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기나 긴 문학 여정’
21세기에 접어들어 대하소설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문학사에서 대하소설의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고 정작 사라진 것은 긴 호흡의 독자군이라는 것이다. 세계 소설사에서 회자되는 대하소설들의 작품 제목은 유행하지만, 실제 책을 통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당사자들만이 열심히 읽고, 해석하고, 요약하여 전파한다. 그러면 대중은 영상매체를 통해 대하소설을 소화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의 대표적인 대하소설 <토지>를 여러 번 통독한 나로서는 그 소설에 대한 독후감과 줄거리만이라도 언급하는 것이 도리처럼 여겨진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1973년 제 1부의 첫 단행본이 발간되었다. 소설집은 여러 판본을 거치다가 2023년 이후, 마로니에 북스가 20권으로 된 ‘토지’ 전집을 발간하고 있다. 소설은 전 5부 25편 361장, 두 편의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완간 30주 년을 기념하여 다산북스에서 한정판을 새롭게 단장하여 출발하였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 말인 1897년 한가위에서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격동기의 시간 배경으로 하고, 공간 배경은 평사리, 간도, 진주 등으로 옮겨가며 등장 인물들도 수 백 명이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지만 ,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본다.
1897년 한가위부터 1908년까지 10년 간,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1부가 펼쳐진다. 당시 민중들의 애환이 탄탄한 서사를 바탕으로 문학성 높게 잘 표현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백미로 꼽힌다. 대지주인 최참판 댁과 소작농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펼치는데 최참판 가의 유일한 혈육인 서희가 친척 조준구의 악행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밀려난 소작인들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평사리 시대를 마무리 한다.
1910년경부터 약 7-8년 간 용정에 정착한 서희 일행을 중심으로 2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제 치하의 간도 조선인 사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용정에서 지략으로 거부가 된 서희는 실리를 취하여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인이었던 길상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우리 문학사상 가장 애절한 러브스토리라 할 이용과 월선의 슬픈 사랑도 원선의 죽음으로 2부에서 막을 내린다.
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진주로 금의환향한 다음 해인 1919년 가을부터 1929년 광주 학생 운동까지 3부를 이룬다. 3.1 운동과 그 여파를 사회적 배경으로 하여 봉순(기화)의 가슴 아픈 삶이 독자를 울린다. 봉순은 길상을 사랑하지만 서희에게 뻿기고 서희와 사랑하는 사이였던 상현의 아이를 낳는다. 봉순과 서희의 기막힌 인연의 모습이다. 이후 봉순은 요절하고, 그의 딸 양현은 서희가 거둔다. 최참판 댁을 비극으로 이끈 주인공인 김환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4부의 시대 배경은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학살까지인데 저자의 세계관이 다소 장황하게 펼쳐진다. 따라서 스토리 전개도 덜 서정적이다. 지난 시절의 주인공들이 많이 사라진 자리에 서희의 아들 등 그들의 2세들이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서사를 이끈다. 조선의 여성 유인실과 일본의 남성 오가다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갈등 구조를 펼친다.
마지막으로 5부는 1940년 경부터 1945년 해방까지가 시대적 배경이다. 서희는 주치의였던 박의사가 자신에 대한 짝사랑으로 자살하자 충격을 받으며, 봉순의 딸인 양현과 백정의 자손인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길상은 출옥하여 관음 탱화를 조성한다. 1945년 8월 15일, 서희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저들의 무도한 행위가 원자폭탄으로 심판받았다며 일본의 패망을 기뻐하는 것으로 소설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소설은 끝나서 저자 박경리는 집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가 설정해 놓은 많은 등장인물은 곳곳에 흩뿌려진 체 자취가 묘연하여 이후의 삶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 가운데 ‘토지’에 등장하는 길상, 서희, 상현, 봉순(기화) 4명의 뒤섞인 운명은 소설을 관통하는 기둥 줄거리다. 봉순을 길상을 사모하고, 길상은 서희를 사모하고, 서희와 상현은 서로에게 연정을 품는다. 서희는 유부남 상현을 물리치고 절의 동자승 출신인 길상과 정략 결혼을 택한다. 일찍이 길상의 마음을 포기하고 기화라는 이름의 기생이 된 봉순과 상현은 사랑의 패자들이 되어 자기파멸의 낙오자가 된다. 그렇다고 양반과 머슴 사이에 정략결혼을 서희와 길상이 행복한 것은 물론 아니다. 봉순이 자신을 찾아온 상현을 맞는다. ‘아씨 보고 싶어서 오셨수?’ 하며, 그를 품어준다. 이상현과 봉순 사이의 딸 양현을 훗날 서희가 거둔다. 소설은 정략결혼을 택한 서희가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그 중에 길상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사랑의 승리로 우뚝하다.
저자 박경리는 1979년 지식산업사 간행 판본의 ‘토지’ 서문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 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날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인데 생전에 그가 늘 설파한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라는, 생명 존중 사상을 그러한 언어가 없이 어찌 토로할 수 있겠는가.
<토지>는 내 문학의 고향이고 자산이다. 서사와 사유 그리고 휴머니즘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터득하는 길잡이였다. 한국인의 정서를 언어의 아름다움을 통해 십분 발휘하는 가운데 조국이란 무엇인가. 남, 녀 간의 사랑은 왜 아름다운가. 정의란 존재하는가 등 성장기의 나를 이루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나는 2부가 연재될 때 1부를 읽고, 2부가 나오면 1부부터 다시 읽고, 그런 식으로 끝까지 탐독했다. 그래서 1부는 실로 여러번이나 통독하였다.그런데 신기한 것은 월선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서 매번 눈물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영락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용이는 어머니의 반대로 무당의 딸인 월선과 맺어지지 못한다. 오랜 세월을 겪으며 야속한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용이는 어느 시 어느 때 월선이를 생각을 안 한 날이 없고, 월선은 아무런 원망도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지산의 인생에 걸어 들어온 이들을 아무도 내칠 수 없었던 용이, 그리고 그런 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린 월선.
마침내 임종을 앞두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월선을 안아 용이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월선이는 용이의 옷자락조차 잡을 힘이 없다. 서로를 내려다보고 올려다 본다.
“우리 많이 살았다. 니 여한이 없제?”
“아, 없십니더.”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절절하고 사무친 서로를 향한 먼 그리움이 그들을 살아가게 했다. 그녀의 방식으로, 그의 방식으로, 그렇게 사는 삶,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삶도 있다. 사랑이 아름다운 건그 애달픔 때문이다. 시로, 소설에는 무수한 사연이 펼쳐지지만 용이와 월선의 사랑 이야기야말로 힌국 문학사에 빛나는 러브 스토리이다.
역사소설 <토지>는 1897년 한가위서 1945년 해방까지 긴 세월을 시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동학농민전쟁, 경술국치, 섬알운동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다. 등장인물의 다양한 전달에 의해 회상과 평가가 이루어진다. 당시를 살았던 민초들이 체험한 역사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소설의 수백 명 등장인물 중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구다. 역사적 사건을 그 자체로 전경화하지 않고 탈중심적 서술 방식에 의해 등장인물의 대화와 생각을 통해서 풀어낸 것은 매우 독특한 경지이다.
생명 순환의 고리 가운데 인간의 존재 의미는 바로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소신 가운데 작가 박경리는 민초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한다. 또한 우리 강토와 인명과 인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자존십을 해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작품 전편에 초지일관으로 반발하면 반일 정서를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소설은 현대어로 느낄 수 없는 우리말의 묘미 가운데 각 지역의 방언과 속담 등 사라지는 언어표현들이 매우 풍부하고, 우리 구전 문화와 풍속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고증의 한 축을 족히 담당하고 있다. 문학사적 가치가 높아서 ‘토지 인물 사전’ ‘토지 사전’ 등 파생 자료집이 풍부하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타고난 탁월성으로 순전한 허구의 세계를 통해 그가 이룩한 역사의 형상화에서 허구의 세계가 오히려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여 성공한 역사소설이 되었다는 평가는 그 의미가 매우 심장하다. 소설 ‘토지’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밑그림으로 작용할 것이다. 가상 인물을 통한 보통의 평범한 민중의 체험 축적 안에 응혈된 우리 고유의 민족성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역사를 역사에 머물지 않도록 그리하여 현제 우리의 삶과 유리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심도 있게 꿋꿋하게 만들어 가는 일은 문인 박경리의 후예들이 감당해야 할 거창한 소명이다. 그러므로 더욱 깊이 있게 ‘토지’는 역사적 텍스트로 다루어져야 한다.
*나의 개인 생각으로는 토지를 쓴 박경리가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