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사의 소개글
보현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신라시대에 불교 4보살 가운데 한 분인 보현보살이 직접 창건하였다는 설이며, 신라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리 돌로된 배를 타고 천축국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문수사가 지금의 한송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은 말하였다.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
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졌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나 이것이 보현사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낭원대사의 창건설은 한 고승의 생애가 뒷받침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이 설을 따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창 경내의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제192호)를 참고하여 대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절의 창건자는 대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낭원대사는 보현사를 크게 중창하고 참선도량을 이룩하여 이절을 사굴산문의 대표적인 선찰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낭원대사의 창이후 이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대관령을 분기점으로 하여 내문수도량 월정사와 함께 외보현도량의 명성을 이어 수행승의 요람으로 이어 왔다.
비록 자세한 사찰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입구에 있는 20여기의 부도가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산중사찰의 정적과 자연의 아름다움, 신앙과 수행의 주건을 갖춘 사찰로서 현재 보현사에는 대웅보전(문화재자료 제37호)을 비롯하여 영산전, 삼성각, 만월당, 범종각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제191호과 보물 제192호 낭원대사오진탑비가 있다. 이 외에 20여기의 부도와 대웅전앞에 사자모형의 석물과 석탑이 있다.
★등명 낙가사 소개글
강릉시청에서 동남쪽으로 12km 떨어진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낙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처음 세워서 수다사라고 했다. 고려에는 등명사가 중창되어서 많은 스님들이 수도 정진한 사찰이다.
조선 초기에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한양에서 정동에 위치한 등명사를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폐사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정동에 등명의 불을 끄면 불교가 망한다는 생각으로 전설에는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겨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정동에 있는 큰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동해로 흘러 용왕이 노하여서 안질을 앓게 되었다고 하자 왕명으로 사찰을 폐사시켰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지만 어디까지나 등명사를 없애기 위한 묘략이며 억측이다.
1957년에 낙가사란 이름으로 암자를 짓고 1980년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등명락가사라 부르게 되었다.
명사 오층석탑이 연화무늬로 장식된 기단 위에 세워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수중사리 탑이 바다에 모셔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신비한 약수가 나와서 온갖 병에 효험이 대단하다고 한다.
★강릉 보현사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