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창세기 22:7-10
제목: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일시: 2020. 10. 18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 구약의 성경인물들과 그들의 스토리들은 신약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구약의 인물이 이삭이다. 구약의 이삭을 보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
*이삭과 예수님은 나시기 전에 이름까지 지어진 예고된 약속의 아들이었다.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 17:19).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0∼21). *이삭이나 예수님이나 생물학적으로 출생이 불가능한 가운데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에 이삭이 태어났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이삭이나 예수님이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독자이다.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독자 이삭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였다. *이삭이나 예수님이나 둘 다 아버지의 결단에 의해 희생제물로 버림받은(?) 아들들이다. *둘 다 희생제물이었지만 새롭게 거듭난(born-again) 존재가 되었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진정한 약속의 아들로 거듭나고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사망을 이기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하셨다. *그들을 통해야 정통성 있는 족보가 이어진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야 정통가문에 속하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II. 예수님과 이삭의 유사성 가운데 아껴두고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이삭과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공통분모는 “순종”이다. 성경인물 가운데 가장 특색 없어 보이고 얽힌 얘기가 별로 없어 가장 밋밋해 보이는 사람이 이삭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버팅긴 것이 있어야 자기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데 이삭은 언제나 “네 그러지요”라고 순종하는 스타일로 살기 때문이다. 부딪힐 만한 일이 있으면 자신이 뒤로 물러나곤 했기에 부각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삭에 대해 가장 진하게 각인되어 있는 성경 스토리 역시 오늘 본문인데 여기에서 조차 더 조명을 받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이삭 아닌 아버지 아브라함이다.
이삭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하는 하나님의 시험 문제를 받아 든 아버지와 함께 모리아 땅으로 간다. 쭐래쭐래 따라가는 것이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두 하인들과 함께 삼일 만에 도착한 모리아 땅, 이삭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는 어느 한 산으로 아비 아브라함과 함께 둘이서만 올라간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번제 나무를 지고 올라갔는데, 계속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사드릴 때 꼭 필요한 “어린양”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삭은 입을 뗀다. “내 아버지여.” 아무 말없이 묵묵히 걷고 있던 아들이 침묵을 깨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꿈쩍했을 것이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을까? “녀석아 바로 너다”라고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답한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아하”라고 끄덕이는 이삭과 계속 길을 가는 부자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곳에 이르게 된다. 이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숨기고 왔지만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결정적 순간이 온 것이다. 방해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사라도 일찌감치 집에 두고 왔다. 함께한 두 종들은 나귀와 함께 산 아래에 두고 왔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있었으면 아브라함을 도와서 아들 이삭을 잡게 하는 것보다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는 먼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다. 아마 이삭은 나무를 벌여 놓았을 때까지도 양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다음은 그 장작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놓을 차례다. 모리아산 제사 제물인 이삭을 올려놓아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어떻게 결박할 수 있을까? “이삭아 사실은 너가 희생제물이거든...” 뭐 이렇게 설득했을까? 아니면 장작을 쌓고 있는 이삭 뒤로 다가가서 평소 양잡던 실력으로 급소를 눌러 잠시 기절시킨 후 묶었을까? “손 좀 내 밀어봐 한번 묶어볼까?”라며 농담하듯 속였을까? 어떤 방법이든 결박하려는 바로 이 모멘트에서는 이삭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9절)라는 설명 뿐이다. 이삭은 그 결박을 받았다. 요세푸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삭이 적어도 25세는 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 정도 청년이면 125세의 아비는 힘으로 아들을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 이삭은 반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이삭이 선택한 것은 희생제물로서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는 “순종”이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있듯이 이삭에게도 자신의 인생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에서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시험하셨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자녀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약속의 내용인 아들 이삭을 사랑하는지 테스트를 하신 것이지만 아들 이삭에게는 순종하여 희생제물이 될 것인지 버팅기고 나아갈 것인지를 물으신 것이다. 아들 이삭의 특징은 바로 순종이다.
이삭의 이러한 번제물로서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주신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의 탑 이미지는 생명까지 내어주는 어린양의 순종이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어린양인 것처럼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순종의 제물이 된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이 피를 내어줌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어린양이 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은 불순종하였지만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의 모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삭의 순종은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요 인격적인 반응이다. 기계는 순종할 수 없다. 그냥 작동할 뿐이다. 순종은 인격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은 제물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었다. 이삭은 개별 인격으로 자신의 결정과 인생이 있었다. 그는 순종으로 답한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다. “내가 심히 고민하게 되어 죽게 되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에게도 그 고민을 털어 놓는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고민을 했다는 것은 프로그램에 따라 입력된 기계적 반응이 아니요 자기결정을 하신 인격적인 반응이다. 고민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름답고 위대한 결단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청년 이삭처럼 자기의 뜻대로 행할 수 있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하셨다.
III. 순종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그 어떠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 자존심도 없어 보이고 강력하게 자기주장도 못하는 것 같고 순한 양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따르기에 약해 보인다. 그러나 순종은 그 숱한 생각과 고민 끝에 내린 결단과 결정으로 승리한 “자기극복”이기에 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이다.
회사 보스에게 순종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순종은 자원하는 순종이 아니요 돈이 웬수이기 때문에 따르는 “복종”일 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더러워도 참으면서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군대의 상급자에게 순종하기는 쉽다. 자원해서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급에 따라 말을 듣는 “상명하복”일 뿐이다.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군대에는 순종이라는 것이 없다. 그저 해야만 할 뿐이다. 그러나 순종은 돈이나 계급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이기면서 스스로를 콘트롤 하면서 행하는 것이기에 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저항하며 “나 그런 어린양 안하겠다”고 버팅길 수 있었지만 결박되어 순종함으로 진정한 강자임을 증명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강하신 분임을 증명했다. 강한 사람은 저항하는 사람이 아니요 순종하는 사람이다.
예)교회 안에서 지체들이 이런 저런 일을 할 때 늘 신기하다. 교회의 어떤 일이든 구속력이 전혀 없는데도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벌금을 내냐?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고 다음 달 독촉장 마눙이 날라오냐? 지체로서 꼭 하면 좋겠는데 아니한다고 고소하고 감옥에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알아서 순종하여 결정하고 행할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공동체는 구속력도 조직도 가장 약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강력한 공동체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를 이기고 순종하여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장 센 녀석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이기고 순종하는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다. 내게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면 이런 강한 자를 약자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순종은 스스로 자원하는 것인데 “자원하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자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하는 강자를 억지로 시켜서 하는 약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세요 자원하세요라는 말조차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순종하는 사람이 약해보이지만 강한 사람인 것처럼, 겸손한 사람은 없어보여도 뭔가 내 놓을 것이 있는 가진 사람이다. 용서는 약한 사람이 비겁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여유가 있고 넉넉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으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일본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수 있을 때는 우리가 여유가 생길 때이다. 사과할 때 용서보다 내가 강할 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약자의 모습이 아니다. 강자의 모습이다. 부모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미운털 박힌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은 강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약해보여도 강하기 때문에 달리신 것이다.
순종하는 자는 무서운 사람이다. 함께 일하다 보면 어떠한 사람이 무서운가? 까다롭게 늘 제동을 걸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허나 살아가면서 정말 무서운 사람은 누구인가? 헌신하는 사람이다. 순종하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용서하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런 모습을 한 사람들은 참으로 함께 일하기 좋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고 전혀 무섭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나를 가장 부담스럽게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순종에 결과, 용서의 결과, 겸손의 결과, 사랑의 결과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두렵다.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딴 길로 가면 걱정은 되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다. 왜냐하면 설명할 충분한 논리와 슐디궁이 있기 때문이다.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한다.
예)베를린에 확진자가 많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코로나 반대데모도 하지 않았는가? 마스크의무화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정부통제가 지나치다. 코로나19 위험이 과장된 것이다. 음모다 등등으로... 독일 사람들은 법도 잘 지키고 룰이 있으면 잘 지키는 사람들인 줄 알고 있었는데 또 자기 주장도 강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지니 “거봐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까운 생각보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고 “거봐”라고 할 답변이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은 걱정이 된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걸리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고, 그렇게 열심히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제 마음이 걱정이 된다. 그리고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 보세요”라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둘 다 순종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부자에 대해서 화들짝 놀라셨다. 번제물로 드리라고 한데서 드리는 아브라함이나 결박되어 칼이 들어오는데 마음을 내려놓고 제단위에 누워있는 이삭이나 하나님을 놀라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른다. 두 번을 불렀다는 것은 급하다는 말이다. 불러도 천천히 부르지 않고 다급하게 불렀을 것이다. 약속의 아들로 주었는데 정말 죽이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순종하는 사람은 강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책임 지셔야 하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니 나중에 책임을 돌리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순종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하나님 어떻게 하셔야 합니다라는 내 마음속에 부담이 가득 들어가게 된다.
IV. 아버지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순종을 해야 할 자신이었다. 이삭은 자신이 번제물이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 예수님을 예표했다. 모리아산이 갈보리산으로 연결이 되었다.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심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 십자가의 피는 우리에게 흐르고 있고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 닮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순종이다. 그 순종을 이루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당신의 강함을 보이신 것처럼 강한 사람이 된다.
진짜 강한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닮아 순종의 사람인 우리는 강한 사람이다. 아무도 덤빌 수 없는 진짜 무서운 사람이 되라.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제 한 주간이 새로 시작되었다. 세상에 버팅기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어떻게든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즐겁고,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