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얼짱'이 득세하던 춘추전국시대가 최근 몇 주 동안 단 한 명에 의해
평정됐다. 인터넷 검색어 순위 1위로 떠오르며 '원조 얼짱'의 칭호를 받은 이는
놀랍게도 종영된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응삼이' 박윤배다.
기현상으로까지 느껴지는 응삼이 얼짱 신드롬, 미디어 평론가 변정수가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2003년 인터넷 매체 최고의 화두는
'얼짱'이 아닐까 싶다. '최고'를 뜻하는 속어 표현 '짱'을 활용해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얼짱'이 만들어졌다.
이 말은 적어도 인터넷 매체에 친숙하게 접근하는 계층에게는 더이상 은어가
아닌 일상 용어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라는
기술적 배경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일상'은 더 이상 뉴스의 주목 거리가 되지 못하는 만큼, 최근 얼짱의 열기도
처음보다는 시들해지고 있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얼짱을 다시 네티즌 화제의 중심에 등장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응삼이' 역을 맡았던 배우 박윤배의
데뷔 당시 사진이 인터넷상에 출현한 것이다.
그야말로 '원조 얼짱'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고
얼짱이 새삼스러운 화제로 다시 등장한 계기가 됐다.
'응삼이'는 인기 검색어 순위 목록에도 등장했다. 그동안 얼짱의 칭호를
받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어느 특정인이 얼짱이라는 것 자체는
(그 주변의 친지가 아니라면) 이제 별다른 화젯거리가 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응삼이가 때아닌 화제의 중심에 선 이유는 뭘까?
응삼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이미 상징하듯 널리 알려진 그의 현재 이미지가
얼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경이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미의 기준이란 그 본질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얼짱이라고 할 때의 미의 기준, 즉 '누가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획일화되어 있으며
'개성의 발현'이라는 미의 본질과는 무관해졌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지적되는 바이지만, '얼짱'에 대한 열광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모 지상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또 그 때문에 타고난 외모를 뜯어고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풍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지 '내실보다는 포장'을 더 중시하는 외모 지상주의를
개탄하는 것만으로는 '포장보다는 내실이 더 중요하다'는 도덕 교과서적인
맥 빠진 결론 이상의 논의로 나아가기가 어려워진다. 문제는 여전히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모범 답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우리 사회의 갑남을녀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처럼
어리석은 일에 거역하지 못하고 휘말려들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이다.
첫번째 이유로는 사람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 또는 부재를 들 수 있다.
다양한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라면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람 값'을
가질 것이며 그것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굳이 외모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들을
되짚어보자. 예컨대 우리는 학력이나 학벌, 직업, 재산 상태 등등에 따라
사람 값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매기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못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번듯하게 내세울 만한 직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못생겼다는 이유가
하나쯤 더 추가된들 이상할 것은 없다.
외모 지상주의는 사람 값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비정한 사회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면 왜 하필 외모인가. 또는 어떻게 외모가 다른 평가 기준들을
압도하는 유력한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공적인 시스템이 아닌
사적인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우리 사회의 배경을 떠나서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일이다. 보기에 좋은 외모는 일단 보는 사람에게 정서적인
호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마치 고향이 같거나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에게
더 진한 정서적 유대를 느끼는 것과 같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다. 외모를 파악하는 데는 상대방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 없으며,
보이는 그대로를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만일 우리 사회가 공적인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면 이 모든 개인적인 호감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호감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무슨 이유로든 누군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것보다야 나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호감을 짜내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적인 인간관계에 의해 삶의 향방이 좌우되는 사회에서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개인의 커다란 자산이 된다. 개인사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도 그 일이
가능하다면 이처럼 강력한 무기도 없다.
사람 값을 높게 평가받을 만한 요소를 이미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뒤로 밀리고마는, 그리고 한 번 밀리고 나면 여간해서는 만회할 기회가
없는 무한 경쟁 사회라는 조건도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면이 있는데도 수줍게 감추어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때로는 실제보다 부풀려서라도 꺼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낙오한 자에게 아무런 배려를 베풀지 않는 사회에서 남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이미 '성취'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것이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가 인터넷 매체의 양방향성을 만나
얼짱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핵심 동력이다.
덧붙여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제멋대로 사람의 값을 매기는
비인간적 평가 기준들 가운데 오로지 '신체'만이 온전히 그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이런 얘기다. 예컨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누구나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눈에 띄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요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신체적 조건은 타고났건 돈을 들여 뜯어고쳤건 온전히 그 자신에게
귀속한다. 사람이 아닌 물건은 내실과 포장을 분리할 수 있지만 사람의 신체는
그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며, 학벌이나 직업, 재산 따위는
그저 그 사람이 지닌 포장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사람조차도 신체를
인격으로부터 분리해 단지 그 사람이 '지닌' 것으로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더 나은 외모를 위해 자신의 신체에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게으르고 뻔뻔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미용 산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산업 구조가 자리잡으면서 미의 기준은
점점 더 획일화, 표준화되어 간다. 그것은 오로지 객관적인 점수로밖에는
표현되지 않는 입시 성적을 위해 공급자들이 줄을 선 대규모 사교육 시장의
이해 관계가 대학의 서열화를 더욱 첨예하게 부추기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얼핏 보기에 미용 산업이나 사교육 산업은 외모 지상주의나 학벌 지상주의에
일방적으로 기생하고 있는 부산물 같다. 하지만 그 속내를 찬찬히 헤집어 보면
그것이 기생이 아니라 실은 공생이며 오히려 미용 산업의 이해 관계야말로
외모 지상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핵심적 동력임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는 외모가 성별이나 나이,
인종처럼 사회적 차별의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루키즘(lookism)'이라는 말로 개념화하기도 했다. 그저 개탄스러운
세태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외모주의는 그 기저가 너무 깊고
그 작동 기제가 너무 정교하다. '얼짱 현상'은 단지 수면 위로 올라온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차별 기제에 맞설 수 있는
좀더 치밀하고 견고한 저항의 근거가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난 왜 얼짱으로 이효리가 언급되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보는 이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응삼이의 경우는 2:8 가르마로 더 유명한 것 아닌가? 그러한 고전적 촌스러움이 옛 사진한장의 발견으로 거꾸로 뒤집힌다는 것도 웃기는 미디어의 장난이다. 얼짱이니 미디어 평론가니 하는 모든 족속이 감사해야 할것은 미
디어의 지저분함과 저속함일 것이다. 미학이라는 고상함이 발 붙일 곳이 없는...그러나 막상 문제는 삶을 단순히 살아가는 다수의 대중들이 그 미디어가 사촌이나 멀리 있는 애인보다 더 친근하고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다. 미의 정치화, 즉 강금실 장관을 이효리에 비유하는 언론인들도 마찬가지 미디어 일꾼들이 아닌가?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단순하기도 하여 대중이 미디어에 휘청대는 건 대중의 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대중을 우롱하는 미디어의 자각이랄까 의무랄까 힘이 있으면 남용하게 되는군요. / 많이 가진자는 그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도 크다고 생각됩니다만 권한과 의무는 비례해야 하는게 옳은게 아닌가 합니다.
정론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니라 신기하고 재미있고 우스운 세상이기도 한가봅니다. 결국 사람이 상품화되고 연예인이든 인터넷 소설이든 팔리는 것이면 상인들은 뛰어들고 일본처럼 성이 상품화되는 정도는 아니었으면 바랍니다. 문화를 상품화하여 파는게 더 가치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 이상 시험전 주저리였습니다. -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건 나쁘지않다고 생각합니다.단지 그 아름다움의 추구기준이 예쁜 얼굴만이라는 것과 상업적인 색이 짙다는 게 문제겠죠.인간다운 게 가장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얼짱의 캠빨과 가식은 또 언론의 경박한 얼짱신드롬 플레이는 그리 곱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네요..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말이죠.그저 감상용이면 눈이 즐겁고 말겠지만 그걸 현실과 착각하는게 되면 그건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외모지상주의를 불러오게 됩니다.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선택이지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모두가 다 가꾸니 획일적으로 따라 가꾸는 건 마리오네뜨 인형되고자 버둥거리는 거겠죠.외모를 가꾸기 이전에 내면을 가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눈요기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시대네요.자신의 외모에 불만되는 점을 고쳐 자기만족을 얻는거라면 뭐라 그럴 권리는 없지만 단지 연예인의 얼굴과 같이 해달라고 하는건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이젠 얼굴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뜯어먹어야 할 것 같아 씁쓸하네요.지나치면
물론 내면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상대방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건 그리 쉬운건 아니죠. 특별한 재주(연극)가 있어서가 아니면 상대방의 행동과 눈을보면 속일 수 없는게 사람의 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아님, 보는사람의 마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대단하리라 봅니다. 이를테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것과 순수한 마음으로
보는것과 서로의 차이는 있겠죠. 모든면에 열심히 생활하는 상대를 보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게 아닐까여? 아무리 치장하고 가면을 써도 언젠가는 변하는게 사람의 마음이라 생각 합니다. 마음과 행동은 함께할 수 밖에 없구요. 좋은 생각과 바른행동은 저절로 만들어 지고 외면 적으로도 보여 진다고 생각
첫댓글 혹시 글 읽는데요..^^; 노래가 방해된다면 가차없이 esc 누르시는거 아시죠~?^^;
글이 참 길었꾸려 읽는데 힘들어 죽느줄 알앗따..ㅎㅎ
난 왜 얼짱으로 이효리가 언급되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보는 이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응삼이의 경우는 2:8 가르마로 더 유명한 것 아닌가? 그러한 고전적 촌스러움이 옛 사진한장의 발견으로 거꾸로 뒤집힌다는 것도 웃기는 미디어의 장난이다. 얼짱이니 미디어 평론가니 하는 모든 족속이 감사해야 할것은 미
디어의 지저분함과 저속함일 것이다. 미학이라는 고상함이 발 붙일 곳이 없는...그러나 막상 문제는 삶을 단순히 살아가는 다수의 대중들이 그 미디어가 사촌이나 멀리 있는 애인보다 더 친근하고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다. 미의 정치화, 즉 강금실 장관을 이효리에 비유하는 언론인들도 마찬가지 미디어 일꾼들이 아닌가?
미를 추구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있었던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술로 승화를 하던 춘화로 나타나던 그 시대의 미의 기준은 있었다고 생각되구요. 현재에 나타나는 미에 대한 관념이 전과 다르더라도 사회현상이라면 그것이 좋던 나쁜던 사실은 사실로...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단순하기도 하여 대중이 미디어에 휘청대는 건 대중의 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대중을 우롱하는 미디어의 자각이랄까 의무랄까 힘이 있으면 남용하게 되는군요. / 많이 가진자는 그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도 크다고 생각됩니다만 권한과 의무는 비례해야 하는게 옳은게 아닌가 합니다.
정론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니라 신기하고 재미있고 우스운 세상이기도 한가봅니다. 결국 사람이 상품화되고 연예인이든 인터넷 소설이든 팔리는 것이면 상인들은 뛰어들고 일본처럼 성이 상품화되는 정도는 아니었으면 바랍니다. 문화를 상품화하여 파는게 더 가치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 이상 시험전 주저리였습니다. -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건 나쁘지않다고 생각합니다.단지 그 아름다움의 추구기준이 예쁜 얼굴만이라는 것과 상업적인 색이 짙다는 게 문제겠죠.인간다운 게 가장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얼짱의 캠빨과 가식은 또 언론의 경박한 얼짱신드롬 플레이는 그리 곱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네요..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말이죠.그저 감상용이면 눈이 즐겁고 말겠지만 그걸 현실과 착각하는게 되면 그건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외모지상주의를 불러오게 됩니다.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선택이지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모두가 다 가꾸니 획일적으로 따라 가꾸는 건 마리오네뜨 인형되고자 버둥거리는 거겠죠.외모를 가꾸기 이전에 내면을 가꾸
는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그러는것이 오래도록 자신을 아름답게 해줄거라 생각합니다.지금 TV에 중국의 성형열풍에 대해 나오네요..경극배우가 여자역할을 맡기위해 턱을 고치고 전신성형이 유행한다는데 4500만원이라고 하네요...후...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심한거 같네요.눈살이 찌뿌려 지네요...얼굴마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눈요기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시대네요.자신의 외모에 불만되는 점을 고쳐 자기만족을 얻는거라면 뭐라 그럴 권리는 없지만 단지 연예인의 얼굴과 같이 해달라고 하는건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이젠 얼굴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뜯어먹어야 할 것 같아 씁쓸하네요.지나치면
아니 한 것만 못 한다는 말을 잊지 말았으면 하네요.순리에 맞게 사는것보다 모든지 거스르면서 사는 것을 좋아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 되어가나 봅니다...이야기가 길어졌네요...고만 주절대고 광년이짓이나 하러 가야겠네요......맨정신으로 살기에는 너무 요지경이니...
교수님과 수영형, 그리고 黑林이라는 분.....^^ 정말 대단한 리플논평을 잘 들었습니다.....^^ 지상외모주의와 디지털문화..... 외모보다 내적중심을 가꾸는 자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분의 멋진 리플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앗~!ㅋ 진영이도 리플감사~^.^;ㅋ)
물론 내면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상대방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건 그리 쉬운건 아니죠. 특별한 재주(연극)가 있어서가 아니면 상대방의 행동과 눈을보면 속일 수 없는게 사람의 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아님, 보는사람의 마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대단하리라 봅니다. 이를테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것과 순수한 마음으로
보는것과 서로의 차이는 있겠죠. 모든면에 열심히 생활하는 상대를 보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게 아닐까여? 아무리 치장하고 가면을 써도 언젠가는 변하는게 사람의 마음이라 생각 합니다. 마음과 행동은 함께할 수 밖에 없구요. 좋은 생각과 바른행동은 저절로 만들어 지고 외면 적으로도 보여 진다고 생각
합니다. 일 할땐 열심히 놀땐 신나게, 언제나 시간은 내가 만들어 가듯이 인생도 마음 먹기 나름이고 보여 지는것 또한 ^*^ 경아맘 이지롱. 울 카페 모든분들 연말 자~알 보내 시구여, 판피린 에프예영(감기 조심하세영)
휴~~~ 모든게 미완성이네요..
베스트 갔다온겨? 그래 공은 잘 맞고? 언제 보지? 다시 연락하나? 물건은 받았는지? 사진은 그리로 보내면 되는지? 건강은 한지? 모두가 궁금하군. 그대는 안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