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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월1일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원] "제대"와 같은 인간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요한 2, 22 - 28
† 복음 : 요한 1, 19 - 28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듣고 간직하여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아버지 안에 머무를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드님 안에 머무는 데에 존재한다(제1독서).
★ 사람들이 요한에게 누구인지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밝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제1독서는 영원한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심리학자 프롬의
유명한 구분을 빌리자면, 자신에게 그저 붙어 있는 것인 ‘소유’에
매여 있는 대신에 자신의 온전한 ‘존재’를 깨닫는 체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묘한 것은, 이러한 본연의 존재 경험은 오만과 허영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내면의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신원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조금의 꾸밈도
없이 표현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발견합니다.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이라는 신원을 철저하게 깨쳤습니다. 자신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이러한 겸손은 그저 몸에 밴 습관적인 공손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요즘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자존감’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열렬히 추구하는 갈망이 그리스도를 만나
온전히 결실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체험한 사람의 겸허한 자세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는
증거가 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나는 누구인가?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2일 주님 공현전 목요일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요한1,19-28)
나는 누구인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구시무식 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두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먼저 ‘기도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가정이되기를 당부하시면서 청원기도를 많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믿고 간절히 청하라.
개인의 건강, 사업, 바램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되
남북간의 화해와 용서,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아울러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가장 큰 사랑을 드린 분들이다. 가장 좋은 것,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을 영광을 위해서 내어드린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순교자 124위의 시복 시성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순교자의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은총이 충만한 새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당신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뵙게 된
꼬마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예수의 데레사’로 표현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도 ‘데레사의 예수’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를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그야말로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 본분에 충실하였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입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진실에 대한 증언과
고백이 나올 뿐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늘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쳇말로 주제파악을 하였고, 분수를
알며,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지켰습니다.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에 걸 맞는 자리에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주님 눈에 들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세상의 부귀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진료를 다 마친
뒤에 점심식사를 위해 한 중국식당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값비싼
코스 정식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고급스러운 식당 분위기에 맞춰
음식이 차례대로 나오는데 참 맛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해서 “와~ 맛있다. 참 맛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요. 그
순간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 주위에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어떤 음식을 먹든 항상 ‘맛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이 모습이 보기에 좋았나 봅니다. 하긴 음식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는 모습이 안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 역시 “맛있다”라는 말을 쓰면서 이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이지요.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은 이렇게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좋고 긍정적인 것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나쁘고 부정적인 것들도 남들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전달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
다른 질문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가득한 세상이 되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따져보세요.
두 말 할 것 없이 좋고 긍정적인 모습을 전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말, 생각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 좋고 긍정적인
모습들이 나의 이웃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그런 모습을 전달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말, 아직 여유가 없다는 등의 말들을 많이 하고 있으며,
세상의 기준만을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고행을 하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하느님을 철저하게
섬겼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절대 권력자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그의 잘못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꾸짖는 용기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너무나도 획기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예언자로,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 스스로 “나는 예언자다. 나는 메시아다.”
라고 한 마디만 해도 그에게는 엄청난 부가 따를 것이고 사람들의
끊임없는 존경과 섬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단순히 예수님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좋은 모습을 세상에 전하는
모습을 간직하고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도 암 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다.(정채봉)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신 세례자 요한.
입센의 편지(‘행복한 동행’ 중에서)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여배우 울프 부인에게 한 연극의
하녀 역할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녀 역할이 조연임을 안 울프
부인은 단박에 거절했다.
입센은 안타까웠다. 조연을 가볍게 보는 울프 부인의 거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센은 작품의 완성도가 배역의 조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입센이 판단하기에 하녀 역할은 울프 부인이
제격이었고, 그녀가 아니면 연극은 완성되지 못할 터였다. 입센은
고민 끝에 이런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울프 부인, 당신 외에 이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할 배우는
없습니다. 극 중 남녀 주인공과 하녀는 완벽하게 통일된 장면을
이룹니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그들 사이의 조화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당신이 하녀 역할을 맡아 주어야
가능합니다. 저는 부인이 주연이나 조연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배역에서도 진정한 인물을 창조해 내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부인은
배우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읽은 울프 부인은 입센의 겸손함에 감동한 반면, 자신의
교만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즉시 하녀 역할을 받아들였고,
연극은 크게 성공했다.
우리는 항상 주연만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또 내 자신도 주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극에서 주연만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의 삶 안에서도 주연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는 사람이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주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연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 그 겸손한
모습을 우리 역시 받아들여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광야 아닌 삶은 없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광야 아닌 삶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희망을 찾으십시오.'
2014년 가해 1월2일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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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란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광야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어둠이며, 목마름이고
굶주림이며, 두려움이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며, 의심과 불신의
늪이며, 절망의 상태 즉 죄의 결과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 광야 안에
던져진 나를 인정할 때, 그리고 나 역시 광야의 부조리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은총의 시각이 열린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 소개한다.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한다.
‘외치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외치셨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광활한 광야에서 마지막 날까지
살아가야만 하는 지도 모르겠다.
선과 사랑과 신뢰 그리고 정의와 평화만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어둠, 목마름, 굶주림, 두려움, 불확실,
불신, 절망.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조차도, 우리는 선과 사랑과 믿음과 정의와 평화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외치신인 것이다.
우리는 광야를 신앙적 체험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체험이
있은 후에, 그분의 소리가 되어 어딘가에서 아파하고 있을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임을 믿는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광야에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R) -
요한 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광야에서>
당시 세례자 요한이 벌인 세례갱신운동은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습니다.
또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청빈한 생활, 말과 행동의 조화, 호소력 있는 외침,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예언자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말조차 퍼져나갔습니다.
“혹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그 정도 인물에다, 성품에다,
정직함에다, 탁월한 언변...아마도 가능성이 농후할거야”
사람들의 초점이 온통 세례자 요한에게 쏠리다보니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찬밥신세가 된
사람들, 갑자기 파리 날리게 된 유다 지도층 인사들, 유다 최고의회
사람들은 은근히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두려움도 느껴졌습니다. ‘혹시라도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라면 우린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줄을 설려면 확실히 서야지’ 하는 마음에 세례자 요한이 정말
메시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조사관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나, 그 누군가에게 줄을 서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간 세례자 요한의 위치나 입지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높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추앙과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무척 부담스러웠겠습니다.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메시아가 아니라면 적어도 엘리야 정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 한 번의 단답식 대답으로 지금까지 자기도 모르게
쌓아올려진, 그리고 꽤나 부풀려진 자신을 일거에 허물어트립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예언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에 재차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겸손하게도 세례자 요한은 솔직히 자신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뒤에 오실 메시아에 비교하면 광야에 떠도는 소리,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소리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시선을 받았지만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를 향해 주인공이 절대로 아님을 명백히 밝히면서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였더라면, 준비가 좀 덜되었더라면
군중들의 환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덜 닦이고 덜 준비된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자신의 삶을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집중을 뒤로 하고 다시금 황량한 광야로
나아가는 세례자 요한의 쓸쓸한 뒷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광야에 메아리치는
소리’ 역할에 만족하는 세례자 요한의 바람 같은 삶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대''와 같은 인간
2014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복음 : 요한 1,19-28
< '제대'와 같은 인간>
손연자씨의 소설 ‘까망 머리 주디’의 줄거리입니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 간 12살 소녀 주디가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학교 킹카 로빈과의 들뜬
데이트가 있기 전까지 주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 자각을
못하고 행복하게 삽니다. 주디는 로빈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데이트에 나갑니다. 그런데 반응은 매우 안
좋았습니다. 로빈은 주디를 “노란 원숭이”라고 놀리고 주디를 혼자
내버려둔 채 떠나버립니다.
이때부터 주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까만 머리, 납작한 코, 옆으로 찢어진 눈... 주디는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노란색을 증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랗게 물든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라내고 보자기를 쓰고 학교에 갑니다. 주디는
점점 학교에서도 고립되고 왕따가 되어갑니다.
가정에서조차 오빠와 싸우면 부모님은 입양아인 자신보다는
오빠의 편을 들어주고, 또 외로워서 주워 키우던 고양이를 엄마가
창문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디는 더 이상 어디에
발을 붙여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무작정 고양이를 찾겠다고
집을 나옵니다.
그런데 어두운 골목길에서 불량배를 만나고 칼로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나타난 엄마가 주디 대신 불량배의 칼에 맞아
쓰러집니다. 주디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검은 머리를 가진 자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때 로빈으로
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너의 까만 머리가 신비로워 좋아했었던 거야.”
우리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자아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온전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나의 자아정체성이 회복되는 길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면,
마치 주디가 자신의 검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맞추려고’ 합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매우 당당합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그들 마음에 들기 위해 그 중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길을 고르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때 내가 해야
할 일도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닦는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위해서는 회개의 세례를 주어야 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권한을 주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군지
명확히 알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아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마음에 들기 위해 내 자신을 바꿀 마음은 꿈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내걸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갇히고 순교하게 됩니다.
사람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환영받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
덜 사랑받았고 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불안하기에
칭찬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 사람의
시선에 좌지우지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입니까?
이태리 성 바오로 대성당에 들어가 보면 그 큰 성당의 규모에
비해 중심 제대가 다소 작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실리카를 지금 크기로 짓기 전에 제대만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불나기 전 제대를 중심으로 다시 더 큰
성당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왜 제대는 그대로 내버려두었을까요?
왜냐하면 성당의 중심은 제대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맞춰 제대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에 맞춰 성당을 지어야합니다. 제대는
하느님이 내려오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굳건히 서있을 줄
몰라서 누구도 그의 주변에서 집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깨달아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셰례자 요한의 고속도로
2014년 가해 1월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의 고속도로
고속도로가 깔리며 도시들의 왕래가 잦고 생활권도 커졌습니다.
굽고 좁고 위험하고 지루한 거리의 자동차 생활을 확 바꿨습니다.
곧바로 가는 길의 편리함은 경제는 물론 생활 전반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고속도로를 사람들 사이에 놓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계층의 골짜기를 메우고 개성의 언덕을 없애 평탄하게 통하면 말입니다.
세월을 낭비 말고 빠른 이해와 성숙으로 하느님나라에 까지 말입니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이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14년 가해 1월2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오늘은 조 규만 바실리오 주교님의 축일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주교님께서는 부제님이셨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셨고,
축구를 잘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로 주교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유학을 다녀오신 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저는 본당에서 사목을 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저는 서서울 지역 교육담당 사제 업무를 맡게
되었고, 주교님께서는 서서울 지역 교구장 대리를 하셨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도와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당에 사목
방문을 오시거나, 지구에 미사를 하시는 경우에도 30분 전에는
오셔서 성당에서 조배를 하셨습니다. 손에는 묵주를 드시고,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사제, 상처를
입은 사제, 사목활동 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제들을 만나 주셨고,
그분들에게 용기를 주였습니다. 사석에서는 친근한 이름을 불러
주셨고,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제들의 친교와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사제들과 함께
도보 성지순례를 가기도 하셨고, 산행을 하기도 하셨고, 체육대회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주교의 첫 번째 사목의 대상은 바로 함께 일하는
사제들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강론과 강의를 잘 해 주셨습니다. 강의와 미사를 부탁드리면 언제든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성모님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고,
신자들은 모두 주교님의 말씀을 좋아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 중에
있기 때문에 좋은 말씀이 깊은 샘물처럼 마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종무 미사 때도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침 서울대교의
새로운 보좌 주교님들께서도 미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신 주교님들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신
주교님께서 식당에 갔는데 종업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었더니, 주인이 말하더랍니다. 하늘나라는 모두 ‘셀프 서비스’입니다.
주교님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어
보았더니, 주인이 말하더랍니다. 교황님께서는 ‘배달’가셨습니다.
주교의 역할은 이처럼 봉사와 희생의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사제가 주교직을 맡아 달라는 교황청의 연락을 받고서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저는 나이도 어리고, 아는 것도 없고, 덕이 모자랍니다.’
정중하게 주교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한 달
후에 교황청에서 답장이 왔다고 합니다. ‘나이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교회가 채워 줄 것입니다. 주교님들 중에
덕이 있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 또한 주교직을 수행하는 가장
큰 덕목은 ‘겸손’ 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조규만 주교님과
이제 새로이 주교직이라는 큰 십자가를 지시는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과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께 축하를 드리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선물로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2일 목요일, 성 대 바실리오(330-379)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330-390) 기념일,
1요한2,22-28 요한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의 신원을, 정체성을 묻습니다.
과연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이보다 중요한 물음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세상 것들에 소유되어 참 나의 존재를 잊고 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모두를 얻었어도 참 나를 잃었다면 그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 나를 찾아 살 때 기쁨이요 자유입니다.
참 나를 찾아 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참 오묘한 역설의 신비가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을 닮아갈 수록
고유의 참 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참 나가 되는 일은,
참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 나를 비춰주는
관상의 거울입니다.
많은 이들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혜민 스님의 책을
찾는 것도 바로 참 나를 찾는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나를 알라’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관상의 거울에 드러나는 주님 얼굴을, 참
나의 얼굴을 보라는 것입니다.
멈추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것, 침묵하지 못하고 계속 말하는
것을 일컬어 현대인의 영적질병이라 합니다.
내면이 허하면 허할수록 계속 움직이게 되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은 누구요?”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관상의 거울인 주님에 비춰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참 나의 얼굴,
나의 신원입니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탐구의 전형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닮을 수 없고 닮아서도 안 됩니다.
닮을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이요, 주님을 사랑하여 닮을수록
참 나가 된다는 사실이 참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라 대답합니다. 애가 탄 이들은 집요하게 또 묻습니다.
요한의 답이 통쾌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바로 주님이 요한의 삶의 의미임이 확연히 들어납니다.
관상의 거울인 주님 안에 환히 드러나는 요한의 신원입니다.
주님이 없는 세례자 요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요한에서 주님을
뺄 때 무의미하고 허무한 존재의 요한이듯 우리에게서 주님을 뺄
때 우리 역시 무의미하고 허무한 존재로 들어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의미요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에 주님이 더해질
때, 주님과 하나 될 때 참 나의 충만한 삶입니다. 참 나를 찾아 살 때
충만한 삶이요 참 나를 잊고 살 때 공허한 삶입니다. 존재를 살지
못하고 소유를 살 때 삶의 허무 역시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소유에, 돈에, 일에 소유되어 참 나를 잊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소유의 쾌락이요 존재의 기쁨입니다.
요한 사도의 간곡한 권고가 가슴을 칩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 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답은 멈추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정주하며 주님의 관상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길뿐입니다. .
주님 안에 머물 때 주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는 진실해지고
순수해져 참 나의 발견입니다.
바로 매일 성전 안에 머물러 바치는, 주님 관상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거듭되는 요한 사도의 권고입니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참 나를 알게 되어 확신에 넘친 의연하고
당당한,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정주할 때 불안과 두려움도 점차 약화되고
내적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관상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주님의 얼굴, 참 나의 얼굴이자,
관상의 샘에서 샘솟는 기쁨과 활력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안에 머물러 ‘관상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또 ‘관상의 샘’에서 샘솟는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촉촉히 적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하느님 안에서...
2014년 가해 1월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1서 2장 22~28절)
한 달 전 쯤에 선배 신부님이 오셔서 주일 미사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대림시기이기도 했고, 신자들이 다양한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배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었는데요. 먼 길이라 부담이 될 텐데도 와 주셔서 미사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말로 강론을 해주셨는데요.
신자들이 그 신부님의 분위기를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또 왔으면 좋겠다.. 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 신부님을 자주 뵙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멀리서 뵐 때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본당 신부님이시기도 하셨고, 두물머리에 4대강
사업 반대 미사 하러 다닐 때도 같이 다녔었습니다. 또 작년에
모금 다닐 때 소극적인 제가 할 수 있는 방법도 이미 해 보신
경험으로 조언을 해 주셨었습니다.
신부님도 본당에 계실 때 모금이 필요한 상황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내성적이셔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셨던 거 같은데, 신부님이 쓰신 방법이 이런 겁니다.
본당마다 다니면서 쌀을 드리고 편지를 써서 남긴 겁니다.
그걸 보고 도움을 주시는 분도 있었고 쌀값을 주신 분들도
있었다.. 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렇게 한 번 다녀봐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고구마와 쌀을 들고 본당을 돌았었습니다. 다니면서
선배 신부님들의 시선에 대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감사했고, 또 그러한 길을
먼저 열어 보여주신 신부님께 감사를 드렸는데요.
이번에도 제가 해야 할 일과 방향에 대해서 보여주신 거 같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려주셨거든요. 동생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본인도 안식년동안 함께 지내면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었는데 너무 좋으셨답니다. 그리고 내년 정도면 농사가
본전은 되지 않을까.. 자리를 잡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신부님 마음에는 입으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천막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처럼, 몸으로
일해서 먹을 것들은 조금이나마 마련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들을 하셨는데요.
오늘 독서에 나오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생각이 났습니다. 독서
마지막에 보면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 말씀이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체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뜻을 알아듣는 것과 그
일을 실행하는 일일 텐데, 먼저 생각해 본 것이 그분의 뜻이 뭘까..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신부님이 보여주신 삶과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왠지 하느님께서도 나에게 그런 삶을 살아보길
바라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안 되도 먹을거리 정도는 준비할
수 있는 모습... 그 일을 위해 몸을 움직이고 일하는 모습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시행착오가 많겠지만 몸으로
일하고 삶으로 살아간 것을 신자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런 모습을 올
해 한 번 만들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그분 안에서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오늘 주교님께 세배를 드렸다.
세뱃돈으로 주임 신부님들은 천원을 받았고,
보좌신부님들은 만원을 받았다. ^^;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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