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2월초 우리는 불광동 혜진이네집으로 부엌도 없는 단칸방 한개에 50만원 전세로 들어갔다.
아내는 임신상태였는데 하 도입덧이 심해서 아무 것도 먹지못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애 만태웠다.
그런데 입덧 이끝나자 펄펄 날뛰어 다녔다.
이때 다섯 살이던 혜진이와 세살이던 연진이.그리고 막내 상태 셋을두고있었다.
아내가 줄넘기를 하는 것을보고
혜진이 엄마는걱정어린 눈빛으로"이봐.새댁.뛰지 말어.그러다가 애 나올라"하고 만류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는 40여년간 친언니.동생보다도 더 우애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내가동아건설 사우디에 갔다가 휴가차 귀국했을 때 혜진네는 불광동 버스 종점부근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곧 나를 집으로 초대해서 한우불고기를 맛있게 해주어서 두고두고 잊지못했다.
또,집사람이 전원피아노를 운영하던 때 인 1982년8월말 매미인가하는큰태풍으로 성내동 우리집 일대가 침수되었을 때
혜진이 아빠가 우리집에 와서"이거.큰일났다.융이네가 우리집으로 외야하는데 어떻게 되었지?"하고걱정해주었다.
그리고,하남 에코타운으로 이사왔을 때4년여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암사동 롯데캐슬로 이사왔을 때길어서 우연히 아내와 만났다.
이렇게,우리는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그러던중 2016년 가을 용인에 있는 딸집(연진이)가까운 데로 가겠다고 해서 아쉬웠지만,
굽은다리역 3번출구 부근식당에서 그들부부와 우리부부 넷이서 갈치조림을 먹을 때였다.
혜진이 엄마는 연신 내손을 만지작거 리며"융이 아빠는 어쩌면 이렇게 미남이야. 너무 잘생겼어"하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옆에 있던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언니는 내가 잘 해주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옛날이야기만해.
너무 속상해.인생이 너무 허무해"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데,어제(24일)12시경 혜진이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융이 아빠!늦게 소식전합니다.혜진 이엄마가 오늘 아 침소천했어요"
그래서,오늘 오후 다섯시경 용인의 보정장례식장으로갔다.
떠나 가신 혜진엄마의 영정을 볼 때 생전의 그 모습처럼 천사와 같았다.
우리 는오랜만에 혜진이의 두이모.막내 아들상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삶에 대해 회고했다.
이모네들은 한결같이 융이 엄마가 자기의 언니에게 그간 잘 해준 것에 대해 감사했고.
우리도 혜진 엄마의 따뜻한 마음씨에 대해 감사드렸다
.돌아오는 길이 아쉬웠지만 이것으 로40여년의인연이 끝나고있 었다.
혜진엄마 이은순 집사 천국에서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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