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탄 공군1호기가 도고 호텔을 이륙한 것은 오후1시50분쯤 이었다. 박정희는 기장에게 아산만 상공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현충사 상공을 한번 돌게 하였다.
그는 현충사 근방에서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 들러 충무공(이순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박정희가 이순신에 대하여 동병상련을 느꼈던 대목은 당대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역사의 짐을 고독하게 지고가야 했던 사람들의 허전함 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서울상공에 와서도 한 바퀴 돌도록 했다.
박정희는 가끔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면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한반도란 화폭에다가 가장 큰 밑그림을 그린 인물로 기록될 박정희는 6·25동란의 폐허 위에서 불사조처럼 솟아나 그의 시대에 세계적 대도시가 된 콘크리트의 정글을 대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들을 가리키면서 "다리가 참 많군."이라고 새삼 감탄하기도 했다.
1979년10월26일 오후 2시30분쯤, 대통령이 탄 헬기는 청와대에 내렸다. 수석비서관들을 태운 2호기가 먼저 도착하여 착륙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내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본관1층 대통령 집무실까지 수행한 김계원비서실장, 차지철경호실장, 천병득수행과장에게 대통령은 "수고했으니 쉬어."라고 했다.
화창한 가을날에 농촌 지역을 한 바퀴 돌고 와서 그는 기분전환이 된 것 같았다.
열흘 전에 터졌던 부마사태와 아직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 뒤 신민당 사태도 잠시 잊을 수있었다. 도시에서 짜증난 것을 농촌에서 상당히 푼 셈이었다. 오전에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날의 오후에는 청와대에 머무는 것이 대통령의 습관이었다.
차지철 실장도 대통령의 이런 습관을 익히 알고있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부하들에게 "수고했어,쉬어."라고 했다.
오후4시쯤, 이재전경호실차장은 실장실에서 차지철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인터폰이 울렸다. 짧은 대화끝에 전화기를 놓은 차 실장은 부관에게 "정보부장을 대라."고 했다.
김재규부장에게 짤막한 통보를 한 뒤에 그는 천병득과장과 경호원들을 불러 경호준비를 시켰다.
차 실장은 "오늘은 좀 쉬시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62세의 건강한 홀아비 박정희는 이날의 농촌나들이로 고양된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청와대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하면 절간처럼 적막해지는 본관.
오후6시에 그가 2층 내실로 물러나면 거기에는 너무 넓은 침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방울이'란 이름을 가진 스피츠와 가려움을 긁어줄 효자손. 그는 청와대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후 3시를 조금 지나서 박정희는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이광형 부관이 보니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춤을 추듯 몸을 흔들흔들했다.
벌떡 일어선 이광형 이혜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으면서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계속해'라는 시늉을 했다.
오후5시를 조금 넘어 대통령은 임방현대변인에게 인터폰을 걸었다.
"연두기자 회견은 어떻게 되어가나." "이미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참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대통령은 계속 기분이 좋아 있었다.
10월26일 오후4시10분쯤 남산 정보부장실에 있던 김재규는 차지철 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녁 6시에 각하를 모시고 대행사가 있습니다.".
대행사라고하면 대통령 이외에 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 장까지 포함되는 만찬이다.
4시10분경 궁정동 정보부 시설의 본관에 있는 부장 의전 비서 윤병서 사무실에 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와 있었다.
이리로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박선 호가 받으니 정인형은 '대행사가 있다'고 했다. '심부름을 할 여자 두 명 을 준비해달라'는 당부도 함께 했다. 정 처장은 박선호와는 해병대 제 16기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형제처럼 친했다.
박 과장이 이날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 만찬의 시중을 들 두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는 가수 심수봉과 하루 전에 만나서 보아 둔 영화배우 지망생 신재순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양은 오후5시20분까지 플라자 호텔 커피 숍에서, 심수봉양은 오후5시30분에 뉴내자 호텔커피 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박선호로부터 행사준비지시를 받은 식당 책임자 남효주사무관은 주방장 김일선과 이정오를 불러 지시를 전달했다.
식당 전용차 코티나 운전사 김용남에게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원당읍 양조장으로 가서 막걸리 석되를 사오라고 시켰다. 대통령은 요사이 들어서는 양주를 주로 많이 마셨지만 언제 막걸리를 시킬지 몰라 준비를 시킨 것이다.
김재규는 남산의 부장실을 출발하여 오후4시20분쯤에 궁정동에 도착했다.
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인 육사18기출신의 현역대령 박흥주가 부장승용차의 앞자리에 타고서 수행했다. 부장 차가 궁정동 본관에 당도하니 박선호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내리는 부장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보고를 했다.
박 대령은 '아, 오늘 행사가 있구나'하고 직감했다.
박 대령은 부장의 서류 가방을 들고 윤병서 비서와 함께 2층 부장 집무실로 따라올라갔다. 박흥주 대령은 오후 3시경에 부장이 이발을 할 수 있도록 이발사를 불러두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김재규는 "오늘 각하께서 일찍 오시면 곤란하니 내일 이발을 하도록 하지"라고 했다.
박 대령은 이발사를 돌려보냈다.
오후4시40분경 김재규는 1층 윤병서의전 비서의 방에 있던박 대령을 인터폰으로 찾았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대"라고 지시하는 말을 곁에서 들은 윤 비서가 재빨리 일반전화로 정승화총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윤 비서는 다시 인터폰으로 부장에게 "육군총장님 전화 나왔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이날 정 총장은 육군본부 집무실에 있었다.
오전에 라디오를 통해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실황중계를 듣고나서 저녁으로 잡혀 있었던 전2군사령관 김종수중장 송별연을 취소한 뒤에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중장은 2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수산청장으로 간 지 며칠 되지 않았었다. 정 총장은 삽교천 준공식 중계를 듣고 비로소 대통령 이 지방에 내려갔음을 알았다.
대통령의 일정을 알려주지 않은 경호실장이 마뜩찮게 생각되었다.
정 총장은 '대통령도 안계신데 송별파티를 열기도 뭣하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행사를 연기시킨 것이었다.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이 방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