 아침 너무 피곤해서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 일을 공치고, 다시 저녁때가 되면 몸이 풀려서 암장으로 나가고, 그런 생활이었어요. 운동 중독증 같았죠.”
주말마다 인수봉과 선인봉을 드나들던 김팔봉은 2000년 한상섭씨로부터 알프스 등반 제의를 받는다.
한씨가 꾸린 직장산악회의 원정에 그를 추천한 것이다.
몽블랑을 오르고, 마터호른에서 폭설을 만나 뒤돌아 내려올 때까지 김팔봉은 무덤덤했다.
그런 무덤덤함이 그가 가진 매력이었는지, 한씨는 김팔봉에게 “5.14급 루트를 등반하면 어린 딸을 주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5.14급 등반을 안 하고 있죠.” 글쎄, 근육이 가장 탱탱해져 있을 무렵 그는 태국 프라낭 암장에 가서 5.13b급 루트를
끝내려고 하루 종일 28번을 매달리기도 했는데.
“나는 직업이 ‘클라이머’예요”
그에게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를 소개한 것도 한씨였다.
수강료도 전부 대신 내줬다.
“처음엔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해 보니 몸에 맞는 것 같아요.”
김팔봉은 가리는 것이 없다.
인공등반도 좋고, 스포츠클라이밍도 좋고 빙벽등반, 워킹도 좋다.
산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밥 짓는 것까지 다 좋다.
처음 바위에 발을 들여놓을 때 선배로부터 들은 “산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그는 믿는다.
그래서 늘 어느 산을 가야겠다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적응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간 마운틴 이영준 ‘산악인 탐험 김팔봉’)
빙벽의 폭이 작게 얼었다고 팔봉이 소승폭을 바라보며 걷다가 중얼거렸다.
그런 팔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느닷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 팔봉아
- 네, 형
- 오래 살아라…그리고 오래 살자…
내가 회갑연의 덕담같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 갑자기 형 무슨…
- 네 뒷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 형일이랑 준영이가 오버랩되서 말야.
스팬틱 원정대원 중에 너만 남았잖니, 안전하게 산행해서 오래 살자구.벽에 똥칠할 때 까지 살자.
- 네, 형 그럴께요. 형도 같이 오래 살아요
하며 팔봉이가 어이없다는 듯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러게 말하며 낄낄거리며 우리는 천천히 소승폭 아래에 도착했다.
팔봉을 만나면 함께 순수해지고 함께 어려진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원색적인 표현을 자주 하고, 욕도 쉽게 한다. 그만큼 편하다.
부부가 오래 살면 나이차가 의미가 없어지듯이, 등반하는 사람은 자일을 묶을 때, 자일 파트너 간에
나이차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생각한다.
난 양복을 입을 때와 등반복을 입을 때 그 차이를 느낀다.
옷이 내 행동양식을 규정짓듯이, 등반복은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하고, 날 흥분시키고 젊게 만든다.
그로 인해 새로 만들어진 젊음은 파트너와 자일로 연결되어 교감, 소통된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NAVI)족이 ‘사헤일루’라고 하는, 촉수 끝을 서로 연결하여 모든 생명체와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고 교감하고 소통한다.
등반자와 등반자의 ‘사헤일루’는 바로 자일을 연결했을 때 이루어진다.
자일을 통해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교감하는 것이다.
암벽도 그렇지만, 빙벽은 특히 멀리서 볼 때와 직접 붙었을 때의 차이가 크다.
얼음의 밀도와 형성된 얼음의 형태가 멀리서 세밀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전체적인 것만 짐작할 뿐이다.
소승폭과 대승폭의 등반난이도가 토왕폭보다 어려운 이유는 얼음의 형태에 있다.
직벽으로 형성된 얼음보다 얼기설기 그리고 고드름과 버섯형태로 이루어진 얼음이 당연히 등반을 어렵게 한다.
장비가 발달되어, 바일의 샤프트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뀌어 버섯얼음 위를 타격하여 이전에 하기 어려
웠던 동작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했다 해도 직벽의 얼음보다 동작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드름과 버섯형태의 얼음 아랫부분은 얼음의 밀도 또한 약하다.
약한 얼음은 타격과 킥을 강하게 할 수 없고, 낙빙의 가능성이 높다.
20년간 대도시 직장생활을 하며 얻게 된 내 몸의 변화된 부산물들이 있는데 알레르기 비염이나 과민성
대장증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벨트를 차면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머피의 법칙’에 들어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아픈 배를 달래고 돌아오니 팔봉이는 벌써 장비착용을 끝내고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부실한 얼음과 팔봉의 등반준비에 내 마음이 양보를 하며 선등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일단 전투 시작 전에 스스로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간 셈이다.
팔봉이도 잠을 몇 시간 못 잔 탓인지 몸이 무거워 보인다. 매끄러운 동작이 아닌 둔탁한 동작이 자주
나온다.
팔봉은 지난 가을 선운산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5.13C)를 끝냈다.
가까운 시일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업버젼(5.13C)이고 그 다음이 겨울람보(5.13d)이다.
팔봉이는 크럭스 존 암장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코칭과 교육을 하면서 스스로의 운동과 트레이닝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지만 5.13 후반대의 루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중되고 체계적인 트레이닝이 필요한데,
팔봉은 자주 운동을 쉬어야 했다.
몸 건강에 이상이 있기 때문인데, 좀 희귀한 병이 있어,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휴식과
수면이 보장되지 않으면 몸에 면역력이 떨어져 울혈과 궤양이 생기는데 울혈이 생길 때마다 그 고통이
매우 크다고 한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끝낼 때는 마침 4개월 정도 트레이닝을 지속할 수 있어서 끝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프지만 않으면 트레이닝을 지속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5.14도 조만간 도달할 자신이 있다는 팔봉의
말이 수긍이 됐다.
팔봉이가 스크류 6개를 설치하고 한 시간 만에 등반을 끝냈다.
나도 등반시간이 한 시간을 넘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앞선 팀이 한 팀 있었는데, 마지막 등반자가 팔에 펌핑이 왔는지 계속 추락을 하며 자일에 매달리고
있었고 타격과 키킹 중에 낙빙을 속속 떨어뜨리고 있었다.
낙빙은 크기가 서로 달라 때로는 총알처럼 쌩하며 지나갔고, 때로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얼음 턱에
바운딩되며 튀었고, 튄 얼음들은 작게 산개했다.
총알 같은 낙빙은 주먹만한 것이나 조금 더 큰 것들이었고 둔탁하고 큰 소리의 낙빙은 머리크기 만한
것들이었다.
하늘은 뿌옇게 흐렸고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 아니라 진눈깨비 같은 눈이어서 내리면서 녹았고, 그 때문에 장갑과 옷이 금방 젖어들었다.
살이 빠진 후 주량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했고, 졸음이 몰려왔다.
쉬이 피곤함을 느꼈고 술 마신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무력감을 느꼈다.
며칠 전 농담으로 페이스북에 포비가 올린 사진에 댓글을 달면서 내가 하루에 먹는 양을 보니 세준이가
먹는 한끼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어쨌든 먹는 것이 부실하니 체력적으로 부대낀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거나,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성격도 아니었다.
잘 먹어서, 잘 먹어야 활력이 생기는 것인지, 활력있는 생활이어서 더불어 잘 먹게 되는 것인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내 자신도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제 새벽까지 마신 술에 짧은 수면 시간에, 나 역시 몸이 무거움을 느끼며 피크 끝을
얼음에 박고 있었다.
얼음동굴까지가 결빙상태가 안 좋았다. 얼음도 부실했고 형태도 그랬다.
팔봉이가 오르면서 “형, 여기는 좀 무서운데…” 했던 부분을 오르며 나 역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동굴 윗부분부터는 얼음이 직벽으로 조밀하게 형성되어 아랫부분보다 수월했다.
앞선 팀에서 자주 추락했던 등반자는 아마 얼음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구력 문제 때문에 추락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일을 던졌다.
그 팀은 얼음동굴에서 피치를 끊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머무르며 팔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주 추락을 했다는 것은 빙벽등반 경험이 별로 없거나 운동량이 부족해서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몸이 덜 풀려서 그랬는지, 바람이 계속 불어서 그랬는지 콧물이 자꾸 들어찼다.
한 쪽 손으로 바일을 잡고 한 손으로 코를 풀었다. 장갑에 묻은 콧물을 닦을 나무가 없어 얼음기둥에
쓱 문질러 닦았다.
콧물이나 얼음이나 같은 색깔이어서 나무보다 흔적이 남지 않았다.
마지막 스크류를 회수하는데 머리 위에서 팔봉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이 등반을 나가면서 베낭을 메기에 짧은 시간 등반할 건데 왜 배낭을 메냐고 물었었는데,
베낭안에 카메라가 들어있던 것이다.
녀석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김팔봉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줄을 묶고 싶어 한다.
줄은 단순히 절벽에 매달려 사람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로프만은 아니다.
그래서 배핀아일랜드에서 돌아와 직장을 잃고도 그에게는 삶의 끈을 묶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다시 트랑고타워에 가서 정상에 섰고, 안양 캠프4 장비점 대표 송강수씨를 만나 지금의 직장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큰 도움을 받았다고 스스로 자책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일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낸 그림자 그늘이 다른 이에게 얼마나 시원함을 선사하는지 나무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밥 말리는 그의 데뷔앨범과 같은 제목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가진 건 분노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실은 강물처럼 사람을 길들인다."
김팔봉이 가진 건 진실이다.
그래서 뜨거운 바위를 움켜쥔 그의 손은 늘 거칠 수밖에 없다.
(월간 마운틴 이영준 ‘산악인 탐험 김팔봉’)
팔봉이 선등으로 등반을 했던 한 시간 동안,
그리고 내가 등반을 한 한 시간,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서로에게 한 말이라고는 '완료'와 '출발' 단 두 마디였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등반을 했고, 깨지는 얼음파편과 내리는 눈만이 우리 곁에 함께 할 뿐이었다.
그와 난 이어진 자일을 통해 '사헤일루'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것도 10년의 시공을 돌아서 말이다.
침묵이 끝난 소승폭의 정수리에서 우리 둘은 사진을 찍고, 불참한 배신자 희상에게 사진문자를 보내며
약을 올렸고 둘이서 셀카를 찍으며 낄낄거리며 노닥거렸다.
시간에 쫒기지 않으니 여유있어 좋았고, 팔봉과 나는 그런 여유를 충분히 만끽했다.
우리가 내려올 시간에 맞춰 밥과 음식을 준비해놓은 형수님은 예상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도착을 하자,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다.
형수님은 설악산에서 몇 년간 살면서 거의 전문가, 달인이 되어간다.
대승폭을 등반하거나 소승폭을 등반하러 간 팀들이 몇 시간 걸릴 것인지, 등반팀의 인원 수와 현지
상황 등을 고려하여 거의 정확하게 돌아올 시간을 예측한다.
시간에 쫒기지 않아서 소승폭에서 사진도 찍고 둘이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골짜기에서 자주 쉬면서
사진찍고 이야기도 하고 그래서 늦게 왔다고 설명을 했다.
지난 새벽에 등반허가가 취소된 소승에서의 등반을 장담하던 준교형은 우리가 출발한 후에도 계속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매점안 방에서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형과 함께 모여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술을 못 마시는 형수과 팔봉을 빼고 형과 나는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반주를 했다.
그러면서 형수에게 형과 만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형과 형수는 네팔에서 만났는데, 그 러브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원래 명상을 하던 형수는 카투만두에 머물면서 명상속에서 보았던 그림의 장소를 찾아 히말라야 산 너머
있는 호수로 향했고, 우연히 가이드 겸 따라나선 준교 형과 12일 동안의 기간 동안 정도 들고,
마침 전설과 명상속에서 존재하던 인물을 호수에서 보게 되고, 그 인물이 현세의 준교 형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얼핏 들으면 잘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멋지게 다가온 설악산구조대 정준교는 한 달 늦게
귀국을 했고, 형에게 빌려 입은 옷을 돌려줄 요량으로 공항에 마중을 나간 그 녀에게 설악산의 송이버섯을
함께 먹지 않으련 하고 프로포즈하여 차에 태워 함께 설악의 품으로 온 것이다.
형수님은 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형의 뒷담화를 열심히 한다.
밖에 나가면 스포츠 클라이밍 국가대표 감독이자 심판이자, 등반 교육하는 코치로서 카리스마 작렬하는
멋진 포쓰를 가진 산악인이지만, 집에서는 소심하고 잘 삐치고 재미없는 남편이라는 것.
그 말을 들은 내가 박수를 치며 그랬다.
“배우이자 탤런트 박준규씨 아시죠, 박준규씨 아버지가 왕년의 명액션배우 박노식씨잖아요.
박준규도 매일 술마시고 늦게 들어가고 집사람에게 혼나고 매일 사과하고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산대요.
자신이 잘 웃고 장난치고 잘 삐치는 성격인데, 그게 유전이라네요. 카리스마 넘치는 박노식씨도 집에서
장난 좋아하고 얼마나 잘 삐치는지 모른데요. 이야기 나누던 MC가 박노식씨가 그런다니까 믿지를 않더라구요,
남자들은 집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풀어놓잖아요.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요? 사실 나도 그렇거든요”
준교 형수님도 그 말에 동의를 한다.
남자들은 일끝나고 돌아가는 가정이라는 세계가 휴식을 하고, 자신을 풀어놓는 공간이지만, 집에 있는
여자는 남자를 만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남자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이해를 못하기도 하는 것이라며…
양복을 입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내 모습을 보면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된다.
팔봉과 나란히 누워 한 시간 동안의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내가 코를 곤하게 골더라고 팔봉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준교 형과 형수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팔봉은 어머니와 여자친구가 있는 원주로, 나는 서울로 향했다.
사필귀정
事必歸正 모든 일은 정(正) 바른 것,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
사전적의미로 正을 ‘바르다. 세상의 옳바른 이치”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난 그것보다는 어떤
‘순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소승폭에서 내려서 눈밭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틀즈가 노래한 Let It Be 는 직역하면 ‘그냥 내버려두라’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동사 원형
‘BE’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 순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순리란 일종의 어울림 즉 하모니이니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양복입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보다, 설악산 언저리 어디쯤에 자리잡고 살면서 벗들과 어울리거나
산 속에 얹혀 사는 내 모습이 과연 순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리속에서 어쩌면 내 속의 영감과 열정을 끄집어 내어 얼마 전 블로그에 썼던 미완성의 소설
‘인수봉’을 제대로 쓸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옛 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 역할을 맡아도 전혀 어색할 것같지 않은 준교형과,
마찬가지로 선녀 역할을 맡으면 적격인 도시 내음이 풀풀 풍기는 예쁜 우렁각시 형수님의 모습은 내가
살고 싶은 워너비(Want to be)이다.
외모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두 사람의 현재 삶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방하나 딸린 매점을 운영하면서 무릎 툭 튀어나온 오래된 등산복 바지 입고 눈꼽 떼어가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슬리퍼 끌고 마누라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남은 밥을 모아서 마당에 있는 개에게
밥을 주고, 찾아오는 벗들과 어울려 낮술도 마시고, 함께 산행하고, 등반하고 밤 깊은 줄 모르고 술을
마시고 싶다.
벗들이 다 떠나고 나면 밤 깊은 시간에 혼자 책상에 쪼그려 앉아 그들과 어울렸던 이야기로 글을 쓰고
산행했던 사진을 정리하고 싶다.
그렇게 쓴 글 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을 수 있다면 좋고, 팔리지는 않겠지만 벗들과 지인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면에서 나의 진정한 롤 모델은 도종환 시인이고, 그가 쓰는 오두막 이야기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정신까지 들어있다.
도종환시인과 준교형의 생활을 절반씩 섞어 놓으면 참 좋겠다.
인제군 한계리는 그런 면에서 나이 먹고 찾아갈 나의 이상향, 청학동, 엘도라도 중 하나이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나비족이 '사헤일루'를 통해 모든 생명체와 교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 마을 어딘가에 겨울깊은 형님께서도 함께 살고 있으면 참 좋겠다.
...
첫댓글 멋지고 감동있는 사람냄새 푹 나는 등반기 잘읽었습ㄴ다....어느 서점에서 만난 글보다 감동이 있어 좋았ㅎ습니다...제가 좋아하는 사부 팔봉셈과 한계리 쥔장님 부부이야기..사내들의 진한 우정 팍팍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