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송회/靑石 전성훈
계절 따라 봄이 물씬 익어가는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한갓진 창포원에 하나둘 봄을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온다. 맑고 깨끗한 늦은 봄날의 하늘 아래, 낮게 떠도는 구름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듯한 우람한 도봉산과 수락산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나른해지는 표정으로 한가롭게 걷는 듯 마는 듯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봄날의 절정이 느껴진다.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걷는 젊은 부부, 무리를 지어 핀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젊은 연인, 뜀박질하는 아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따라붙는 아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누 거품 놀이하는 아이와 그 모습을 보고 웃음 짓는 부부, 2~3인용 작은 텐트를 치고 먹거리를 가져와 쉬고 있는 단란한 가족,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 놓고 누워서 책을 읽는 아빠와 술래잡기하는 어린 딸의 모습, 그런가 하면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노인 부부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걸으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바로 옆 평화문화진지 잔디운동장에서는 운동회를 하는지 아이들이 신나게 달린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창포원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냥 기쁜 듯이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그 옛날 내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다. 이토록 다채롭고 따듯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봄날의 멋진 향연이 펼쳐지는 창포원에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봄의 향기를 질리도록 맡으며, 너와 나, 그리고 나 홀로 조용히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몸과 마음이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창포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 도봉을 사랑하는 문인 모임인 ‘도봉문인협회’에서 시와 산문 낭송회를 연다. 모임에 참가하는 문인은 시, 시조, 동시 그리고 산문 중에서 한 편을 미리 집행부에 제출하고, 행사 때 본인이 직접 낭송한다. 시 낭송회에 몇 번 참석해 보니까, 낭송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솜씨에 따라 듣는 이의 마음을 휘저어 놓거나, 듣기 거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애틋하거나 따뜻한 감정을 넣어 글을 낭독하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조용히 귀 기울이게 된다. 중후한 목소리의 남성이 낭송할 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어떤 울림이 들리는 듯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처럼 목소리도 탁하고 재능도 없는 사람이 낭송하려면 상당한 용기와 모험이 필요하다. 이번에 제출한 시는 4월 초순, 북한산 대동문을 향하여 진달래 능선을 오르며 떠오르는 감상을 표현한 글이다. 시의 짜임새나 내용이 뛰어나거나 멋있는 느낌은 없어도 봄의 정경을 차분히 노래한 것이다. 힘들게 땀 흘리며 산을 오르는 늙은이가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그려 본 것이다.
“ 겨우내 앙상하게/말라버린 나뭇가지에/연분홍 물감을 뿌려놓은 듯/붉게 물들인 그대여, 세상 물정 모르는/선머슴의 가슴에/수줍어 어찌할 줄 모르는/그리움의 불을 지펴놓고, 따사로운 봄을 닮아/꽃을 파는 소녀처럼/온 산하에 색동옷을 입힌/그대는 누구인가요 ” [진달래꽃, 전문]
여러 문인이 순서에 따라서 각자 자신의 시나 산문을 낭송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있고, 낭송이 끝나면 두 손으로 크게 손뼉 치면서 즐거워한다. 숲속의 새들도 낭송 소리를 듣고 반가운지 지지배배 소리 내어 노래한다. 숲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한다. 조그마한 꼬마 아이가 궁금한지 문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와 두리번두리번하는 모습이 아주 귀엽다. 즐거운 한때를 위하여 낭송회 중간에 노래를 불러 주시는 나이 지긋하신 여류문인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다. 뜻있는 낭송회가 끝나고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반갑다고, 멋지게 낭송했다고, 준비하는데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 기꺼이 술 한 잔 건넨다. 따가운 5월의 햇볕 아래 마음을 열고 한순간이나마 함께 지내는 시간이 우리 모두를 오늘 하루만이라도 젊어지게 하는 것 같다. (202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