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난 뒤의 화창함이요 계절은 봄의 절정인 즈음이니, 토요화가회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내 달리며 푸르른 산천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은 은근하게 들떠 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의 행장은 제법 거창하였다. 캔버스는 지난주에 이어 대문짝만한 변형 사이즈였고, 백팩가방에는 ‘JBL블루투스 스피커’에 ‘스타벅스 쉐어 뉴욕컬랙션 텀블러’와 파리바게트 런치샌드위치에 치즈빵과 캔 맥주 2개까지 담겨있어, 과연 봄 소풍 왔다고 할 만하였다.
안성 소현리. 내 기억으로는 오늘이 4번 째 오는 곳인데, 그 중 3번이 오늘 들고 온 똑같은 작품의 바로 이 캔버스다. 2013년 4월28일 왔을 때는 마구 흥분하기만하여 붓이 미친년 춤추듯 듬성듬성하였고, 2018년 그러니까 작년 4월28일 날 왔을 때는 미진한 구석을 보완시키려 고심만 하다갔고, 오늘(4월27일) 다시 똑 같은 그 자리에 와 서서 새삼스레 모티프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고목임에도 불구하고 붙어있었던 나무 밑동의 간격이 벌어져있는 등 그 세월의 흔적이 만만치 않은 거였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작년보다는 덜했지만 꽃은 반쯤 져있는 상태였다. 아무려면 어쩌랴! 오늘은 꽃보다는 뭔가 2% 부족한 그 섭섭한 마음을 채우려고 온 것이니 상관할 바 아니었다.
마을에서 저만치 떨어진 ‘홀로 과수원’인지라, 자연스레 옹기종기 모여서 그림 그리고 있는 화우들과는 격리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조건이었다. 이젤을 펴 그림을 걸고, 음악을 틀고 갖고 온 자리를 펴고 앉아 캔버스 그림과 모티프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침 겸 점심으로 치즈 빵과 샌드위치를 씹어가며 맥주 한 캔을 들이켰다. 어디선가 푸드득 소리와 함께 꿩3마리가 날아와 배 밭 옆에 앉았다. 느긋하고 한가한 전원풍경이 마냥 아련하기만 하다. 이 과수원이 마치 내 별장인성 싶었다. 문득 거지는 문서로 된 땅은 없어도 산천이 모두 자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멀리 토요화가회 화우들이 점심 먹으러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오늘 만큼은 봄의 정취에 취해버린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어 이렇게 점심을 따로 준비해왔으니 마냥 느긋할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관념으로만 그렸던 풀밭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비온 뒤 촉촉이 젖은 황토밭으로 바꿔주었다. 엉성하게 빛바랜 과수원 길도 덧칠해주고 하늘도 맑게 갠 포근한 하늘색으로 바꿔주었다. 문제는 원경의 산색인데, 난 언제나 이 대목에서 불만이 많은 편으로 오늘도 매 마찬가지였다. 보이는 산색은 아직 알록달록 화려한데 난 또 관념의 원경 색으로 원근 공식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과감하게 그림을 계속 수정해 나가겠다는 뱃장과 창의력은 언제 올 것인가.
3시 조금 지나 이젤을 일찌감치 접었다. 남는 시간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을 호강시켜주었다. 아! 다음에 오면 저것을 마음껏 시선 확장시켜 그려 봐야겠다는 포부가 꿈틀거렸다. 새로운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난 벌써 내년 <소현리의 봄>을 꿈꾸고 있었다.
2019.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