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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 (55세/정선)
채미헌 전오륜 묘비문(高麗 忠節臣 採薇軒公 墓碑文)
고려 전법판서 채미헌(採薇軒) 전선생의 휘는 오륜(五倫)이고 자는 중지(仲至)이며 채미헌(採薇軒)은 그 호이다. 본관은 정선이니 두문동72현의 한 분으로서 망복충절(罔僕忠節)이 천추에 빛나므로 후세 군자의 추앙이 지속되어 오는 바다.
상계는 백제건국 십제공신 환성군 휘 섭(聶)을 시조로 하여 그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연면(連綿)하고 손세번연(孫勢蕃衍)하여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칭한다.
신라조(新羅朝)에 동문명신(同門名臣) 정선군 휘 선(愃)과 고려조 충렬공 휘 이갑(以甲) 충강공 휘 의갑(義甲) 충달공 휘 락(樂)은 그 훈공이 세사(世史)에 빛나는바 선생은 충렬공의 14세손이다. 왕고(王考)의 휘는 우화(遇和)이며 추충보절 동덕찬화 공신 삼한삼중 대광 문하시중(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이고 고의 휘는 賁이며 호는 두암(杜菴) 관(官)은 삼사 좌사 좌참찬 문충보절보리공신(三司 左使 左參贊 文忠保節保理功臣)으로 평간(平簡)이다. 비(妣)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니 화원군(花原君) 충헌공(忠憲公) 중달(仲達)의 여(女)이다.
선생은 충숙왕때에 출생하여 천자순후(天資純厚)하고 지기영매(志氣英邁)하여 자유(自幼)로 효행이 독실하고 학문과 덕행 초범(超凡)하여 공민왕 6년에 국자진사(國子進士)로 同 9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외직으로 합천군수, 진주목사, 경상도안렴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수찬관, 춘추관편수관, 국자감제주, 성균관사성, 보문각제학, 우부승지밀직사우대언, 진현관대제학, 우산기상시, 전공판서, 전법판서, 예문각대제학,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을 고루 역임하시고 품계로는 정의대부, 간의대부, 광정대부, 봉익대부에 이르고 수충론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으로 익찬공신(翊贊功臣) 등을 받았다.
고려조가 운흘(運迄)하고 조선조가 창건되니 두문동 자정동지(自靖同志)와 더불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맹서(盟誓)하여 자서왈(自叙曰) 伯夷採薇而餓하니 其志可尙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이태조가 초유(招諭)하였으나 이에 불응한 이유로 본향안치령(本鄕安置令)을 내리니 七賢同志인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변귀수, 신안, 김위 등과 함께 정선군 서운산에 은둔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매월 삭망에는 조복을 정제하고 산정에 올라 송경을 향하여 배례하고 國破君亡의 한을 애통하였으며 그 술회시(其述懷詩)에
東來朝服在臣時 遙望松京哭滿巾 唐堯世遠吾安適 矯首西山繼絶塵이라하여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을 시로서 자위하고 충절을 더욱 견지하였다.
당시의 이 시들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민요로 전환되니 이것이 곧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된 것이다.
배(配)는 정경부인 진양 류씨(柳氏)이니 청천부원군 번(蕃)의 따님이며
4남5여를 두시니 장남 맹겸은 합천군수 및 상호군이며, 次로 숙겸은 석성현감이요. 유겸은 통천군수요. 계겸은 상주목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女長은 광산군(光山君) 金子贇의 아들 한로(漢老) 次로 함양(咸陽) 박습(朴習) 병조판서, 수안(遂安) 이흡(李洽) 판전농시사, 원주(原州) 변현(邊顯)은 판사, 전주(全州) 최중온은 판관이다.
선생은 당시명성이 높으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척약재 김구용 제현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삼고 수시로 학문의 진수를 논하였으며 예제정립에 뜻을 두고 조정에 간하여 백일단상(百日短喪)을 3년제로 개정하고 몸소 3년 거려(居廬)를 선행하였으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잘못이 있으면 간쟁을 서슴지 아니하였으며 밖으로는 외적의 방어로 안민(安民)을 도모하고 거민(居民)을 위무구휼(慰撫救恤)하여 치적이 지대하니 칭송이 높았다.
목은께서 자설(字說)을 지어 선생을 찬양하였으며 구정충록 임영야사(九貞忠錄 臨瀛野史)에 그 사실이 명제되어있다. 후일 국가에서 포전(褒典)이 있어 불조현(不朝峴)에 비를 세우고 두문동에 치제(致祭)하였으며 사림이 서산서원에 향사하였으니 그 충절의 역사는 영구 불멸하는 것이다. 묘는 합천군 봉산면 원촌리 소룡산록에 모셨으나 국가시책에 의한 합천다목적저수지공사로 수몰하게 되어 서기 1986년 4월 29일 본향인 정선군 서운산록 갑좌원에 면봉(緬奉)함에 있어 600여년이 경과된 유해가 발굴되니 실로 감개무량하여 그 높으신 유덕을 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첨종(僉宗)과의 협의로 묘비를 건립함에 있어 비문을 후학에게 의논하므로 선생의 행장을 살피건대 여오선조(與 吾先祖) 호조전서 박침(朴忱)과 망복동맹(罔僕同盟)하신 충절신(忠節臣)으로 당시의 교옥(喬獄)과 같은 무거운 두절(杜節)을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술하노니
繼以銘曰 義重泰山이요 忠貫萬歲로다. 杜門朝天이요 陽笠戴蔽라 誓心罔僕하고 名言所詣로다. 旌善取月이요 瑞雲忘世로다. 薇蕨貞志는 夷齊節例다. 垂憲竹帛이요 千載薦弊니라.
서기 1986년 10월 18일
성균관 관장 밀양후인 박중훈 근찬(成均館 館長 密陽后人 朴重勳 謹撰)
예천후인 권창륜 근서 (禮泉后人 權昌倫 謹書)
사단법인 전씨중앙종친회장 전중윤 후손 일동 근수
(社團法人 全氏中央宗親會長 全仲潤 後孫 一同 謹竪)
◎ 罔僕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음,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
◎ 迄 이를 흘
1.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2. 마치다 3. 그만두다 4. 다하다 5. 마침내 6. 모두 7. 까지
◎ 靖 편안할 정
1. 편안하다(便安--) 2. 평안하다(平安--) 3. 꾀하다 4. 다스리다 5. 진정시키다(眞情---) 6. (질서를)안정시키다(安定---) 7. 평정하다(平定--) 8. 조용하다 9. 무사하다(無事--)
◎ 本鄕安置[본향안치]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죄인(罪人)을 그 고향(故鄕)에 내려 보내 거주(居住)를 제한(制限)하던 유형(流刑)
◎ 奕 클 혁
1. (부피, 규모 등이)크다 2. 아름답다 3. 겹치다, 잇닿다(서로 이어져 맞닿다) 4.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시름겨워하다 5. 익히다, 배우다 6. 아름다운 모양 7. 가볍게 춤추는 모양
◎ 篆 전자 전
1. 전자(篆字: 한자 글씨체의 하나) 2. 도장(圖章) 3. 관인(官印) 4. 꽃무늬 5. 전자(篆字)로 쓰다 6. (마음에)새기다
◎ 菁우거질 청, 순무 정
1. 우거지다 a. 순무(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 (정) b. 부추의 꽃 (정) c. 화려하다(華麗--) (정)
◎ 贇 예쁠 윤,예쁠 빈
1. 예쁘다 2. 빛나다 3. 문채(文彩ㆍ文采) 4. 예쁜 모양 a. 예쁘다 (빈) b. 빛나다 (빈) c. 문채(文彩ㆍ文采) (빈) d. 예쁜 모양 (빈)
◎ 緬멀 면, 가는 실 면
1. 멀다 2. 아득하다 3. 생각하다 4. 가는 실 5. 나라의 이름(버마☞미얀마)
◎ 忱 정성 침, 정성 심
1. 정성(精誠) 2. 참마음 3. 믿다 a. 정성(精誠) (심) b. 참마음 (심) c. 믿다 (심)
◎ 蔽 덮을 폐, 닦을 별
1. 덮다 2. 가리다 3. 총괄하다(總括--) 4. 개괄하다(槪括--: 줄거리를 대강 추려내다) 5. 판단하다(判斷--) 6.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7. 해지다 8. 발 9. 울타리 10. 결점(缺點
◎ 안렴사[按廉使]
정의
고려시대의 지방관직.
내용
1276년(충렬왕 2)의 관제개정에 따라 안찰사(按察使)를 개칭한 것이다. 1298년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는 땅이 넓고 일이 많아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더 두었다. 충선왕 즉위 후에 제찰사(提察使)로 고쳐졌다가 충숙왕 때 다시 안렴사로 되었다.
1389년(창왕 1)에 안렴사가 관질(官秩)이 낮아 수령을 통할하고 그 직책을 다할 수 없다고 하여 양부대신(兩府大臣)으로 임명되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렴사 [按廉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찬관[修撰官]
고려시대에는 사관(史館:春秋館)에 두었던 관직으로, 2품 이상이 겸하던 수국사(修國史)·동수국사(同修國史)의 다음이며 한림원(翰林院)의 정3품 이하의 관원이 겸직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1) 설치된 춘추관(春秋館)에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정3품관이었다. 승정원의 6승지(六承旨),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이 겸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찬관 [修撰官] (두산백과)
◎ 편수관[編修官]
정의
조선시대 춘추관의 관직.
내용
사관(史官)의 하나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였다. 품계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에서 종4품까지로서 의정부·홍문관·사헌부·사간원·승문원(承文院)·종부시(宗簿寺) 등의 해당 품계의 관원이 으레 겸임하였다.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되면서부터는 규장각의 정3품 당하관에서 종4품까지의 관원도 으례 겸임하였다. 고종 즉위 초에 사헌부·사간원의 관원이 편수관을 겸임하는 예는 폐지되었다. 편수관이라는 명칭은 조선왕조 이전인 고려 공민왕 때 춘추관이 사관(史館)으로 복구되었던 7년간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편수관 [編修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좨주[祭酒]
정의
고려와 조선 초기에 걸쳐 국자감(國子監)·성균감(成均監)·성균관(成均館)에 두었던 종3품의 관직명.
[네이버 지식백과] 좨주 [祭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성[司成]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가 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2원, 대사성(大司成: 正三品), 좨주(祭酒: 正三品)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사예(司藝: 正四品) 2원, 사업(司業: 正四品) 1원, 직강(直講: 正五品) 4원, 전적(典籍: 正六品) 13원, 박사(博士: 正七品), 학정(學正: 正八品), 학록(學錄: 正九品), 학유(學諭: 從九品) 각 3원이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館職)이라고 하였다.
1392년(태조 1) 좨주라 하였으나, 1401년(태종 1)에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는 정원 2원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년(효종 9)에 1원을 감원하고, 좨주 1원을 새로 두었다. 문묘(文廟) 외 제례(祭禮)가 있을 때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 [司成]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 밀직사(密直司)
[연구사업]한국학사전편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본문
고려시대 몽고의 간섭 하에서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軍機)의 정사를 맡아보던 관서.
991년(성종 10)에 설치된 중추원은 1095년(헌종 1) 추밀원으로 바뀌었다가, 원나라의 간섭기인 1275년(충렬왕 1) 밀직사로 바뀌게 되었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광정원(光政院)으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밀직사로 고치면서 사(使, 종2품) 1인, 지사사(知司事, 종2품) 2인, 동지사사(同知司事, 종2품) 3인, 부사(副使, 종2품) 4인, 지신사(知申事, 정3품) 1인, 좌·우승지(左右承旨, 정3품) 각 1인, 좌·우부승지(정3품) 각 1인, 당후관(堂後官, 정7품) 등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反元改革政策)에 따라 추밀원으로 바꾸었다가 1362년 다시 밀직사로 하였다. 이 때 판사사(判司事, 종2품), 사사(司使, 종2품), 지사사(知司事, 종2품), 첨서사사(簽書司事, 종2품), 동지사사(同知司事, 종2품), 부사(副使, 정3품), 제학(提學, 정3품), 지신사(知申事, 정3품), 좌·우대언(左右代言, 정3품), 좌·우부대언(左右副代言, 정3품), 당후관 등을 두었다.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명칭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직능 및 인원에 커다란 차이를 수반하였다. 즉, 전기에 중추원이 맡고 있던 의례와 궁중서무의 주관 업무 대신에 군기지정(軍機之政)을 관장하게 되어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새로이 양부(兩府)라 불리게 되었다.아울러 조직상에도 엄청난 재추(宰樞)의 수적 증가를 초래해 변칙적인 내재추제(內宰樞制)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 대제학(大提學)
[연구사업]한국학사전편찬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편찬
본문
[정의]
학자 관료를 대표했던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관원.
[개설]
대제학은 조선시대 홍문관과 예문관에 둔 정2품 관직으로 정원은 각 1명이다. 학문의 저울, 문장의 기준이며 학자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에서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도 대제학이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유가(儒家)의 왕도 정치를 지향했던 조선 사회에서 들어와 대제학은 그 의미가 크게 높아졌다. 대제학은 성학(聖學)으로 대변되는 학문과 인격의 사표(師表)로 상징되는 존재였으며, 문무 양반을 통틀어 가장 영예로운 관직이었다. 조선 후기 산림(山林)의 등장으로 대제학의 실제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나, 관직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일본의 강점으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대제학은 존속되었다.
[담당 직무]
대제학이란 호칭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대제학을 문형이라고 부르는 관례는 조선시대에 시작되었다. 문형이란, 문장의 권형(權衡)을 장악하고 학자 가운데 으뜸이 되는 존재로, 글을 짓는 법도의 방향이 문형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서명응(徐命膺)이 조선시대 문화가 번성한 것은 문형 때문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대제학의 별칭인 문형은 원래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주고관(主考官), 즉 지공거(知貢擧)를 의미했다. 그리고 한림원(翰林院)의 후신은 예문관이었고, 조선 건국 초기에 문한(文翰) 관서는 예문관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왔다. 때문에 대제학 역시 예문관 소속 관원이었으며, 으레 대제학은 예문관 대제학을 본직으로 하고 집현전(후일의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으로 하였다.
하지만 겸직이라도 홍문관 대제학은 의무 겸직이라는 점에서 여느 겸직과 달랐다. 즉, 문형은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역할)과 더불어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경연관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문관 대제학은 겸직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조선 초기 이래 문한 관서의 변천 과정 때문에 예문관 대제학을 본직으로 한 것일 뿐 실제로는 홍문관 대제학이 본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양상은 사관인 한림들이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면서 예문관에 녹관(祿官)으로 재직했던 것과 역사적 맥락이 같다.
대제학은 겸직이었기 때문에 의정(議政)으로 교체되거나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토록 겸임할 수 있었다. 또한 문형은 후임 문형을 자대(自代)하는 관행이 이어졌다. 이는 대제학이라는 지위와 위상에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대제학을 가리키는 문형은 원래 과거 시험에서 문장을 저울질한다는 의미, 즉 시험 답안을 채점한다는 의미였다. 앞서 말한 지공거가 바로 이 뜻이었다. 과거시험의 문과 시험 과목인 경학(經學)·사장(詞章) 모두 문장이 기준이었고, 점차 경학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과거를 책임지는 대제학 역시 조선 중기 이후로는 출처(出處)와 덕망이 중요한 선임 기준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학자들 중에서 관료를 선발하는 것은 왕을 대신하는 신하의 책무였고, 인재 발굴·교육·문한이 대제학의 역할이 되었다. 특히 문관을 대상으로 치르는 중시(重試)는 이미 관원이 된 이들에 대한 재교육의 성격을 띤 제도였다. 시험관(試驗官)은 독권관(讀卷官) 의정(議政) 1명과 종3품 2명이었지만, 시험 출제는 대제학이 주관하였다.
조선 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대제학의 직무는 사대(事大) 외교 문서의 작성이었다. 특히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대 문서는 더욱 중요했다.
한편 집현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편찬 사업의 중심 역시 대제학이었다. 세종대의 집현전 편찬 사업에는 세종의 지지와 관심이 큰 몫을 하였지만, 집현전의 운영과 기획은 실제 관장(官長)이었던 대제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제학은 성종대의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 주요 편찬 사업에서도 책임관이었다.
[변천]
대제학은 1401년에 대학사(大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 전기에는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에는 집현전에도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 2)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홍문관에 대제학을 두었다. 후기에는 홍문관 대제학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대제학은 모두 문관(文官)으로 임용하였다.
대제학이란 관직명은 고려 후기에 처음 등장했다. 고려시대에 문한을 총괄하는 지위는 예문춘추관의 대학사와 한림원의 최고 관원인 대학사였는데, 1362년(공민왕 11) 대학사를 대제학으로 고쳤다. 1314년(충숙왕 1)에는 보문관(寶文館)과 진현관(進賢館)에도 대제학을 두었다. 이후 대제학이 대학사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대학사가 대제학으로 바뀌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대학사였는데, 1401년(태종 1) 예문춘추관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면서 예문관의 최고 책임자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면서 집현전 최고 관직으로 대제학을 두었고 예문관 대제학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후에는 집현전이 홍문관으로 바뀌면서 예문관 대제학은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직제는 그대로 성종 때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며 고종 때의 『대전회통』까지 이어졌다.
정조 즉위년에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되었지만, 제학(提學) 이하 관원만 설치했을 뿐 대제학은 따로 두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말까지 대제학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 우상기상시[右常騎常侍]
요약
고려시대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정3품 관직.
목종 때 두었으며, 뒤에 첨의부(僉議府)·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문하부(門下府)에도 두었다. 한때 상시(常侍)로도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개국 뒤 문하부에 속하였으며, 1401년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상기상시 [右常騎常侍] (두산백과)
◎ 전공사[典工司]
고려 시대 산택(山澤)•공장(工匠)•영조(營造)의 일을 관장하던 중앙기관인 공조(工曹). 공민왕(恭愍王) 11년(1362)부터 18년(1369)까지, 또 21년(1372)부터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까지 일컫던 이름. 직제는 판서(判書)•총랑(摠郞)•정랑(正郞)•좌랑(佐郞)이 있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전공사 [典工司]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전법사[Jeonbeobsa, 典法司]
정의
고려시대 법률·사송(詞訟)·상언(詳讞)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 관서.
내용
1275년(충렬왕 원년)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상서6부(尙書六部)의 하나인 상서형부(尙書刑部)를 전법사(典法司)로 고치고, 그 관원으로 판서(判書)·총랑(摠郎)·정랑(正郎)·좌랑(佐郎)을 두었다. 법률·사송·상언(詳讞, 범죄자에 대한 심의)을 관장하던 역할은 그대로였지만, 왕과 권력자들의 횡포로 인하여 법 집행이 남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1298년(충선왕 즉위)에 형조(刑曹)로, 1308년(충선왕 복위)에 언부(讞部)로 고치고 동시에 감전색(監傳色)·도관(都官)·전옥서(典獄署)를 병합하였다. 그 관원으로는 전서(典書) 2인, 그 아래에 의랑(議郎) 2인, 직랑(直郎)·산랑(散郎) 각 3인이 있었다.
뒤에 다시 전법사로 고쳤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문종 때의 구제(舊制)에 따라 형부로 복구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전법사로, 1369년(공민왕 18)에 이부(理部)로, 1372년(공민왕 21)에 다시 전법사로, 1389년(공양왕 원년)에 형조로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법사 [Jeonbeobsa, 典法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당문학[政堂文學]
요약
고려와 조선시대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관직.
고려시대에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이를 개칭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문관 벼슬로 정원은 1명을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면서 참문학사(參文學事)로 개칭되었으나 1290년에 다시 정당문학으로 고쳤다. 충선왕 때 잠시 폐지했다가 뒤에 중서문하성·문하부(門下府)에 이 관직을 두어 조선에 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관하던 문하부의 정2품관으로 정원 2명을 두었는데,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의정부문학(議政府文學)으로 개칭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당문학 [政堂文學] (두산백과)
◎ 정의대부[正議大夫]
정의
고려시대 정4품 문관의 품계.
[네이버 지식백과] 정의대부 [正議大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광정대부[匡靖大夫]
정의
고려시대의 정2품 문산계(文散階).
[네이버 지식백과] 광정대부 [匡靖大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봉익대부[奉翊大夫]
요약
고려시대 종2품 하(下)의 문산계.
1310년(충선왕 2) 제정되었으며, 1356년(공민왕 5) 영록대부(榮祿大夫)로, 1362년 다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고쳤다. 1369년 종2품 상(上)으로 하여 다시 영록대부로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익대부 [奉翊大夫] (두산백과)
◎ 백이[伯夷, bó yí]
고죽국(孤竹國) 사람으로 성은 자(子)이고, 이름은 윤(允)이다. 상(商)나라 말기에 고죽국(孤竹國) 제7대 군주인 아미(亞微)의 장자이다. 아우로 아빙(亞憑), 숙제(叔齊)가 있다. 고죽국의 군주는 셋째 아들인 숙제(叔齊)를 계승인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하였다. 백이도 거절하고 숙제와 더불어 도피했다.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이를 극력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주무왕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은거하여 평생 나오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이 [伯夷, bó yí]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김충한(金沖漢)
생졸년 미상. 고려 후기 문신. 자는 통경(通卿), 호는 수은당(樹隱堂)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증조부는 김궤(金軌)이며, 조부는 김영(金瑩)이고, 부친은 김서인(金瑞仁)이명 모친은 형군소(邢君紹)의 딸 진주형씨(晉州邢氏)이다.
고려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있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등 6은(六隱) 중 한 명이다. 고려가 운(運)이 다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그를 위시한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벼슬을 버리고 송경(松京)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세인은 이들을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이라 하였다. 1822년(순조 22) 개성유수(開城留守) 오한원(吳翰源)이 요청하여, 고려 조의 예의판서(禮儀判書) 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 두 사람을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 표절사(表節祠)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부인 서흥김씨(瑞興金氏)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령(縣令) 김자(金磁)‧부사(府使) 김승(金繩)‧직제학(直提學) 김작(金綽)이며, 딸은 좌찬성(左贊成) 신포시(申包翅)와 혼인하였다.남원군(南原郡) 송동면(松洞面) 두신리(杜新里)에 신도비(神道碑)와 세거비(世居碑)가 있으며, 송동면 두곡리(杜谷里) 두남사(杜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유번[柳蕃]
정의
고려 후기 제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유반(柳潘), 호는 벽은(僻隱). 고려의 멸망 과정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고, 이때 초명을 버리고 유번(柳蕃)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유지택(柳之澤)이다. 후손으로 청풍 출신의 효자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기록된 유자하(柳自河)가 있다.
활동 사항
유번은 1378년(우왕 4)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로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89년(공양왕 1) 목은(牧隱), 도은(陶隱), 양촌(陽村) 등 제현(諸賢) 27명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공조 판서(工曹判書)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바로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여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벽은실기(僻隱實記)』 1책이 있다. 목판본으로 권1에는 「세계도(世系圖)」를 비롯하여 「영종대왕부조현연구(英宗大王不朝峴聯句)」, 「영종대왕어제어필두문동비(英宗大王御製御筆杜門洞碑)」 등 두문동 사적과 관련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실기(實記)를 기록하였는데, 유번의 사실(史實)을 매년 적은 것이다. 또한 상언초(上言抄)는 경기도(京畿道), 공충도(公忠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등 6도의 유생 600여 명이 유번을 두문동충현(杜門洞忠賢)에 배향할 것을 상소한 글이다. 그리고 단자(單子) 역시 두문동충현으로 배향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번 [柳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한로[金漢老]
본관 광산.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 1383년(우왕 9)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의사좌랑(禮儀司佐郎)을 지냈으며, 태종과는 문과에 함께 급제한 동방(同榜)으로 조선 개국 뒤 태종의 우대를 받았다. 1404년(태종 4)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어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명나라에 있는 동안 행상을 거느리고 가서 사리사욕을 채운 사건이 탄로나 파직되었다. 1407년 딸이 양녕대군과 혼인하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고, 1408년 한성부판사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예조판서에 올라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어 대사헌(大司憲) ·의정부참찬사(參贊事) ·예문관대제학 겸 의용순금사판사(義勇巡禁司判事)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켜 세자를 오도하였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하옥되어 직첩이 몰수되고 죽산(竹山)으로 부처(付處)된 뒤 세자와의 인연이 끊겼다. 1425년에는 보관하던 사초(史草)를 불태워 자손금고(子孫禁錮)의 처분이 가중되는 등 자손들의 벼슬길도 막혔다.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한로 [金漢老] (두산백과)
◎ 박습[朴習]
요약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태종 때 전라도도관찰사로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섰다. 대사헌으로 방간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상소하나 이루지 못했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병조판서 재임시의 죄로 유배, 참수되었다.
본관 함양. 태종 때 강원도관찰사 ·인령부윤(仁寧府尹)을 지내고, 1412년(태종 12)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섰다. 1417년 경상도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어 방간(芳幹)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상소하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고, 1418년 병조판서 재임시 태종에게 병사(兵事)를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사천(泗川)에 유배되어 참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습 [朴習] (두산백과)
◎ 변현[邊顯]
요약
조선 초기의 무신이다. 고려 말에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무신으로 벼슬이 통훈대부 관봉상시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원주이며,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렬(邊安烈)의 장남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조선 초기에는 무관으로 지냈다. 벼슬이 통훈대부 관봉상시사에 이르렀고, 1402년(태종 2)에는 조사의(趙思義)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곤장형을 당하고 하방(遐方)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묘소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현 [邊顯] (두산백과)
◎ 이색[李穡]
고려 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방 폐지, 3년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두산백과)
◎ 정몽주[鄭夢周]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두산백과)
◎ 김구용[金九容]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제민(金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을 때,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해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다.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우왕 7)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저술활동
김구용은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 김구용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김구용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인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용 [金九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