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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시다. 그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며, 기독교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독생자(獨生子)가 과연 무슨 뜻인가? 이것에 대해서 공부하여 보자.... 독생자라는 단어는 원래 중국어, 한문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한문어 “독생자”라는 단어와 한글 “외아들”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같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는 “독자”라고도 한다. 즉 순수한 한글 단어의 개념으로만 본다면 독생자나 독자나 외아들은 사실 같은 의미일 뿐이다. 그런데 학자들의 이야기로는 현재 한글로서 독생자를 뜻하는 헬라어의 원어적인 의미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한다. 국어실용사전(교학사) 독생자(獨生子):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란 뜻 독자(獨子): 외아들 독(獨): 홀로 독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독자, 외아들”이란 의미 외에 "유일하고 독특하다"는 의미가 추가되어 있다고 한다. 즉 정확하게 한글로 번역하자면 "유일하고 독특한 외아들"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되며 마땅한 단어가 사실 없어서, 한문적으로 독생자라고 번역된 것이다. KJV 영어성경에서 his only begotten Son 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NIV 영어성경도 his one and only Son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제 독생자라는 단어는 정의가 쉽게 내려진 셈이다. 하나님의 외아들이란 개념 외에 오직 한분의 독특하다는 개념이 추가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 1:14, 요 1:18, 요 3:16, 요 3:18, 요일 4:9 등은 모두 예수님이 독생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독특하고 유일한 개념을 “신성”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독생자(모노게네스)라는 단어가 전혀 달리 사용된 곳이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17) 히11:17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독생자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독생자”라는 단어자체만을 본다면 신성을 포함하는 단어는 아니며,“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단어이기에 신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할 독생자(모노게네시스)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외아들, 독자의 개념과 모노게네스(독생자)라는 개념이 무엇이 다른가하는 의문에 부딪힌다. 창세기에서는 이삭을 독자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더욱이 성경에서 독생자(모노게네스)는 이러한 용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모노게네스)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눅7:12) “이는 자기에게 열 두살 먹은 외딸(모노게네스)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눅8:42)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모노게네스)이니이다”(눅9:38)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사용된 “모노게네스”를 일반적인 외아들, 독자라고 번역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눅8:42는 야이로 회당장의 외딸까지 성경은 “모노게네스”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렇다면 모노게네스(독생자)가 독특하다는 개념을 갖는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것보다 이제는 독자나 외아들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고등비평자들은 성경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안에서 분명하게 이 독생자라는 개념이 무엇을 말하는지 찾아낼 수가 있으며, 필자는 이것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다. 이 독생자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다. 구약에서 “독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야히드”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70인역(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역본)에서 히브리어 “야히드”가 헬라어 “모노게네시스”로 번역된 곳이 두 곳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모노게네시스)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22:20)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모노게네시스)을 사자들에게 건지소서”(시35:10) 윗문장에서는 “유일한 것”이 “모노게네스”로 번역된 것이다. 이 “유일한 것”이란 무엇인가. 시편 기자의 “내 영혼”이다. 시편기자는 그것을(모노게네스) 이것을 보호받아야 하고, 이것을 개의 세력과 멸망자에게서 구하여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 “유일한 것”은 시편기자의 아들이나 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가르킨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그것은 귀중한 나의 생명이요, 나의 본질적인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이며, 가장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귀하고 하나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 바로 “모노게네스”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70인역에서 헬라어 “모노게네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히드”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헬라어로 “아가페토스”라는 단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22:2, 12, 16 렘6:26, 암8:10 스가랴12:10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여기서 “아가페토스”의 의미는 “사랑하는”(beloved)의 의미이다. “가장 사랑하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당연하게 그것이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아가페토스”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특별히 아들과 관련하여서 쓰일 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아가페토스)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9:7). “이는 내 사랑하는(아가페토스)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지라”(마17:5). 우리는 마태복음 3:17절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침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지는 음성을 상기시킬 수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내가 가장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 - 이것이 “모노게네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삭은 가장 사랑하는 독자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을 때에, 그 아들 이삭은 오직 하나의 소중하고, 유일하며,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기에 “모노게네시스”라고 정의한 것이다. 예수님이 독생자(모노게네시스)인 이유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눅7:12의 나인성의 과부에게 그 외아들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요, 가장 귀한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는 과부에게 모노게네시스인 것이다. 눅9:38의 귀신들린 아들도 그 부모에게는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었기에 모노게네시스인 것이다. 특별히 눅8:42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외딸은, 그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지만, 그는 회당장 야이로의 가장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모노게네시스였던 것이다. 우리는 독생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