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면서
모진 것이 목숨이라 어느덧 고희(古稀)도 지난 지 오래되었다.
철모를 10대 시절 1948년 산사람과 軍人들이 싸우는 중에 들에서 山에서 땅굴에서 숨어야 살 수 있다는 어른들 말에 따라다니다 어느 날 軍人들이 와서 피난 가라고 하여 피난길에 아버지 어머니와 離別하고 제주시로 간 것이 나의 슬픈 운명(運命)의 시작이었다.
경찰(警察)과 군인(軍人)들이 나보고 폭도(暴徒)가 아니냐며 때리고 밤새워 잠을 못자게 하니 나중에 경찰관이 말하는 대로 시인해 버렸다.
그러면 살려준다 하여 시인한 대가가 계엄군법회의 육군대령으로부터 징역5년을 언도받은 것이 인천형무소감방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형무소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영하 20도의 추위와 배 고품과 그리고 고향이 그리운 것이었다.
6.25전쟁이 나서 서울시내와 한강철교가 부서지는 바람에 많은 차량과 죽은 시체들이 길위에 그리고 강물 속에 셀 수 없이 나뒹굴고 있어서 나도 언젠가 저 모습이 될 것이란 생각으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인민군들이 지시하는 대로 하다가 개성에 가서 인민군대로 끌려가서 교육을 받고 全羅南道 光州로 내려오는 길에서부터 들에서 잠을 자고 폭격을 피해야만 하였다.
光州에서도 잠시 동안 있은 후에 國軍의 仁川上陸作戰 후 공격으로 智異山, 太白山으로 光州 市民들과의 피난길은 배고프고 춥고, 또 밤에 잠못 잔날은 헤아릴 수 없다.
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가서는 배고픔이나 잠자리 걱정이 없어져서 집 생각도 나고 아버지 어머니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때의 수용소생활(收容所生活)이 한편으로는 모진생활이긴 했어도 그나마 그 생활을 함으로써 나의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한테서 들었기에 안도와 함께 삶의 의미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국군의 추격을 피해 지리산으로 가는 중에 내가 보았던 얼어서 죽거나 굶어서 죽거나 병이 나서 죽는 사람, 혹은 낮에는 비행기 폭격과 잠복중인 국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수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과 그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무섭고 끔찍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반면에 거제도에서의 포로수용소 생활에서는 밥걱정 안하고 추운 것이나 잠자는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그런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만으로 하느님과 부처님 그리고 조상님의 덕택임을 고마워하는 마음은 6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나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밤중에 일렬종대로 조치원을 지나 광주로 걸어가는 중 어느 논두렁에서 기관총 기습으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는지 우리 일행 중에서 “아이고”라는 비명소리를 들었던 것이 바로 고행문형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이 나의 증언이 그 형의 영혼에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로써 나의 가슴속에 간직했던 무섭고 긴 고통의 응어리가 일부나마 내려앉는 것같아 가슴이 다소 가벼워진다.
이 책을 발간하게 된 것은 그동안 내가 그 시절에 당했던 모진풍파와 감회를 長男 영보에게 보였더니, 이런 끔찍한 일은 후손에게 알리어 과거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난을 극복해 냈던 선조들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느끼고 삶에 보탬이 되게 하면 좋을것 같다고 하여 이루어 졌다.
나와 같이 시대를 잘못 만나 죽어간 원혼들에게 위로의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록 보잘것없는 나의인생의 기록이고 그 속에서 내가 겪은 소감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교훈이 될지는 모르지만, 글 쓰는 요령이 모자라고 내용정리가 부족하여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읽어 주었으면 한다.
이 책의 발간에 도움을 주신 先進인쇄사 강규진 사장님과 직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17. 6. 13.
- 양 일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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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를 읽고
‘하루가 여삼추(如三秋)’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는 불행한일이 닥쳤을 때 고통스러워 참기 힘든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직접 생(生)과 사(死)를 넘나들며 고통의 아픔을 증언한 이 책에서 5년여 동안 방향감각을 잃고 살아온 이야기는 상상만 하여도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비극은 1948년 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濟州道 4.3사건과 6.25 한국전쟁(韓國戰爭)동안에 300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또는 혹한에 동사(凍死)하거나 아사하는 현장에서 10대의 새파란 소년(小年)이 형무소(刑務所)생활, 인민군(人民軍)생활, 國軍의 공격에 도주(脫走)하는데 동료가 총에 쓰러져 죽고 영하20도의 강추위 겨울밤을 산속의 바위와 동굴에서 지센 그 시간들, 너무도 끔직스럽고 記憶하기도 싫은 상처를 애써 잊으려는 증언자의 모습이 깊게 묻어나 이것은 한편의 대하 역사드라마 바로 그것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증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巨濟島 捕虜收容所) 생활이 사람의 삶에서 희, 노, 애, 락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여유를 찾은 것이라 보여 진다.
증인의 증언 중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던 배경과 휴전, 미국과 소련, 중국 등의 강대국들이 차지하는 한반도에 대한 국제적인 위치 등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
휴전(休戰)하면서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에서 귀향한 후 대한민국 국군(大韓民國 國軍)이 되어 國防의 임무를 필하고, 고향에서 평범한 농부로 70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기억하기 싫은 그때의 참상은 너무도 크고 깊었기에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한 구절씩 적어두었다.
長男 永保의 도움으로 한권의 이 역사서는 현대사(現代史)에 미비한 부분에 보충이 될 것이고, 이 증언을 거울삼아 우리의 후손들은 비극의 역사는 다시 없기를 바라는 교훈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歷史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자는 역사가 이를 처벌한다.’는 격언(格言)을 떠올리면서!
- 前 제주산업정보대학 교수 강 형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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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힘들게 살아온 경험담을 우리 자식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하였을 때 한가지 기억되는 것은 금악 이달봉에 철갑탄피와 납탄을 주우러 부모님과 함께 자주 다녔던 것으로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이다.
철갑탄피는 망치로 때려 탄피와 속에 있는 알을 분류하고 납탄은 납을 분류하여 납을 녹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보릿고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의 부모님은 그 힘든 시절 우리3남 5녀를 낳아서 고등교육 이상 시키면서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 찰흙으로 소나돼지 등 여러가지 동물을 만들어서 그늘에 말려 우리에게 주면 갖고 놀았는데 아버지의 손재주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가끔 제사 때나 친족들과의 얘기 중 4.3사건에 대한 내용과 아버지께서 북한군에 갔다 왔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때는 어릴 적이라 실감이 안 났던 것이 사실이다.
5년 전 아버지께서 편지지 앞뒤로 빽빽이 적은 글을 주시면서 타자를 쳐보라고 하셨다.
난 그때 박사학위과정 중에 있었고 별생각 없이 방치하였다가 작년에 학위가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워드정리에 들어갔는데 아버지의 기억력은 너무도 놀라웠다.
63년 전 왜정 때 일어난 4월 11일 날에 일본배가 한림에 정박하여 미군비행기가 폭격한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개성에서 1950년 7월 초순부터 개성에서 인민군훈련을 받을 때의 군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1950년 10월 23일부터 포로수용소의 첫 생활 이었다고 하는 등 과거의 사실들을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께서는 너무도 어렵게 당신의 삶을 살아왔었음을 알고는 내 자신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되었다.
한참 꿈 많던 18세 때 4.3사건이 일어났고 제주감방에서 인천으로 이송 후 5년형을 언도받아 인천형무소에서 형을 살다 6.25를 맞게 되었고 개성에서 1개월 훈련을 받고 광주내무서, 전남 광양 선소리 바닷가, 지리산으로 피난 가던 과정에서 국군에 체포되어 부산과 거제도 그리고 영천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귀향 후 1개월 후 한창 전쟁 중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52개월(4년 4개월)을 강원도 전방부대에서 근무 한 후 중사로 제대하였다.
아버지의 과거로 돌아가 보니 아버지의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10대에서 20대 중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 고생덕분에 우리 3남 5녀들은 현재 성장하여 다복하게 잘살고 있다.
하지만 옛말에 의하면 ‘내리 사랑이라고 하였던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부모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제야 그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진세월을 살아오면서 한평생을 이 책 한권으로 어찌 다 표현 하시겠습니까만 이렇게나마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보여 줄수 있는 마음, 칠순이 넘어서 향교에 다니고 이제 그 찬란한 금자탑인 훈장체를 받게 되었는데, 우리들 3남 5녀는 당신의 열정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모든 삶의 흔적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과거의 모진고통과 악몽같은 기억은 당시의 불행했던 사람들을 대신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여겨, 이를 자부심으로 바꾸시고 남은 여생을 부디 건강하시고 행운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주위에 계신 모든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장남 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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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을 주신 나의 아버지께
산처럼 힘세고 나무처럼 멋있고 여름 햇살처럼 따뜻하고 고요한 바다처럼 침착하고 自然처럼 관대한 영혼을 지녔고 밤처럼 다독일 줄 알고 歷史의 지혜를 깨닫고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强하고 봄날 아침처럼 기쁘고 영원한 忍耐를 가진 사람, 하나님은 이 모든 걸 주시고 더 이상 추가할 게 없을 때 그의 걸작이 完成되었다는 걸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시 한편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란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보기만 해도 든든함이 느껴집니다.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아버지! 그러나 정작 당신은 우리 8남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파도 편히 누워 쉴 수 없고, 힘들어도 힘들단 말조차 못하시고, 저희들 모르게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얼마나 많으셨을까요?
이렇게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아버지의 쓰라린 희생을 가늠해보는 철없는 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因緣)은 하늘이 정한다하여 천륜(天倫)이라 하지 않습니까?
저에게 아버지 어머니처럼 훌륭하신 부모님을 주신 하늘에 늘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답니다.
한 가정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울타리 역할만으로도 아버지란 존재는 하늘처럼 감사할 따름인데 수불석권<手不釋卷>실천하시어 늘 배움을 멀리하지 않으시는 우리 아버지!
칠순이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직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정진하시는 그 모습 놀랍고 늘 자랑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저희들에게는 산교육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수많은 날들 속에서 고달프고 지친 순간이 오면 그 가파른 언덕에서 아버지의 강인(强忍)한 정신력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버지께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축복받은 자녀라 여겨져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흐르는 세월은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에 주름살을 만들었고 검은 빛 머리카락을 하얀 빛깔로 바꾸어 놓았을지라도 부모님의 크신 사랑과 희생은 저의 8남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희생과 은혜에 백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고맙다는 말씀조차 드리지 못했는데 이 지면을 빌어 큰 딸이 대표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들 곁에 계셔주시길 두 손 모아 하늘에 빌겠습니다.
-큰딸 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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