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눅 13:22-30)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특권의식’이라 생각합니다. 자기는 특권을 가졌으니 충분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권은 다른 말로 하면 ‘기득권’이 되겠지요. 기득권을 가졌으니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특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거나, 운동하거나, 예술활동을 하는 것 모두 특권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특권이 과연 그들 개인의 것일까요? 내 것이니 나만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요? 민주 정부 때 보수층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을 하고 공격을 했습니다. 보수 정부인 지금도 지난 정부를 같은 말로 공격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눈으로 볼 때 지금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국민 통합이 아니라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판단을 하며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권력이 특권이고, 자기가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도 특권을 놓지 못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지지를 받았고,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권은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헌법에 나와 있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정치인들은 국민에게서 위임 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특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재능이나 부도 자기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특권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할 때,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사회에 ‘빚을 진 사람’이라는 ‘부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기 가수가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인기가 많아 돈을 많이 벌었으니 내 맘대로 쓴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노력, 봉사자의 모습을 보일 때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것입니다.
특권은 종교에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목회자나 다른 종교인은 특권층이 되었습니다. 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역시 젊을 때부터 대접 받는 일에 익숙하도록 훈련 받았으니 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야 할 목회자들이 주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니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정작 주님은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대속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목회자들이 대접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도들은 특권의식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신도들도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나는 축복을 받아야 하고,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한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특권의식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역시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욕심일 뿐입니다.
어쩌면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역시 우리와 같은 특권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많은 특권 세력이 있습니다. 때로는 특권 세력이 부딪쳐 충돌하기도 합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면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럴 때는 눈치를 잘 보고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기득권 세력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인들, 유대인들과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되려고 하는 예수님을 둘러싼 세력의 충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반발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방법에서 두 세력이 차이가 나서 충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특권을 주장하고, 다른 민족은 이방인, 죄인이라 하여 배척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비난 받고 구원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세리와 창녀, 이방인, 장애인, 병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듭니다. 예수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은 지켜보기만 하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율법으로 고발하고, 정치적인 힘으로 억압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합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 공격하는 일이 심해지자 따르던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분이 과연 ‘왕이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이 쉬운 것도 아니고,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까지 말씀하시니 기대하는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쯤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제자들까지 떠나게 되지요. 한마디로 예수님이 시작하신 ‘예수 운동’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구원 받는 자가 적으냐, 많으냐?’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많으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쪽이 대세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질문한 사람이 볼 때 예수님의 지지세력이 줄어들고 있어 예수 운동이 실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많으냐, 적으냐를 두고 논쟁하는데 시간 낭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 받았느냐, 적은 사람이 구원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구원 받았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구원 받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7:14) 좁은 문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을 얻는 길을 마다하고 멸망의 길을 선택합니다. 망하는 길이라기보다는 생명 없는 길이라는 뜻이겠지요.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버리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의 특권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특권을 얻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사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장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니다. 좁은 문은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의 평화와 평등, 정의를 위해서, 누군가 가야 할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때가 지나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그때는 집주인이 문을 닫을 때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예수님은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처녀는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지만, 미련한 처녀는 닫힌 문을 두드려보지만 소용 없고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5:1-10)
오늘 말씀에서도 문이 닫힌 후에는 문을 두드리고,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만 내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유대 백성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문이 닫힌 후에는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주장하거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외쳐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방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여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인이라고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 구원 받은 자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보인다면 문밖에서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주님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모른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27절)라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나를 만드셨고,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신다’고 하니, 당연히 나를 아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았기에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당연히 주님은 나를 아실 것, 살피실 것이라고 믿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주님은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지식도 좋고, 교리도 좋고, 신앙고백과 믿음의 확신도 좋습니다. 열심히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믿음의 행위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왜 문이 닫혔느냐’고 말하면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 신앙의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모든 이를 위한 선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 사랑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