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고등 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르트르는
철학 교수 및 교사 자격시험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만다.
사르트르는 그 이유를
자신의 답안이 너무 독창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듬해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했으니,
그의 추측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나 보다.
보부아르의 눈에 비친 사르트르는 완전한 자유인이었다.
직업인으로서, 결혼한 가장으로서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는 생활은
사르트르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 교수 및 교사 자격시험에 통과한 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 복무, 그리고 지방 학교의 선생이 되기 위해 여행과 자유,
젊음에 작별 인사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제대한 뒤 일
상에 얽매이기 싫어
멀리 일본의 프랑스어 교사 자리를 지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31년,
사르트르는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 있는
고등학교에 철학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일상인으로서의 지루한 생활이 이어졌다.
철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에 머물렀던 짧은 기간을 빼고는,
자유인 사르트르는 1938년까지 고등학교 교사라는 소시민으로 살았다.
그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구토》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다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다가 구역질을 한다.
그 뒤 그는 마로니에 나무 뿌리를 보고도 구토를 하는 등
여러 사물들 앞에서 토기를 느끼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다.
사르트르는 다양한 구토 경험을 통해
세상 모든 존재의 본모습을 보이려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따지고 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있을 뿐이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느낌과
무의미에서 오는 허무감, 주인공이 구토를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이 놓인 극단적인 허무의 현실을 완전한 긍정으로 탈바꿈시켰다.
1943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에서,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 목적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오히려 그 때문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 존재로 거듭난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도구에는 나름의 본질이 있다.
예를 들면,
톱의 본질은 썰기 위한 것이다.
이런 본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톱을 만든다.
썰지 못하는 톱은 톱이 아니다.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에서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반대다.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져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사물과 달리,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펼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를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한편으로 자유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민과 불안에 싸여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한다.
군인 · 공무원 등 사회가 주는 역할에 안주하며
무한한 자유가 주는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좇음으로써
스스로 삶을 결단해야 하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으로 본다.
진정한 인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주변과 상황을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살기에
긍정적이며 도전적이다.
진정한 인간 실존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