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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백암산(白巖山 622.6m)은 두 말이 필요없는 멋진 산이였다.
600m대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서 360도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주위 조망은 가히 압권이였다.
우선 눈과 가슴으로 다가오는 눈덮힌 지리산은 설렘 그 자체였고, 천왕봉의 휘하에 도열해 있는 크고작은 산들은 일일이 헤아리지도 못할 지경이였다.
지리의 넉넉한 품에 안기는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맛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백암(白巖)이란 흰바위를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보아도 산꼭대기 하얀 암반이 올려다 보인다.
백암산 산행은 필연적으로 함양 상림숲을 끼고 도는 ‘고운 최치원 산책길’을 포함해야 한다.
'필봉산 가족숲길'과도 겹치는 이 산책길은 5㎞(상림 1.6㎞ 포함) 정도로 걷기 편하고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산행의 베이스캠프는 상림공원이다.
상림은 최치원 선생이 조성했을 당시 대관림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고, 지금은 상림만이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다.
산행 중 만나는 ‘한남군 정도공 휘어지묘’는 세종대왕의 12번째 아들(혜빈 양씨의 소생) 한남군(1429~1459)의 묘.
단종 복위에 연루돼 휴천면 남효리 새우섬(엄천강)으로 유배됐다가 4년 만에 사망하였고, 그 뒤 1557년(명종 12년)에 묘를 만들어 ‘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함양향교’는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자료에 1398년(태조 7)경에 창건된 것으로 나타난다.
상림숲의 ‘이은리 석불‘은 높이 1.8m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원래 망가사(望迦寺) 절터라고 전해지는 이은리의 냇가에 있던 불상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
상림숲 입구의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고종 8년(1871)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이 비는 본래의 모습으로 넘어져 있어 바로 세워 놓았다.
그 밖에 함양중학교에 있는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376호.
대좌 높이까지 포함하여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으로 파손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웅장한 느낌을 준다.
필자는 시간의 제약상 답사치 못했다.
코스: A)상림공원주차장~필봉산~한남군묘~함양향교~교산육교~백암산~대병저수지갈림길~뇌계공원~상림공원(인물공원~이은리석불~척화비)~주차장
B) 고운 최치원 산책길 또는 필봉산 가족숲길(5km, 3시간)
산행궤적
약 11km의 거리를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백암산만 우뚝할 뿐 그밖엔 상림숲길과 200m대의 나즈막한 둘레길.
<부산일보 참고 개념도>
<고운 최치원 산책길>
상림공원 주차장에서 출발이다. 처음엔 필봉산에서 시산제를 지내려고 하였지만 건조주의보 등으로 안전한 주차장으로 변경하였다.
주차장 정문을 빠져나오며 안내소를 지나고...
주차장 정문.
화장을 한 후 주차장을 빠져나와 함양박물관에서 바라보면 나즈막한 산자락이 내려와 있는 게 보인다.
그 산자락 아래 '늘봄가든' 입구가 본격 들머리.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고...
늘봄가든 입구의 좌측으로 든다.
늘봄가든 입구의 안내판과 현위치.
너무 반듯한 길이라 좋긴 하다만 오랜 가뭄으로 흙길은 푸석푸석..
233m의 필봉산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백암산.
필봉산(筆峰山)을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부르는 모양.
잘 정비된 길을 따라...
포장 임도에 내려서면 작은 능선이 스르르 내려앉은 지점에 잘 단장된 무덤이 보인다.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의 묘다.
문인석,무인석,동자석 등 석물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덤 앞의 비석을 살펴보니 '한남군 정도공 휘어지묘(漢南君貞悼公諱𤥽之墓)'
동자를 닮은 조그만 석물은 귀여움 그 자체.
무덤 주위를 둘러보다...
원래의 비석인 듯하여 살펴보지만 오랜 세월 많이 닳았다. 흐릿한 글귀는 ‘왕자한남군지묘(王子漢南君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우측으로 ‘가정삼십육년정사사월일(嘉靖三十六年丁巳四月日)’ 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식별이 쉽지않다.
사후 바로 이곳에 장사지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기록으로 볼 때 1557년(명종 12) 4월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한남군신도비'
안내판.
한남군(1429~1459)은 세종대왕의 18남4녀중의 12번째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혜빈 양씨, 자는 위옥(葦玉), 이름은 이어(李𤥽), 시호((諡號)는 정도(貞悼)이다.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함양군 휴천면 한남마을 앞 새우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림들이 새우섬에 누대를 지어 '한오대'라 하였으나 홍수로 떠내려가고 지금은 주위 바위에 새겨놓은 한오대(漢鰲臺)란 글자만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포장임도를 따라...
원교마을 갈림길에 섰다.
이 지점의 이정표.
'함양향교'는 원교마을 방향으로 불과 200여m의 거리에 있어 다녀오기로 하였다.
불과 3분 만에 태극루가 있는 함양향교에 닿았다. 입구 좌측에 '유도회 함양지부'라는 표석.
향교는 유교(儒敎)사상에서 생겨났다. 조선왕조가 숭유배불(崇儒排佛)하면서 스님은 향교를 싫어했고, 향교는 스님을 반기지 않았다.
피차가 꺼리는 입장에서 스님의 모습으로 향교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안내판.
태극루의 현판은 1881년(고종 18)경에 호암(湖巖) 박문회(朴文會)가 쓴 것이다. 생졸년이 미상인 호암은 순조 때인 19세기 초의 서예가로 경상남도 남해 출신.
계단을 통해 명륜당을 오르며...
돌아보는 태극루.
명륜당(明倫堂)의 현판에는 신안주희서(新安朱熹書)라고 적혀있다. 퍼뜩 보면 서툰 글씨로 보이지만 예사로운 필체가 아닌 것.
주희는 중국
전국의 향교 명륜당에는 대부분 주희의 글체를 집자(集字)한 현판이 걸려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자 태극 문양이 그려진 솟을 삼문은 잠겨있어.
까치발을 하고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대성전을 중앙으로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묘(文廟)의 시설 가운데 공자(孔子)의 위판(位版)을 봉안한 전각.
밖으로 나와 홍살문 밖에 섰다.
그리고 빠른 길로 치고 올라가 반듯한 길로 들어섰다.
대병저수지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난 계단길은 나중에 가야할 대병저수지 방향이고, 우리는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두산저수지 방향.
진행방향으로 백암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산저수지에서 바라보는 백암산.
이정표가 아주 세세하게 안내하고 있어 길찾기는 너무 쉬워...
두산저수지의 이정표와 안내판.
광주대구고속도로를 가로 지르는 교산육교를 건너...
좌측에 있는 이정표. <좌측으로 난 길은 나중에 내려올 길>
올라갈 길과 내려올 길의 거리가 똑 같다.
다시 갈림길에서...
친절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걷노라니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들의 함성.
개사육장이 있었다.
다시 친절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솔숲길을 걸어...
평이한 능선길에 붙었다. 바위와 소나무와 마사토로 이루어진 산세는 예사롭지 않은 법.
신라와 조선의 도읍지가 모두 이러한 산세가 아니던가?
우측으로 드러나는 슬랩지대.
그 열린 공간으로 펼쳐지는 주위 산군들. 멀리 하얗게 눈을 덮어쓴 봉우리.
그 좌측으로 올망졸망 또아리를 틀고 촌락을 형성한 옛 고을 함양. 그 너머로 지리산맥은 웅석봉으로 이어지고, 그 앞자락에 왕산인가?
멀리 하얗게 눈을 덮어쓴 군계일학의 산은 지리산 천왕봉. 그 우측 앞쪽으로 역시 눈을 이고있는 산은 삼봉산이고, 그 좌측 두루뭉실 법화산.
맨 우측 가까이에 천령봉과 그 뒤로 오봉산인 듯.
<파노라마>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음.
정상의 안내판을 가져왔다.
좌측에서부터 천왕봉, 앞으로 당겨 법화산, 중간 삼봉산, 골 건너 천령봉, 그 뒤로 볼록볼록 오봉산. 연비산.
삼봉산을 당겨 보았다.
천령봉과 오봉산, 그리고 더 우측으로 문필봉과 연비산.
연비지맥 뒤 고개를 내민 능선은 지리산 서부능선.
남동쪽 황매산 방향이지만...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어 아예 너럭바위에 펄퍼득 주저앉았다.
삼봉산과 가까이 오똑한 천령봉, 볼록볼록 오봉산, 그 우측으로 연비산.
photo by '한덤'
능선 좌측으론 솔숲이 우거져 있으나 우측으론 그렇지 못하니 아마도 예전에 산불이 난 듯하다.
여기까지 올라온 '영양 천씨'무덤
백암산 직전 계단을 오르기 전 우측으로 '보산행복마을'로 가는 이정표가 있고...
곧 헬기장이 있는 너른 백암산 정상에 올라선다.
뒤(북북서)로 괘관산(대봉산 천왕봉)이 우뚝하고, 그 우측 멀리 거망 기백이 고개를 내민다. 월봉산은 괘관산에 가려진 듯.
남쪽 지리산 방향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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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안내판
괘관산 우측 멀리 거망 기백산 방향.
당겨 보았다.
정산에서의 기념사진.
정상의 데크전망대.
괘관산이 바라보이는 이정표.
정상에서 내려서자 금방 갈림길.
이 길은 솔숲길.
막고개 과수원에 붙어있는 막고개의 내력엔 시묘살이 여막(廬幕)이 있던 곳이란다.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내려서서...
교산육교를 건넌다.
두산저수지에서 왔던 곳으로 조금 되돌아 가면 대병저수지 갈림길. 이 길은 '시와 함께하는 등산로'란다.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시가 있는 '김해김씨 묘'에선 백암산이 훤히 조망되고...
나즈막한 봉우리를 조금 더 오르면...
산불초소가 있는 봉우리.
산불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선 찬왕봉이 올려다 보인다. 산불감시 아저씨에게 "아주 좋은 곳에 근무하고 계십니다."고 하였다.
안내판엔 또 능선 둘레길이 안내되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름이 너무 많다.
능선 둘레길 이정표.
노천명의 시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지점에서도...
백암산이 조망된다.
氣가 살아있는 솔숲 마사토 능선길을 따라...
'필봉산 가족숲길'이 열려있고...
이정표는 대병저수지를 가리킨다.
다시 대병저수지 이정표.
도로에 내려서서...
조금 내려오면 2차선 아스팔트 도로. 도로 건너 파란 물탱크 옆으로 가면 상림숲 길.
돌아보는 우리가 내려온 길.
우리는 뇌계공원을 가기위해 도로 우측으로 갔더니...
육각정자가 있는 뇌계공원은 불후의 명시를 남긴 뇌계선생을 기리기 위한 곳.
뇌계 유호인(雷溪 兪好仁 1445~1494)선생은 김종직선생의 제자로 식년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가독서를 했으며 거창현감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동국여지승람 증보에 참여했으며 ‘유호인시고’라는 문집을 남겼다.
시와 문장, 글씨에 뛰어나 당대 삼절(三絶)이라 평가받았다.
공원 한켠의 석비들. 신해생 갑계를 모았다며 10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고...신해생(辛亥生)이면 1911년으로 짐작되고, 1986년에 새겼으니...
대한의사 하승현 기념비. 하승현은 1919년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순국한 인물.
효자비와...
'효간공 갈천 임선생 사적비'
갈천선생은 지난 날 수승대 '갈천장구지대'에서 본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 선생을 말한다.
이 오석 비석이 뇌계공원의 주인인 뇌계 유호인. '뇌계 유호인 선생 기적비'
군신간의 석별을 노래한 시조다.
친구같이 늘 가까이 하던 뇌계 유호인은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충효, 시문, 필력이 뒤어나 당대의 삼절이라 이른 사람이다.
본래 학문을 좋아하는 성종은 유호인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함양으로 내려가게 됨에 여러번 만류하다가 할수없이 친히 주연을 베풀어
술을 권하며 읊은 시조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위로 대병저수지가 바라 보인다.
뇌계공원 앞의 다리는 뇌계교. '뇌계공원'은 네이버지도에 나오지 않고 '뇌계교'는 나온다.
노거수를 지나...
차량 진입금지 지점의...
좌측에 물레방앗간.
함양은 물레방아의 고장. 물레방아는 연암 박지원이 중국(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쓴 '열하일기'를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이파리 다 떨군 나목들만이 도열한 상림숲. 잎이 무성한 계절에는 더욱 더 운치가 있겠다.
정상에서 내버려두고 내려 왔더니 뇌계공원에 머문 사이 나보다 먼저 와 있네.
넓직한 '역사인물공원'의 모습. 달리 표현하면 '비석모듬공원'이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니...
'열녀학생임술증처밀양박씨지려'
1797년 정조 시절에 세웠으니 200년도 더 넘었다.
비석모듬.
무심코 올려다 본 조병갑의 선정비.
악명 높은 조병갑이 군민들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고 기록한 비석이다. 광서(光緖) 13년, 1887년(고종 24년)에 세웠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로서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쓰였다.
그러나 최근 안내판엔 바로 잡아졌다.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의 선정비를 비판적 견해로 이해하기 위하여 보존하기로 하였단다.
주로 함양 출신들의 인물들.
시간이 많으면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가며 살펴볼 수 있을 텐데, 캠프에선 시산제 문제로 전화호출이 이어진다.
'문창후최선생신도비'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신도비의 귀부(龜趺)엔 구슬을 꽉 물고 힘겹게 버티고 선 모습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천령군(함양군) 태수로 있을 대 상림숲을 조성하였다.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와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대한의사 하승현 기념비'는 아까 뇌계공원에서도 보았다.
김한익은 함양 사람으로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공원에 있는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 32호)'
광배(光背)와 한 돌로 조성한 원각(圓刻)에 가까운 입상(立像)이다.
신체 하부와 대좌를 잃고 자연 암석 위에 상체만 모셔져 있으며 양팔의 손목 부분도 절단되어 있다.
소발(素髮 : 민머리)의 머리에 낮고 평평한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단정하게 얹혀졌다.
넓적하고 큰 얼굴에 귀도 크고 긴 편이다.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남아 있고 얼굴은 마멸되어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는 않다.
반개한 두 눈은 옆으로 길게 표현하고 입은 작아 고려시대 불안(佛顔) 표현의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
코는 마모되어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으며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고, 좁은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다.
양어깨에서 가슴 밑으로 V자형에 가까운 U자형을 그리며 길게 늘어져 흘러내리고 있다.
불신(佛身)의 하부는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배 앞에 늘어지는 6줄의 음각 주름만 보일 뿐이다.
평행하게 밀집된 주름은 깊은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었으며 법의는 두꺼운 편이다. <자료요약>
안내판
상림숲을 얼추 빠져나오니 눈에 익은 비석이 나온다. 척화비(斥和碑)다.
필자는 가덕초등학교와 기장 대변초등학교에서도 보았다.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한 후 천주교를 탄압하고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과 문호개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후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양이침범 비전측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의 자손 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
척화비 안내판은 마모되어 읽을 수가 없다.
천연기념물 154호 상림공원 자연 표석을 좌로 돌아...
시산제 셋팅이 완료된 주차장에 닿았다.
올해부터 조촐한 행사로 전환하여 생선과 튀김은 올리지 않아.
유세차~
그리곤 차량이동 벽송정 가든에 도착하여...
준비된 오리백숙으로 단합대회를 겸하기도 하였다.
엄나무 오리백숙.
이 방은 하트(♡) 빵빵 날리는 여성들의 방.
'벽송정가든'을 나와 계곡 위에 있는 '벽송정(碧松亭)'에 왔다.
벽송정은 송정(松亭) 강문필(姜文弼)이 수양하던 곳으로 1897(광무 원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정자 북쪽 바위에 '송정 강선생 장구소(松亭 姜先生 杖屨所)'라는 각자를 새겼다고...
벽송정 편액 옆에 여러 기문이 새겨져 있다.
포만감으로 버스에 올라 차창으로 백암산을 올려다 본다.
이시렴 보듸 갈다 아니가든 못할소냐
무단(無端)히 네 슬터냐 남의 말을 드럿는냐
그려도 하 아달고야 가는 뜻을 닐러라
(있으려무나, 부디(꼭) 가겠느냐? 아니 가지는 못하겠느냐?
공연히 (내가) 싫어졌느냐? 남의 권하는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오히려) 너무 애타는구나. 가는 뜻이나 분명히 말해 보려무나.)
이 시조는 조선 성종 때 신하 유호인이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임하고 내려가게 되자, 임금(성종)이 여러 번 만류하다가
할 수 없이 친히 주연을 베풀어 술을 권하면서 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