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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3부 3
“좋아요, 좋습니다!”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으면서 조시모프가 명랑하게 외쳤다. 그는 10분쯤 먼저 와서 어제처럼 소파 귀퉁이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잇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옷을 단정히 입고, 공들여 세수까지 하고, 머리를 빗고 맞은편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방은 일시에 가득 차버렸으나, 그래도 나스타시아는 손님들을 따라 비집고 들어와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실 라스콜니코프는 거의 건강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특히 어제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다만 안색이 매우 나쁘고, 주의력이 산만하고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어디를 다쳤거나, 그렇잖으면 심한 육체적 고통이라도 참고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술은 꽉 다물고, 눈은 타는 듯 번쩍였다. 그는 마치 무슨 의무라도 이행하듯이 마지못해 입을 놀렸으나, 그 거동에는 어딘지 불안한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손에 붕대라도 감았거나 손가락에 엷은 비단이라도 두르고 있다면, 가령 손가락에 곪아서 몹시 쑤신다든가 손에 부상을 입었다든가 아무튼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창백하고 음울한 얼굴도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들어섰을 때는 순간적으로 반짝 빛난 듯했는데, 그것도 다만 전의 괴로운 방심 상태의 표정에 한층 더 집약된 고민의 빛을 더해준 데 지나지 않았다. 빛은 곧 사라졌으나 고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환자 치료를 갓 시작한 의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다운 정열로 자기 환자를 지켜보며 연구하고 있던 조시모프는, 육친을 만난 기쁨 대신에 앞으로 한두 시간 피할 수 없는 고민을 견디려는 남모르는 괴로운 각오의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계속된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환자가 숨기고 있는 상처들을 건드려 자극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동시에 어제는 사소한 말끝에도 거의 미친 듯이 흥분하던 저 편집광이 오늘은 용케도 자기를 억제하고 감정을 감추는 솜씨에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이젠 나 자신도 거의 건강을 회복한 것을 알 수 있어요.” 상냥하게 어머니와 동생에게 키스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이 한 마디로 어머니 얼굴은 환희 빛났다. “그러나 이건 어제 식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그는 라주미힌을 돌아보고 정답게 그 손을 잡아 흔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오늘 이 사람을 보고 놀랐을 정돕니다.” 불과 10분 만에 환자와의 대화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잃고 말았던 조시모프는 세 사람이 들어온 것을 기뻐하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대로 간다면 삼사일 후에는 완전히 이전 상태로 회복될 겁니다. 그러니까 1개월, 아니 2개월... 혹은 3개월 전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오래전에 시작돼서 죽 잠복해 있던 병이니까요....어때요, 이젠 고백하시죠, 당신 자신에게도 짚이는 데가 있을 테니?” 또 무슨 일로 환자를 자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그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라스콜니코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런 뜻에서 말하는 겁니다”하고 조시모프는 마음을 놓고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오직 당신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어요. 지금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이 점만은 특히 강조하고 싶군요. 즉 당신의 병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최초의 원인, 말하자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해지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악화될 겁니다. 그 근본적 원인이 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총명한 분이니까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관찰을 시도하고 계실 테죠. 내가 보기에 당신은 대학을 그만두면서부터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규칙적인 일을 하고, 장래의 확고한 목표를 정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롭니다.....앞으로 나도 되도록 빨리 대학에 복학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만사가....순조롭게 잘될 겁니다.......”
여인들에 대한 효과를 노려서 이러한 충고를 시작한 조시모프도 말을 마친 뒤에 상대방의 얼굴을 힐끗 보고 그의 얼굴에서 어김없는 조소의 빛을 발견했을 때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었다. 풀헤리야 엘렉산드로브나가 곧 조시모프에게 인사를 하고, 특히 어제 밤중에 숙소까지 와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람이 밤중에 찾아갔었다고요?” 라스콜니코프는 놀란 듯이 물었다. “그럼 오랜 여행을 하시고 제대로 잠도 못 주무셨겠군요?”
“아니다, 로쟈, 그건 2시 전의 일이야. 집에 있을 때도 나나 두냐는 2시 전엔 자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 역시 이분에겐 무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계속 했다. “돈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하고 조시모프를 돌아보았다) 나는 왜 당신한테서 이렇게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서....그래서 나는 도리어 괴로울 지경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노골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 그렇게 화내실 것까진 없습니다.” 조시모프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첫 환자니까, 하는 정도로 해두지요. 사실 갓 개업한 우리 의사들은 최초의 환자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법입니다. 개중에는 거의 반하다시피 하는 의사도 있거든요. 게다가 아직은 환자도 그다지 많지 않고요.”
“저 사람에 대해선 뭐 새삼스레 말하지도 않겠습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라주미힌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저 사람 역시 나한테서 받은 거라곤 모욕과 수고밖에 없으니까요.”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넨 오늘 좀 감상적인 기분인가 보군그래?” 라주미힌이 외쳤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좀 더 예리한 통찰력이 있었다면, 결코 감상적인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기분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오빠를 지켜보았다.
“어머니, 어머니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마치 아침부터 외워둔 글귀라도 읽어 내려가듯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어머니가 어제 여기서 얼마나 마음 졸이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갑자기 웃음을 머금고 누이동생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아까와는 달리 꾸밈없는 진실한 감정이 반짝이고 있었다. 두냐는 곧 내민 손을 잡고, 기쁨과 감사가 깃든 마음으로 오빠의 손을 꼭 눌러주었다. 이것이 어제의 언쟁 이후 그가 처음으로 누이 동생에게 보여준 태도였다. 말없이 이뤄진 남매간의 완전한 화해를 보고 어머니의 얼굴은 환희와 행복으로 빛났다.
“이래서 나는 이 친구를 좋아하는 거야!” 무슨 일이든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라주미힌은 의자에 앉은 채로 힘차게 몸을 돌리면서 속삭였다. “저 친구에겐 이런 멋진 제스처가 있단 말이야.......”
’저 애가 하는 일은 모두 저렇게 잘돼나간다니까!‘하고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즉흥적인 동작이야! 어제 있었던 동생과의 의혹을 어쩌면 저렇게 간단히 부드럽게 풀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저 슬쩍 손을 내밀고 상냥한 눈길을 보냈을 뿐인데....그리고 저 애의 저 아름다운 눈, 저 아름다운 얼굴! 두네치카보다도 아름답다니까.....그렇지만 아아, 저 해의 옷차림, 어쩌면 저렇게 지독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까! 아파나시 이바노비치네 가게에서 심부름하는 바샤도 저보단 나은 꼴을 하고 있는데....아, 당장 저 애한테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다.....그리고 실컷 울고 싶다 하지만 무섭다, 무서워.....어쩌면 저 애가 저렇게.....아아! 저렇게 상냥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나는 무서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무서운 걸까?‘
“아아, 로쟈, 너는 믿어지지 않겠지만”하고 아들의 말에 황급히 대답하려고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을 꺼냈다. “두네치카도 나도 어제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나고 지나가버렸으니 우린 다시 행복하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말도 하는 거지만, 생각해봐라, 너를 안아보려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아무 데도 안 들르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그 여자가....아, 거기 계시는군, 안녕하세요. 나스타시야! 저 사람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지를 않겠니. 네가 고열로 누워 있었는데, 조금 전에 의사 몰래 열에 들뜬채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모두 찾으러 나갔다고. 그때의 우리 심정은 아마 너도 모를 게다! 나는 곧 집에서 친근하게 지내던 네 아버지의 친구 포탄치코프 중위의 비극적인 최후가 생각나더구나. 너는 아마 생각나지 않겠지만, 그 사람 역시 고열로 그렇게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마당 우물에 빠져버렸단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끌어올렸지. 물론 우리도 자꾸만 과장해서 생각이 되더구나. 그래서 표트를 페트로비치의 힘이라도 빌리려고 그 사람을 찾으러 막 나가려던 참이었단다....글쎄, 얘야, 우린 단둘뿐이 아니냐, 단둘이서 어쩌겠니”하고 그녀는 가련한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끌었으나, 문득 이젠 다시 모두 행복해졌는데도 루쥔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 그래요.....그야 물론....화나실 일이죠......”라스콜니코프는 대답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그 표정이 하도 산만하고 거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어서 두네치카는 놀란 얼굴로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열심히 생각해내려고 애쓰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아, 그렇지, 제발 어머니, 그리고 두네치카 너도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제가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기가 싫어서 이리 와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로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도 역시 놀라서 소리쳤다.
’왜 오빠는 저렇게 의무적인 말만 할까?‘하고 두네치카는 생각했다. ’화해하는 것도, 사과하는 것도 마치 기도문이나 학과 내용을 암송하는 것 같으니.‘
”저는 눈을 뜨자마자 가려고 했지만 옷 때문에 못 갔어요. 실은 어저께 이 사람에게....나스타시야에게 말해두는 걸 잊어서....피 묻은 것을 빨아달라는 걸....그래서 이제 막 옷을 갈아입은 참입니다.“
”피라니! 도대체 무슨 피?“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질겁했다.
‘실은 이렇게 된 거예요....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 피라는 건 다름 아니라, 어제 약간 열에 들뜬 듯한 기분으로 거리를 헤매다가 마차에 치인 사람하고 부딪쳤기 때문이에요....어떤 관리하고 말이에요.”
“열에 들떴다고? 그래도 자넨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군 그래.” 라주미힌이 가로챘다.
“그건 사실이야.” 무언가 특별히 마음 쓰는 데가 있는 듯한 어조로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모든 걸 다 기억하지. 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하고 나오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건 아주 잘 알려진 현상이지요.” 조시모프가 끼어들었다. “일의 실행은 때로 지극히 교묘하고 교활할 정도지만, 그 행위의 지배력, 즉 행위의 근본은 혼란스러워서 여러 가지 병적인 인상에 좌우되죠. 이를테면 꿈 같은 것이겠지요.”
’저 친구는 나를 광인과 다름없이 보고 있나본데, 어쩌면 그게 유리할지도 모른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겅강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불안한 듯 조시모프를 보면서 두네치카가 지적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하고 조시모프는 대답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대개의 경우 사실 광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즉 ’환자‘는 우리보다 발광의 정도가 심할 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한계를 그어둘 필요가 있죠. 완전한 조화를 지닌 인간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만 명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몇십만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 있을까요. 그나마도 꽤 불완전한 표본에 지나지 않겠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화제에 열중해버린 조시모프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광인‘이라는 낱말에 좌중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아무런 주의도 돌리지 않은 듯이 파리한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띤 채 사색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 치인 사내는 어떻게 됐지? 아까 내가 말을 중단시켰지만...........”라주미힌이 성급히 소리쳤다.
“뭐라고?” 라스콜니코프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반문했다. “음, 그래....그래서 그 사내를 집까지 옮기는 걸 거들어주다가 피투성이가 돼버린 거지. 그런데 어머니, 저는 어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가지 저질렀습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어머니가 보내주신 돈을 어제 몽땅 줘버렸어요. 그 사람의 아내에게....장례 비용으로. 지금은 과부가 된, 폐병을 앓는 불쌍한 여잡니다. 고아와 다름없는 세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어요. 집안은 텅 비고, 그 밖에 또 딸 하나가 있긴 합니다만....정말 그 꼴을 보셨더라면 어머니도 아마 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나한테 그럴 권리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마련해주신 돈인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남을 도우려면 우선 그 권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Crevez, chiens, si vous n'etespas contents(’그게 싫다면 마음대로 뒈져라, 개자식‘이라는 뜻)이니까요!”하고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렇지, 두냐?”
“아니, 그렇지 않아요”하고 두냐는 또렷이 대답했다.
“저런! 그럼 너도....그런 생각인가 보구나!” 그는 증오에 가까운 눈초리로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조소하듯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의당 그걸 생각했어야 했어. 하지만 뭐, 괜찮아, 잘된 일이야. 너한텐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어느 선까진 가보는 거야. 그리고 그걸 넘어서지 않으면 불행해지지만, 넘어선다 해도 한층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선이지. 그러나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이야기야!” 저도 모르게 열을 올린 것을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그는 짜증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저는 그저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띄엄띄엄 말을 맺었다.
“이제 그만해라, 로쟈, 나는 네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훌륭하다고 믿으니까!” 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했다.
“믿지 않는 편이 나을 거예요.” 미소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대답했다. 침묵이 뒤를 이었다. 이 모든 대화, 침묵, 화해, 그리고 용서에도 그 어떤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모두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군.’ 치뜬 눈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훑어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잠자코 있을수록 더욱더 두려움을 느꼈다.
‘헤어져 있을 대는 나도 두 사람을 무척 사랑했던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얘, 로쟈야,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라뇨?”
“저런, 마르파 페트로브나 말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부인! 그 부인에 대해서는 편지에도 여러 번 써 보냈는데.”
“아아, 생각이 납니다. 그 여자가 죽었다고요? 정말이에요?” 그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별안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죽었어요? 왜요?”
“글쎄 그게, 아주 갑작스레 죽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들이 흥미를 보이는데 용기를 얻어 성급히 말했다. “바로 내가 너한테 편지를 낸 그때였다. 바로 그때였어. 바로 그날이지! 듣자니 그 무서운 남자가 아무래도 그 원인인 것 같아. 남자가 부인을 몹시 때렸다는 거야!”
“그 부부는 전에도 그랬었니?” 누이동생을 보면서 물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예요. 부인한텐 늘 관대하고 친절했어요. 대개의 경우 부인의 성격에 대해 지나치게 대범했을 정도죠, 만 7년 동안이나. 그러다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울분을 터뜨린 거예요.”
“7년이나 참아왔다면 그다지 무서운 사내도 아닞 뭐야. 두네치카, 너는 그 사내를 두둔하는 것 같구나?”
“아녜요, 아녜요. 그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상상도 못할 정도예요.” 두냐는 몸서리라도 칠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침에 일이 일어났어.”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성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부인은 점심 식사를 마치면 곧 시내에 나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렀지. 그 이는 언제나 그런 때면 시내에 나가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식사 때도 매우 맛있게 먹었다는 거야........”
“매를 맞은 후에도요?”
“아무튼 그 여자에겐 언제나 그런 습관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내에 늦지 않도록 곧 목욕탕에 들어갔던 모양이야. 보건대 그 여자는 목욕 요법을 하고 있었나 봐. 거기에는 냉천이 있어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물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발작이 일어났다는구나!”
“그야 그렇겠죠!” 조시모프가 말했다.
“무척 심하게 때렸나 보군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두냐가 한마디 했다.
“흠! 하지만 어머니는 참 남의 일에 호기심도 많군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다 하시는 걸 보니.”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초조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뇌까리듯이 말했다.
“얘야,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두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건 정말 사실이에요.” 두나는 엄한 눈초리로 오빠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층계를 오르실 때부터 무서워 성호를 긋기까지 했어요.”
그의 얼굴은 금방 경련이라도 일어날 듯이 비뚤어졌다.
“얘,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두냐? 로쟈, 제발 화내지 마라. 두냐, 어쩌자고 또 그런 소리를!”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하기야 나는 이리 오는 도중에 기차에서 죽 공상을 했지. 우리가 서로 만나는 광경이며, 서로 여러 가지 묵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을....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어찌나 기쁜지 먼 길도 잊을 정도였다! 아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두냐, 너는 정말 쓸데없는 말을.....나는 네 얼굴을 보고 있기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로쟈.......”
“그만두세요, 어머니.” 그는 외면을 한 채 어머니의 손을 꼭 쥐면서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얘기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또다시 최근의 그 무서운 감각이 죽음처럼 싸늘하게 그의 가슴을 스쳐간 것이다. 불현듯 그는 지금 자기가 무서운 거짓말을 한 것을 다시금 똑똑히 자각했다. 앞으로는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겠거니와,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또 어느 누구하고든 더는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괴로운 상념이 그에게 준 인상이 너무 강했으므로, 그는 한순간 거의 자기 자신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아니, 왜 그래?” 라주미힌이 그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모두 따분하게 앉아만 있나!” 그는 별안간 이렇게 소리쳤다. 그것은 정말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좀 해요! 정말이지 왜 이렇게들 멍청히 앉아만 있는거요! 자, 무슨 이야기든지 하세요! 이야기 합시다....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잠자코 있단......자, 무슨 이야기든!”
“아아, 다행이군! 나는 또 어제 같은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지!“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왜 그래요, 로쟈?“ 미심쩍은 얼굴로 두냐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실은 나도 혹시나 했습니다만......“소파에서 일어나며 조시모프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이만 가봐야 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참 훌륭한 분이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예, 훌륭하고 우수하고 교양 있는 똑똑한 사람이죠......“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전에 없이 원기 있고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병이 나기 전에 어디서 만났는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나는군. 분명히 어디서 만나긴 한 것 같은데....하지만 이 친구도 역시 좋은 사나이입니다!“하며 라주미힌을 턱으로 가리켰다.
”마음에 들지, 두냐?“ 그는 누이동생에게 묻고는 왜 그런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네, 무척“ 하고 두냐는 대답했다.
”에잇, 이 사람아....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몹시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진 라주미힌은 이렇게 말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방긋이 웃었으나 라스콜니코프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이봐, 어딜 가려나?“
”나도....볼일이 있어.“
”볼일은 무슨 볼일이야. 남아 있어! 조시모프가 가니까 자네도 가려는 거지. 가면 안 돼....그러나 몇 시나 됐지? 12시? 야, 멋진 시계를 갖고 있구나, 두냐? 그런데 왜 모두 잠자코 있지? 나만, 나 혼자만 지껄이게 하고........“
”이건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선물로 준 거예요.“ 두냐가 대답했다.
”굉장히 비싼 거란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덧붙였다.
”그래! 그런데 너무 커서 여자 시계 같지가 않구나.“
”나는 이런 게 좋아요“하고 두냐는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약혼자의 선물은 아니었군’하고 라주미힌은 생각하자 공연히 마음이 기뻤다.
”나는 또 루쥔의 선물인가 했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아니다, 그이는 아직 두네치카에게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았단다.“
”그랬군요! 그런데 어머니, 생각나세요? 제가 언젠가 연애를 해서 결혼하려던 일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화제의 전환과 그런 말을 끄집어낸 아들의 어조에 적이 놀란 모양이었다.
”암, 생각나고말고!“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말하고, 두네치카와 라주미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그렇지! 그런데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까?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으니. 아주 병약한 처녀였죠.“ 그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정말 허약했어요. 거지에게 적선하기를 좋아했고, 늘 수도원만을 꿈꾸었죠. 한번은 나한테 수도원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아, 그래....생각나는군. 지독히도 못생긴 여자였습니다. 정말 왜 그때 그런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요. 아마 늘 앓고 있었기 때문일거예요. ....게다가 절름발이든가 꼽추였다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죠.(그는 생각에 잠긴 듯 방긋 웃었다) 글쎄...봄날의 꿈이었다고나 할지요.........“
”아니에요, 봄날의 꿈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두네치카는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유심히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말은 잘 못 들었든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한테 다가가서 키스를 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너는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는구나!“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감동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를? 아직도? 아아, 그렇죠....어머니는 지금 그 여자 이야기를 하시는 거로군요! 아닙니다, 이제 그런 일은 모두 저세상 일 같아서.....그리고 까마득한 옛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이 이 세상 일 같지가 않아요.......“
그는 유심히 좌중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 계시는 어머니조차도....마치 천리 밖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에잇, 제기랄! 도대체 우린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왜 꼬치꼬치 캐붇는 거예요?“ 그는 화가 난 어조로 이렇게 덧붙이고 입을 다물더니 손톱을 깨물며 또다시 생각에 잠겨버렸다.
”그러넫 네 방은 어쩌면 이 모양이냐, 로쟈, 마치 관 속 같구나“하고 괴로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불쑥 알렉산드로브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우울증에 걸린 것도 절반은 아마 이 방 탓일 게다.“
”방 말이에요?“ 그는 멍청히 대답했다. ”그래요, 방도 많은 작용을 했겠죠....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그러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머니는 아마 못 느끼셨겠지만 지금 아주 기묘한 착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띠면서 불쑥 이렇게 덧붙였다.
이 상태가 조금만 더 계속되면 이 모임도, 3년 만에 만난 이 육친도, 그리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에서 주고받은 이 친근한 어조도 그로서는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 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오늘 결말을 지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가 그가 눈을 떴을 때부터 결심했던 일이었다. 여기서 그는 좋은 돌파구가 생겼다고 기뻐하며 그 문제에 달려들었다.
”그런데 두냐.“ 그는 진지하면서도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물론 사과하지만, 그 근본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나의 의무로 다시 한 번 너에게 다짐해둔다. 나를 택하느냐 루쥔을 택하느냐다. 나는 비열한 놈이 되어도 할 수 없지만, 너까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누구든 한 사람이면 충분해. 만일 네가 루쥔한테 간다면 나는 그때부터 너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로쟈, 로쟈! 그건....어제와 똑같은 이야기지 뭐냐!“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애절하게 외쳤다. ”너는 무엇 때문에 자신을 비열한 놈이라고 하는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어제도 마찬가지였어.......“
”오빠“하고 두냐 역시 냉랭하고도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오빠에게 잘못이 있어요. 나는 밤새껏 생각해보고 그 잘못을 발견했어요. 즉 문제는 이거예요. 오빠는 내가 누구한테 누군가를 희생으로 바치려 한다고 상상하고 계신 모양이지만, 그런 일을 절대로 없어요. 나는 다만 나 자신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뿐이에요. 우선 나 자신이 괴로우니까요. 물론 그 때문에 내 육친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동기가 되어 내가 결심한 건 아니에요......“
‘거짓말을 하는군!’ 그는 홧김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만한 것 같으니! 속으론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면서도 그걸 자인하려 들지 않는구나! 아아, 모두 비열한 성격들이다! 저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증오와 다름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니까....아아! 모두 꼴 보기 싫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하겠어요.“ 두네치카는 말을 계속했다. ”그 이유는 괴로운 일 두 가지 중에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쪽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그이를 속인다고는 할 수 없어요....오빠, 왜 지금 그런 웃음을 지으셨죠?“
그녀 역시 발끈 화를 냈다. 그리고 그 눈에는 분노의 빛이 번쩍였다.
”모든 것을 이행하겠다고?“ 그는 독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되물었다.
”어느 정도까지는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구혼할 때의 태도와 그 방식으로 보아, 그이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곧 알았으니까요. 그는 물론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이는 내 가치도 평가해주리라고 믿어요....아니, 왜 또 웃으세요?“
”하지만 넌 또 왜 얼굴을 붉히느냐?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알겠니? 넌 억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여자다운 고집만으로 나한테 자기주장을 내세워 보이기 위해서, 너는 루쥔을 존경할 수 없어....나는 그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도 해봤다. 결국 너는 돈 때문에 자기를 팔려는 거야. 그러니까 어쨌든 비열한 행위임에 틀림없지. 그러나 나는 네가 아직까지 얼굴을 붉힐 수 있다는 것만도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요. 난 거짓말이 아녜요!“ 두네치카는 차츰 냉정을 잃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나도 그이가 내 가치를 인정하고 아껴주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결혼하지 않을 거고요. 다행히 나는 오늘이라도 그 확신을 얻게 될 거예요. 이 결혼은, 오빠가 말씀하시는 것이 옳고 내가 정말 비열한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내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오빠로서는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어째서 오빠는 자기에게도 없을지 모르는 용기를 나한테 요구하시는 거죠? 그것은 지나친 횡포예요, 억압이에요! 만일 내가 누군가 남의 일생을 망친다면 또 몰라도, 이건 다만 나 혼자의 일이 아니냐 말이에요......나는 아직 남을 죽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죠? 왜 그렇게 파랗게 질리세요? 로쟈, 왜 그래요, 네, 로쟈!“
”아아, 이를 어쩌나! 또 기절해버렸군!“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외쳤다.
”아니, 아니....그런 소리 말아요....아무것도 아니에요!.....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지 기절은 무슨 기절이에요....뭐든 다 기절인 줄 아세요!....흐음! 그래서....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아, 그렇지, 너는 오늘 당장 네가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있고 그 사람도 너를 인정해주리라는 확신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건 무슨 뜻이니, 응? 너는 아까 분명히 오늘이라고 말했지?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어머니,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편지를 오빠한테 보여주세요.“ 두네치카는 말했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손으로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는 남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받았으나, 펼쳐보기 전에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한 얼굴로 두네치카를 바라보았다.
”이상한데.“ 마치 무언가 새로운 상념에 몹시 놀라기라도 한 듯이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쓰는 걸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지? 제 마음대로 아무하고나 결혼하라고 내버려두면 되잖나 말이야!“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으나 목소리는 꽤 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어떤 이상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하여 두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누구보다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뭔가 색다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
”이거 참 놀라겠는걸.“ 잠깐 생각한 뒤에 편지를 어머니에게 돌려주면서 그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변호사라 늘 소송 사건만 취급해서 그런지 말할 때도....더러운 버릇이 있지만, 글 쓰는 데도 영 무식쟁이나 다름 없군.“
좌중에 약간 동요의 빛이 보였다.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대문이다.
”그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쓰잖아.“ 라주미힌이 불쑥 주석을 달았다.
”자네도 읽은 게로군?“
”응.“
”우리가 보여드렸다, 로쟈. 우린 아까....서로 의논을 했단다.“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이른바 재판소 식 문체라는 거야.“ 라수미힌이 가로막았다. ”재판소 문서는 아직도 그런 투로 쓰고 있거든.“
”재판소 식? 아, 이게 재판소 식, 사무가 식이라는 거군. 전혀 무식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학적인 것도 아니고, 결국 사무가 식이로군그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자기가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진 않아요. 오히려 혼자 힘으로 자기 길을 개척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오빠의 새로운 어조에 다소 모욕을 느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자랑으로 삼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두냐, 내가 이 편지에 대해서 이런 경박한 비평밖에 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는 기분이 나쁜 모양이구나. 그리고 내가 홧김에 너를 곯려주려고 이런 쓸데없는 말을 끄집어 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게 아니야. 이 편지의 문체와 관련해서 이번 경우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책이믄 당신들에게 있다‘는 매우 의미심장하고도 분명한 표현이 있을뿐더러, 내가 가면 즉각 그 자리를 물러가겠다는 위협은....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두 사람도 버리고 말겠다는 공갈과 마찬가지란 말이다. 페테르부르크까지 불러 올려다놓고 이제 와서 버리겠다는 거야.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루쥔한테서 이런 식의 편지를 받고도 가령 이 사람이나(라주미힌을 가리켰다) 또는 조시모프나, 그렇잖으면 우리 가운데 누구한테서 그런 편지를 받았을 때처럼 화도 낼 수 없다는 거냐?“
”그게 아녜요.“ 두네치카는 활기를 띠며 대답했다. ”나도 잘 알겠어요, 이 편지는 너무나 유치하다는 것을. 그리고 문장을 쓰는 재주도 없다는 걸 알겠어요....오빠의 평은 정말 적절했어요. 난 생각지돈 못했을 정도예요.......“
”이게 재판소 식 표현이라는 거다. 하기는 재판소 식으로 쓴다면 이렇게밖엔 쓸 수가 없으므로, 어쩌면 그 사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례해졌는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나는 너를 조금 더 실망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편지에는 또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 나에 대한 비방이지. 그것도 꽤 졸렬한 비방이야. 나는 어제 곤경에 빠진 폐병쟁이 미망인에게 돈을 주었어. 그러나 ‘장례 비용이라는 명목으로’가 아니라, 분명히 장례비로 준 거야. 게다가 그 집 딸, 그 사람이 말하는 ‘추잡한 영업에 종사하는 처녀’에게, 생전 처음 보는 그 여자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니라 바로 미망인에게 주었다. 이러한 모든 점으로 보아, 그 사람이 나를 중상하고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너무나도 성급한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이것 역시 재판소식 표현일 테지. 즉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성급하고 단순한 수법이야. 그 사람은 영리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 모든 것으로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너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요는 네게 교훈이 될까 해서고, 또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야........“
두네치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아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다만 저녁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면 로쟈, 너는 대체 어떻게 결정할 작정이냐?“ 뜻하지도 않은 그의 사무적인 어조에 더한층 불안을 느끼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요?“
”글쎄,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지금 말한 대로 오늘 저녁에 네가 오지 않도록....만약 네가 오면 곧 물러가겠다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오겠니?“
”아니, 그거야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첫째로 어머니가 결정하실 일이지요. 만약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요구를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두냐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역시 모욕을 느끼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나는 두 분이 좋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무관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두네치카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나도 거기에 찬성이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오빠, 나는 그 자리에 오빠가 꼭 참석하시도록 부탁하기로 결심했어요.“ 두냐는 말했다.
”오시겠죠?“
”가지.“
”그리고 당신한테도 오늘 저녁 8시에 우리한테 와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라주미힌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분도 오시라고 했어요.“
”잘했다. 두네치카. 자, 이제 모두 그렇게 결정했으니“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덧붙였다. ”결정한 대로 하도록 하자. 나도 그 편이 마음이 편하다. 나는 눈가림을 한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하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그다음에야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화를 내든 말든 알 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