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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담론, 25장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중)
신영복 선생은 ‘햇볕’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부’는 그분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 곧 ‘깨달음’이었다. 깨져야(깨다) 시작할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다(알음). 그다음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분에게 ‘중심’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이지만, ‘변방’은 창조와 혁신의 공간이었다. ‘하방연대’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론이었다. ‘존재’는 이제 ‘관계’로 나아가야 했다. 관계를 통해 인식하고, 관계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바꾸어가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었다.
왜 절망하는가?
숨이 막히는 세월이다. 어쭙잖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시간부터가 고통의 시작이었다. 그날 옆 교회에는 당선 축하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리고 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냥 들려오는 소리가 괴상했다. 괴담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 사회는 끊임없는 혼란과 갈등, 정쟁과 불의가 멈추지 않는다. 국격은 추락했고, 경제는 혼란했다. 물가고에 부동산폭락, 국내 경제 불안 요인들이 민생을 혼란케 하고,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전세 사기 피해자가 5명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태원에서는 젊디젊은 청년들이 길바닥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고, 노동절에는 양희동(미카엘) 형제가 분신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치며 강제진압하는 세상이 다시 돌아왔다. 검찰 독재의 시대는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정서적, 사회적, 심리적, 영성적인 폭력까지 얹어지기 시작했다. 주권을 포기한 정부와 여당 위원들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문제를 우격다짐, 바닷물을 퍼마시는 연극을 하며 ‘안전하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정도 되면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수백 번은 탄핵의 외침이 거리를 메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시민들은 이전과 다르게 시큰둥한 것인지 돌아본다. 들어본다. 생각해 본다.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탄핵은 해 보았지만 탄핵한 정부가 내세웠던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었고, 검찰개혁을 위해 헌신했던 조국 장관이, 추미애 장관이 승냥이들의 먹잇감이 되어 분별없는 민심에 내동댕이쳐졌다. 대장동 사건으로 이재명 대표는 족쇄에 묶였지만, 정작 50억 클럽의 당사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아내고 있다. 공정과 상식,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검찰독재 매국정권은 무소불위, 안하무인이었다.
그런데도 거대 야당 민주당은 무력하고 무기력했다. 이낙연의 등장으로 이제 당 대표 때려잡기에 나서려 진용을 정비하고 있다. 진정한 내부총질이 시작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마냥 온갖 정치 모리배들이 신당을 창당하며 떡 부스러기를 주워 먹을 태세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많은데 조직된 힘이 너무나 미약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니, 불안과 분노, 절망과 우울이 일상을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다.
87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는 불완전하고 불철저했다. 그때부터 사회변혁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진보정당들은 끊임없이 분열되고 시민의 힘을 정치의 힘으로 모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름도 거론하기 불편한 정의당의 청년 정치는 구리다 못해 역겹다. 청년이 아니라 정년(停年)을 해야 할 자세로 살아가는 청춘들을 바라보며 갑갑하다. 기본 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을 바라보며, 어찌 무수한 의원들 가운데, 저만한 사람이 하나 없을까 개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국민은 의회에 대한 불신과 대안의 부재로 선뜻 거리로 나가는 것을 무의미하게, 혹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로 생각하며, 뉴스도 보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것일까?
희망은 무엇인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끌었던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를 비롯한 원로들이 지난 삼일절 104주년을 맞아 ‘검찰독재와 민생파탄·전쟁위기를 막기 위한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비상시국회의는 국민주권, 언론주권, 경제주권, 노동주권, 민생주권, 민족·평화주권, 생명주권 등 7가지 주권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범민주세력의 구호들을 모아낸 것이다. 또 전국 규모의 비상시국회의 상설연대체를 결성할 것이라는 방향도 뚜렷하게 밝혔다. 이제는 결집해야 한다. 깃발을 세우고 한마음으로 모여야 한다. 비상시국회의 범민주세력의 연대를 위한 그릇을 만들어내야 한다. 난립하는 유튜버들도 모두 모여 진보플랫폼을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조직하고 새롭게 담아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의 결집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디지털 시민의회’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들의 요구와 바람을 모아내는 표현의 자유와 댓글의 자유가 보장된 쌍방향, 평등한 디지털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창조해야 한다. 2023년 7월의 변방은 어디인가?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거대 언론의 힘과 검찰의 막무가내식 폭압을 견디어낼 수 있는 탄탄한 기술적 집약과 진보를 이루어내야 한다. 디지털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조직화가 가능하고, 순식간에 오프라인에서의 결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양한 의견과 소통이 가능한 장치를 만들어 제안해야 한다. 공동지성이 최대한 효과적인 결집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기획을 해야 한다.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며 시민들의 분노와 우울을 담아낼 그릇을 만들어내야 한다.
‘시민의회 300’을 상상한다. 메타버스 의회, 국회와 꼭 닮은 꼴의 ‘변방’ 의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온라인 무림의 고수들을 모아내 전문가 의회를 만들어, 시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정책, 대안과 희망을 논의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을 만들어야 한다. 기존 정당들의 대의(代議)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 대의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직접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기존의 SNS(페이스북, 유튜브,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등)의 네트워크 조직망이 이제 자본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다. 온라인 네트워크 관계를 통해 주변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보다 유연하게, 자본에 길든 네트워크 방식을 뛰어넘는 관계의 새로운 방식은 새로운 관점을 결정할 것이다. 여기에 ‘조국의 방패, 추미애의 창’(강미숙의 궁리, 7월 5일)으로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검찰에 희생된 줄 알았던, 하지만 살아 싸울 장수들을 불러모아 불의한 검찰에 대응하는 전사들을 모아내야 한다. 상상이 일상이 되어 역사가 되는 그런 시간을 꿈꾸어 본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칼럼은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신부 : 인천교구 송림동성당 주임신부, 인하대학교 인문융합치료 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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