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치자꽃 향기, 여인의 향기
<192회>
김민철 논설위원
입력 2023.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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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가끔 치자꽃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치자나무는 남쪽지방에선 밖에서도 잘 자라지만 서울 등 중부지방에서는 밖에서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해 대개 화분에 심어 가꾼다.
예전엔 치자에 대한 인상이 열매를 노란물 들이는 염료로 사용하는 식물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날 아름다운 하얀 꽃과 강렬한 꽃 향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여름 치자꽃은 신선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갖고 있다. 정미경의 소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를 읽고 치자꽃 향기가 여인의 향기임을 알았다.
소설 주인공이 시장골목 끝에 자리잡은 방을 얻어 이사했을 때, 옆방에서 남녀가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주인공 방으로 도망쳐 온다. 여자 이름은 미옥으로, 백수 남편의 의처증 때문에 매 맞고 사는 여성이었다. 알고보니 주인공과 동갑내기인 미옥은 큰 입을 벌려 헤퍼보이게 웃지만, 눈웃음이 예쁘고 ‘화장품 냄새와 섞인 아릿한 살냄새’로 육감적인 데가 있는 여자였다. 미옥의 부엌에선 치자꽃 향기가 떠돈다.
치자꽃. 향기가 달콤하다.
<선반엔 깨소금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고 좁은 공간에 달콤한 향내까지 떠돌고 있었다. 싱크대 위 목이 긴 유리컵에 흰 치자꽃 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마당가에서 꺾어온 것일 게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치자꽃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지러울 만큼 달디단 향을 내뿜는데도 꽃은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찢어진 여자의 눈두덩이 떠올랐다. 미옥이라고 했던가. 방을 나가기 전 미안한듯 살짝 웃던 여자를 닮은 꽃이다.>
그집 건넌방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영화감독 승우는 캠코더를 들고다니며 골목길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다. 승우는 미옥의 귀에 치자꽃을 꽂아주고 캠코더를 찍는다.
<창고 옆 플라스틱 화분에 핀 치자꽃이 빗물에 씻겨 환하다. 대문간엔 재활용 쓰레기가 쌓여있고 노랗게 말라죽은 나무가 꽂혀 있는 플라스틱 화분 몇 개가 담 아래 어지러운데 왠지, 이런 풍경이 눈부실 수도 있구나 싶었다. 햇살보다 진한 꽃향기가 마당에 번진다. 승우가 느닷없이 치자꽃 한 송이를 꺾어와 미옥의 귀에 꽂아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누나, 행복해야 해요.”
큰 입을 벌려 활짝 웃는 미옥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 근거 없는 이 샐쭉함이 질투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활짝 핀 치자꽃.
어느날 미옥과 남편이 심하게 다투다 방에 들어간 날, 미옥은 어이없이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승우는 그런 장면까지 캠코더로 담지만 필름을 주인공에게 맡긴다. 필름 제목이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였다.
이청준의 단편 ‘치자꽃 향기’에서 이 꽃 향기는 더 에로틱하다. 소설의 화자인 남편은 어느날 아내에게 황당한 부탁을 한다. 자기의 절친 중 한달에 한번쯤 여자 알몸을 훔쳐보지 못하면 정상생활이 불가능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위해 보름달 뜬 밤에 마당 우물가에서 한 번만 멱을 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아내는 처음에 당연히 펄펄 뛰며 미친 놈 취급을 했으나, 계속 절실하게 부탁하자 마침내 승낙한다. 드디어 약속한 날, 우물가에 치자꽃이 피어 있다.
<아내는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우물 곁 치자나무꽃 곁에 뽀얀 달빛을 받고 서 있었다. 달빛에 젖은 아내의 알몸은 짐작했던 대로 그 생김이나 곡선이 휠씬 부드럽고 유연해 보였다. (중략) 그녀는 그냥 온몸으로 달빛을 빨아들이며 입상처럼 묵연한 자세로 환한 밤 치자꽃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난 듯 이따금 한 번씩 그 번쩍거리는 달빛을 향수처럼 어깨에서 조용히 씻어 내리곤 할 뿐이었다.
비로소 그 아내로부터 훈훈한 치자꽃 향기가 지욱의 코를 찔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밝은 달빛으로 하여 더욱 흐드러져 보이는 그 샘가의 치자꽃으로부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욱에겐 그게 또한 여인의 밤냄새였다.>
친구는 핑계일 뿐 관음증 환자는 남편 자신이었다. 그러고보니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도 가장 육감적인 인물인 외서댁이 처녀 시절에 유달리 좋아했던 꽃이 치자꽃이었다. 친정집에 쌀을 얻으러 가서도 ‘친정집 부엌문 옆에 탐스럽게 걸려 있는 황홍색 치자 묶음’을 가져올 정도로 치자꽃을 좋아했다.
치자 열매. 노란물 들이는 염료로 쓴다.
조선 세종때 양희안이 쓴 책 ‘양화소록’은 치자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꽃 색깔이 하얗게 윤택한 것이 첫째요, 꽃향기가 맑고 부드러운 것이 둘째요,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열매로 노란색을 물들이는 것이 넷째다. 그러면서 치자는 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했다.
치자꽃이 지면서 치열했던 여름도 가고 있다. 치자나무는 꼭두서니과에 속하는 상록 작은키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는 아니고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다. 여름에 피는 꽃은 꽃잎이 대개 6장인데, 꽃 색깔은 약간의 우윳빛이 나는 듯 한 흰색이고, 꽃잎이 좀 두텁다. 꽃은 흰색이다가 점점 노래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을에 익는 주황색의 껍질을 가진 열매는 우리나라 전통염료 중 대표적인 황색 염료다. 치자(梔子)라는 이름은 열매 모양이 손잡이가 있는 술잔 ‘치(巵)’와 닮았다고 여기에 나무목(木)자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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