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00 (3권 5. 김홍신. 펌글)
어느날 아침이었다.
신문을 펼쳐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에 내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박명호군 유괴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짜리의 유괴사건이 이렇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그 소년의 외할아버지가 대 재벌인 김갑산 영감이란 사실이었다.
그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박명호 소년의 아버지는 김갑산 영감의 사위이자 내가 치도곤을 냈던 비서실장이었다.
나는 사건의 윤곽을 대번에 짚을 수 있었다.
내가 혐의자 명단에 버젓하게 올라간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유괴되던 당시의 상황과 그 뒤에 날아온 협박 편지와 전화내용이 상세하게 공개되었다.
명호는 전교 수석을 하는 수재형의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재벌 그룹 비서실장이란 사실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 소년 외할아버지가 김갑산이란 사실만 가지고도 이 유괴사건의 배경은 돈이었다.
명호는 저녁식사를 한 뒤에 아파트 공원에서 검정색 자가용차로 납치되었다.
협박 편지엔 현금 1억원을 요구하는 내용과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살해하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악필이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글씨 같아 보였다.
사건이 공개수사로 바뀌면서 김갑산 영감은 역사상 최고액수의 현상금을 내놓았다.
내가 몇 번이나 김갑산 영감과 접촉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김갑산 영감도 나를 의심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공개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두번이나 경찰서로 끌려가 반복되는 조사를 받았다.
박실장을 구타한 사건과 박실장의 비밀금고를 털어낸 일 때문에 쉽게 혐의가 풀리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그렇다고 가슴을 열어 보여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줄 재간은 없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명호를 유괴했다는 겁니까?"
하도 귀찮아서 이렇게 뻗대 보았다.
박형사는 지친 표정으로 혐의가 짙게 가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만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날 의심하는 겁니까? 이거 생사람 잡지말고 얘기 좀 해주십쇼."
"생각해 봐 이 사람아. 최근에 박실장하고 감정 산 사람이 자네 밖에 없잖은가 말야.
박실장 입으로도 자네밖에 원한 살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리고 자네 행동을 조사해 봐도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라구.
자네가 뭐 잘났다고 남의 집안 일에 뛰어들어 감놔라 배놔라 그랬느냐 말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자넬 의심하니까,
우리도 자네가 정말 범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서 우리도 좀 편해져야 할 거 아닌가 말일세."
"김갑산 영감도 날 의심합니까?"
"그 영감은 자넬 믿더구만."
"그럼 누가 의심한다는 겁니까?"
"얘기했잖아. 박실장과 박실장 마누라가 자네밖에 의심할 데가 없다는 거야. 박실장은 자네한테 맞아서 아직도 몸이 성칠 못해."
"걸려도 되게 걸렸네.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기만 하면,
그 새끼 코뼈를 작신 부러뜨릴 겁니다. 이거 사람 환장하고 펄쩍 뛰겠네."
박형사는 나를 노려보았다. 내 말투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내 심정 돼보십쇼. 그 새낄 그냥 두고 싶은지."
"그건 알아.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의 안타까운 거 생각해 봐."
"멀쩡한 자식 이런 꼴 당하는 걸 우리 어머니가 알아보쇼. 아마 박형사님을 물어뜯어서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조사해 봤으니까 알 거 아닙니까. 내게 분명한 혐의가 있습니까?"
"없으니까 캐는 거 아냐."
"캐봤자 별 수 없습니다. 난 범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애나 유괴하는 그런 치사한 놈은 아닙니다.
돈 없으면 혀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그런 치사한 짓은 않는다구요.
소매치길 하든지 남의 집 담을 넘어가도 나는 먹고 사는 놈예요.
지금이라도 김갑산 영감한테 가면 몇백쯤은 얻어다 쓸 수 있는 놈이라구요."
박형사는 나를 노려보았다.
눈동자 속에 원망의 그림자가 스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넌 탈야 임마. 보통으로 살았으면 벌써 나갔을 거 아냐."
"내 참, 내 성질대로도 못 살 바엔 칵 죽고 말지요. 눈뜨고 못 볼거 많은데 어떻게 그냥 살란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입씨름은 매일 그런 식이었다.
진짜 범인이 나 여기있소 하고 나오기 전엔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하나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다른 범죄는 신문의 사회면을 심심찮게 만들거나 사람 사는 땅에,
양념이거니 생각하고 봐주실 수도 있지만, 어린애를 유괴해 가는,
이 더럽고 치졸한 범죄만은 하나님의 힘으로 어떻게 처치해 주십쇼.
다른 건 몰라도 유괴범만은 씨를 말려 달라구요.
그런 녀석들은 데려다가 지옥에 있는 제일 독한 마귀한테 손 좀 보게 해주세요.
세상의 기록 가운데 가장 무서운 고문은 중국사람들이 써먹던 대나무 형벌이랍니다.
발가벗긴 뒤에 대나무 쪼갠 것을 맨살 위에 대고 꽁꽁 묶은 뒤에,
대나무 한개를 쑥 잡아 빼면 살점이 묻어 나온답니다.
다시 죄어잡고 한개를 빼고 또 죄고 한개를 빼는 형벌을 하나님은 아시겠죠.
유괴범들은 지옥에 끌고 가서 하나님이 만들수 있는 최고의 고문을 해 버리시라구요.
독할 땐 독해야 돼요. 하나님. 맘 독하게 먹고 근절시켜 주세요.
하나님 좀 한번 믿어보게 말입니다.'
의심이 갈 만한 사람들의 알리바이는 정확해서 더 이상 조사방향을 고정시킬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경찰서를 나서며 박형사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내가 진짜 범인처럼 보였습니까?"
박형사는 내 손을 움켜쥔 채 뒷머리를 긁적였다.
"학생이 젤 의심 가게 생겼더군. 하는 일도 없다는 게 지독한 지능범처럼 보이더라 이 말야.
애 잃은 부모도 학생을 제일 의심하고 있어."
"굶어 죽으면 죽었지 유괴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박실장한테 아직도 감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장인을 없애서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내니까 말입니다."
"이해하게나. 자네, 정초에 액땜했다 생각해. 살다보면 별의별 꼴 다 보는 거야."
박형사는 내 등을 밀었다.
나는 경찰서 마당에 늘어서 있는 신문사와 방송국 차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만약 유괴된 애가 이름없는 집 애였다고 해도 저렇게 시끌덤벙할까?
애를 유괴당했을 때의 부모 마음은 없는 집 애나 있는 집 애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집으로 온 지 하루만에 김갑산 영감의 전화를 받았다.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저도 엊저녁에 나왔습니다. 연락할 길도 없고 해서 전화도 못 드렸습니다."
김갑산 영감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위와 자식한테 당할 때도 정정하던 늙은이였다.
"이리 좀 오게. 할 얘기가 있네."
김갑산 영감은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오라고 했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김갑산 영감이 오라는 곳으로 갔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상속을 끝내고 돌아설 때의 모습과 또 달랐다.
"자넬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만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고마우이. 자네라면 믿을 것 같아서 불렀네. 처음엔 나도 자넬 의심했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네. 경찰에서 자네가 죄 없다는 걸 얘기하길래 안심이 되더구만.
내가 다급한 마음에 자네까지 의심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긴히 자네한테 할 얘기도 있었네."
"마음놓고 하세요. 어리지만 저를 믿어 보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김갑산 영감은 담배를 빼어 물고 내 눈을 조용하게 응시했다.
"자네도 한대 태우지."
"괜찮습니다."
"가리지 말게. 나한텐 괜찮아."
나는 담배를 받아 불을 붙였다.
김갑산 영감이 길게 연기를 뿜었다.
"자네가 이번 일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네."
"말씀드리지요. 신문에 난 얘기하고 조사받으며 느낀 대로라면 이번 명호군 유괴사건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유괴 같습니다. 그리고 집안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이거나,
수사기관에 오래 근무해서 앞뒤를 기가 막히게 잘 잰 사람 소행이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정이 좀 복잡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입니다. 이건 순전히 제 느낌입니다."
"또 다른 건 없나?"
"감히 말씀드린다면 가족내에 범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갑산 영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따님이 의심스럽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상상일 수도 있지만....."
괴로운 표정의 김갑산 영감의 얼굴을 쳐다보며 집안 사정이 퍽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역시 예리하군."
"꼭 맞는 건 아니지만 내 집안 문제라 부끄러운 얘기들뿐일세."
"말씀해 주시죠."
내 호기심이 발끈 일어서기 시작했다.
"경찰도 다 아는 사실이네. 그쪽도 조사를 철저히 한 모양인데 아무 단서도 잡을 수 없다 뿐이지."
"무슨 일인데요?"
"내가 돈 버는 일에 눈이 어두워 자식 간수를 잘못한 죄지만.... 두 애 사이가 안 좋아.
서로 내 주장이고 별거했다가 만나고 해서 내 속깨나 썩인 애들이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조사할 때 알았던 거지요."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나 해서 얘길세. 저렇게 내버렸다가 막상 해결됐을 때,
이 늙은이가 또 창피당하게 될까 봐 그러네. 이걸 어쩌면 좋은가 이 말일세."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없네. 그저 느낌일세."
"제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그러세요? 부르셨을 땐 그만한 생각이 있으셨을 텐데요."
"으음."
신음하듯 했다.
그도 이제야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