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정난주 길(2)
대정향교
대정향교는 바굼지 오름 아래 산방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1420년 세종 2년때 지어진 유서깊은 곳입니다
제주에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키고 학문을 증진시키고자
세 곳에 향교가 있었는데요
향교는 지금으로 따지면 각 도립 대학의 역활을 하는 곳과 같습니다
제주시 용담동에 제주향교
성읍의 옛 지명인 정의현에 정의향교
그리고 바로 이 대정현에 대정향교가 그렇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향교의 입구는 정말 작고 고개를 숙여 겸손하게 들어가야 하는 작은 문입니다.
단산(바굼지오름)
단산을 다른 이름으로 ‘바굼지오름’이라고 한다.
단산(바굼지오름)은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와 안덕면 사계리 경계에 있는 오름이다.
바굼지오름은 ‘바구미오름 또는 바구니오롬’의 차자 표기(借字表記)이다.
‘탐라순력도’에는 단산(바굼지오름)을 파군산(破軍山)과
파군산악(破軍山嶽)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름의 형체가 대바구니(대를 얽어서 만든 바구니)와 같다는 데서
‘바고미오롬’이라 부르다가 ‘바굼지오롬’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산야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단산(바굼지오름)이 대바구니만큼 보였다고 해서 ‘바굼지오름’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단산(簞山 : 대나무 광주리 단)이라고 표기를 했다.
‘바굼지’는 ‘바구리’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그와 가까운 말이 ‘바구미’이다.
‘바구미’는 박쥐의 옛 이름으로 오름이 모양새가
박쥐와 닮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굼지오름’의 총면적은 약 339,982㎡, 둘레 2,566m, 높이 158m이다.
오름의 서사면 기슭 자락에는 태고종 단산사(壇山寺)가 자리를 잡고 있고
남동쪽 기슭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제4호인
대정 향교(大靜鄕校)가 위치해 있다.
사계리 발자국 화석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위치.
이 곳은 "제주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산지" 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 말기인 1만9000~2만50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섯알오름
송악산 북쪽에 알 오름 세 개가 동서로 뻗어 있는데, 동쪽 것을 동알 오름이라 하고,
서쪽 것을 섯알오름이라 하고, 가운데 것을 셋알 오름이라 한다.
한자로 쓸 때는 각각 동란봉·중란봉·서란봉으로 썼다.
섯알오름의 표고 40.7m 비고 21m
셋알 오름 꼭대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설치한 고사포 진지가 있고
그 남쪽 섯알오름 기슭에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학살터가 있다.
섯알 오름 서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이용했던
비행장터와 벙커가 있다.
학살터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의 무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좌익세력이 북한 공산군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각 지구 계엄사에 좌익분자 체포.구금을 명령했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보도연맹원, 4.3사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사람과 무고한 양민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검거했다.
이 때 검거된 대정. 한림 일대의 제주도민이 193명에 이르렀는데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부터 섯알오름에서 모조리 학살당했다.
새벽 2시에 처형된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이 수습이나마 했으나,
새벽 5시에 처형된 132명은 사건 은폐를 위해 구덩이에 파묻고는
유족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전쟁이 끝나고 6년 뒤에야 비로소 시신을 찾았지만
구덩이에 엉켜 있는 팔, 다리, 등뼈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유족들은 132명의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누구의 시신인지 가리지 않고 칠성판 위에
머리 하나, 팔 둘, 등뼈 하나, 다리 둘 등을 이어 맞추어
132명의 봉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백조일손지묘'라 지었다.
재판이나 자신을 위한 변론 한마디 못해보고
죽음으로 내몰린 젊은이들의 억울함이나,
남은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알뜨르는 말 그대로 '아랫 쪽에 위치한 넓은 들'을 말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비옥한 넓은 토지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비행장으로 건설되었다.
수십만평에 달하는 알뜨르 비행장과 비행기 격납고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비행장은 일제시대 당시처럼 잔디 활주로가 그대로 남았있다.
이규석 삼부자 순교자묘
대정읍 하모리 출생
1900년 서귀포에 하논성당이 설립되자 가족과 함께 천주교 입교,
김원영 신부를 도와 대정군내 마을에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1년 신축교안때 고양 모슬포에 은거하다가
6월 1일 이재수 진영에 잡혀 두 아들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규석은 친족인 이재수의 배교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순교의 길오 기꺼이 나아갔다.
60년이 지난 1961년 후손들이 그의 순교를 기려서
무덤 앞에 순교비를 세움으로써 제주 교회의 표상을 기억하게 되었다.
모슬포 성당
1901년 신축교안이 발생한 이후 반가톨릭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 모슬포에
가톨릭 교세가 호전되기 시작된 것은 6.25 전쟁 무렵부터다.
1951년 3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와 중국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등
군사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안달원 베드로 신부와 메리놀회 소속의 설리번 신부가
훈련병 및 중국군 포로 신자들의 사목을 위해 파견된다.
1955년 11월 육군 제1훈련소의 3대 군종 김덕제 치릴로 신부가
새 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군종 신부의 대민 사목은 종료되고,
이 지역 신자들은 서귀포 본당 관할의 모슬포 공소로 편입되었다.
1957년 초 당시 서귀포 본당의 주임 브래디 신부는
이 지역에 본당 신설 계획을 세운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
1958년 6월 27일 서귀포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사랑의 집
1952년 훈련소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군인교회인 강병대 천주교회가 준공,
군인과 인근주민, 피난민 등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러나 모슬포 지역의 기지촌화로 교우 수가 증가하여
이들을 위하 별도의 사목이 필요하게 되자,
1952년 말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를 매입, 이듬해 완공하였다.
신축과정에서 중국군 포로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건축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여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첫댓글 이 나라 위정자,
언론인, 고위공직자
이들은 누굴위해
종을 울릴까,,,~?
서럽고 서런 척박한
제주여,,,ㅠ
감사합니다.
제주도는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요.
그래서 억세고 강인한 성품을 가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