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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및 관련 단어 소개 24≫ ◆ 덕, 죄 ◆
◆덕◆
넓은 의미로 완전히 계발된 인간 능력, 또는 인간에게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들이 완전 개화(開花)한 상태를 말하나 좁은 의미로는 윤리선(倫理善)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덕은 그 기원과 성격, 목적과 획득 양식에 따라 편의상 자연덕과 초자연덕으로 구분된다. 자연덕은 인간이 일반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선행의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즉 반복되는 행습(行習)으로 얻어지는 하나의 숙달이며 일정한 선행을 기꺼이 또 쉽게 하게 만든다. 그 예로 오랫동안의 행습으로 판단력을 키우면 상황에 따라 쉽게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자연덕은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초월자이신 하느님께서 무상(無償)으로 베푸시는 덕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이 타고난 자질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바라고 초자연적 행위를 할 능력을 얻는다. 이는 하느님이 성세성사 때 주입해 주시는 것이기에 주부덕(注賦德)이라고도 한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습득하는 수득덕(修得德)이 아닌 만큼 친숙하게 기꺼이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적성과 가능성을 조성해 준다.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데는 은총의 도움을 입어야 할 뿐 아니라 인간편에서도 받은 은혜에 자신이 응답함으로써 현실화의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 이 때 수득덕이 주부덕의 작용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순수 자연이나 순수 초자연은 실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와 같은 이론적 구별이 필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초자연덕에는 대신덕(對神德)과 윤리덕(倫理德)의 일부가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원죄◆
죄에 대한 이해의 하나로서 원조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은총의 결핍상태. 이는 3세기에 유아세례 문제를 계기로 이론적인 발전을 하였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얼룩’이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펠라지우스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악한 표양의 문제로 보았다. 즉 한 두 차례 어떤 범죄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행위를 상상조차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을 근본적 범죄자로 보고 그 안에 모든 후손들을 결합시켜 주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아담이 범죄했을 때 자기 후손들을 존재의 근원에 있어서 오염시켰다고 하였다.
원죄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 2장과 제 3장 및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5장이며, 트리엔트 공의회가 원죄에 관하여 규정한 교리가 전통적인 교리로 남아 있다. 즉 원죄의 본질은 아담의 불순명으로 인한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그 결과는 욕망과 고통과 죽음이요, 그 결핍의 상태가 번식에 의하여 후손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인류를 하나의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고전적인 해석에 기초를 둔 이러한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우리 시대에 의미가 있으면서 전통에도 맞는 표현으로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신학자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 헬비히, 레켄즈 등은 성서 기자의 관점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사의 연대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조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로 쓰여진 고전적 이야기 형식이라 한다. 아담 즉 남자와, 하와 즉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는 전인적(全人的)이고 완전하고 통일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로 한 가지 죄가 다른 죄를 유발하고 한 세대의 죄가 다음 세대의 죄로 이전되어 온 인류가 죄악의 상태 속에 뒤얽히게 된다. 이처럼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혼란상태 즉 ‘세상의 죄’가 바로 원죄에 대한 근본적 성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저항의 벽을 구축하는 것이 된다.
쇼넨베르크(Piet Schoonenberg)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러한 상태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이 말도 못하고 자아의식이 분명치 못한 채 태어나서, 성장하여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선택이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조건지어지고 방향지어졌으므로, 인간이 태어난 상황이란 그 사람 자신의 일부분이며 유전에 못지 않는 큰 부분이다. 갓난 유아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죄의 상태 때문에 그 유아의 인생 출발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고 난관에 처하게 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식에 의하여 그런 상황을 전수받았으나 한편 생식행위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공동으로, 각자는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한다. 인간은 앞서간 사람들의 선행 때문에 덕을 보는 동시에 그들의 악덕이나 실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 다원조론(多元祖論)과도 조화될 수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인류>(Humani generis, 1950)에서, 또 바오로 6세는 1966년 7월 로마에서 열린 원죄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다원조론이 원죄교리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 죄
◆지옥◆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못 견디게 고통스럽거나 더 없이 참담한 형편이나 환경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극락’(極樂)의 반대말로서, 현세에서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죽어서 가는 곳인데, 염마대왕(閻魔大王)이 다스리며 죄인에게 갖은 고통을 준다는 ‘naraka’(奈落)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죄를 지은 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신에게 떠나 악마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는 곳이며, ‘천당’, ‘천국’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학상으로 ‘지옥’은 악마건 인간이건 저주받은 자가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을 받는 곳이다. 즉 타락한 천사와, 의식적으로 신의 사랑으로부터 떠난 상태로 죽은 인간이 영원한 벌을 받는 장소와 상태를 지칭한다.
지옥에는 두 가지의 벌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의 지복직관(至福直觀)을 잃어버린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외계의 물질로부터 가해지는 감각적인 고통이다. 지옥의 벌은 영원한 것이다. 이는 최후의 날을 예고한 그리스도에 의한 선언(마태 25:26), 악인은 “악마와 더불어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의 정의(Denz. S 801)에서 명백하다. 지옥의 존재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일치하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에 저항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지옥의 벌을 선고하고 있음이다. 선인(善人)이 그 덕행에 대한 보수로서 천국에서 복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벌은, 덕에 대한 보상(報償)과 대응되는 것이므로, 내세에 있어서도 죄에 대한 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악인이 죽은 뒤에 벌을 받는다는 관념은 각 민족 사이에 있어 왔으며, 이러한 인류공통의 신념은 지옥의 존재에 대한 부수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성서는 지옥의 벌의 영원성을 뚜렷이 설명하고 있다(묵시 14:11, 19:3, 20:20, 마태 25:46).
대죄(大罪)를 의식적으로 범한 자가 가는 곳이 지옥임에 비하여, 대죄를 모르고 범했거나 또는 소죄(小罪)를 범한 의인의 영혼이, 그 죄를 정화하기 위해 가는 곳은 연옥(煉獄, purgatory)이다. 그런데 ‘정화를 위한 벌’이 연옥에서 가해지는 고통인데 반하여, ‘지옥의 불’(Fire of Hell)은 지옥에 떨어진 자를 괴롭히는 외적인 고통이며, 이는 대상을 다 태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즉 물질적인 불이라면 영혼의 순수한 영적인 실체(實體)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교리의 영역에서 볼 때, 지옥의 존재는 용인하면서도, 그 벌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왔다. 그노시스(gnosis)파의 발렌티노(Valentinus)파는, 악인의 영혼이 일정한 벌을 받은 뒤 모조리 없어진다는 설을 신봉하고 있었고, 후기에 와서는 아르노비오(Arnobius)와 소치노(Socinus, 1539∼1604)파도 그러하였다. 또한 오리제네스(Origenes)파를 비롯하여 아우구스티노(A. Augustinus)가 지적한 ‘자비자’(慈悲者)(Misericordes, 神國論)의 주장은, 악마를 포함한 모든 저주받은 자, 적어도 인간의 영혼의 전부가 결국 행복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가톨릭의 입장에서도 히르셰르(J.B. von Hirscher, 1788∼1865), 셸(Herman Schell, 1850∼1906)은 대죄를 범하고 죽은 자는 그들이 지나치게 사악하지 않고 너무 고집 세지 않는 한, 개심(改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완덕◆
신자생활에 적용되는 완덕의 개념은 성서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권고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완전’의 용어를 고대에 바바리안들은 용기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은 완전을 인간속에 있는 신성(神性)의 자각으로 보는 신지학(神知學, theosophy)에서도 보여진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완덕을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용기로 보거나, 완덕의 본질이 참회와 고행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완덕에 이르는 인간의 노력을 부인하고 완전한 수동성에 완덕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애덕(愛德)을 완덕의 형식적인 요소로 주장한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안에 계신다"(1요한 4:16)는 성서에 근거한다. 성 바울로도 애덕이 완덕의 끈(골로 3:14)임을 확신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완덕을 두 차원에서 설명함으로써 완덕의 개념을 확실히 하였다. 즉, 첫 번째 완덕은, 전체에서 기인하여 모든 부분들로 완성되는 전체 형식으로서의 완덕이다. 세례를 통하여 회복된 성화은총(聖火恩寵)을 가졌을 때 신자로서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완덕은 작용으로 성취되는 것, 즉 목적으로서의 완덕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덕과 성령의 열매들을 필요로 한다. 애덕은 이 완덕의 근원이 된다. 신자생활의 완덕은 근본적으로 애덕,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인 애덕은 모든 성화수단을 지배하고 목적을 달성케 한다. 애덕은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친교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애덕은 단순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뜻한다. 현세에서 신자는 모든 활동을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행한다.
완덕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노력 정도에 따라 도달하는 단계에 차이가 난다. 즉, 인간이 완덕에 이르는 첫째 단계는 초보자로, 애덕을 직접적으로 거스리는 모든 것 즉, 대죄(大罪)를 피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진보자로, 완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인간애착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완덕자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단계이다. 완덕은 하느님과 합일하는 것으로 마쳐지지만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완덕은 상대적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한계란 없다.
완덕은 신자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목표로서 명령되어진 것이며, 신자생활을 위한 모든 지침에 기본적으로 존재한다. 즉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 않게 하는 계명의 준수로 가장 낮은 단계의 완덕에 나아간다. 그러나 두 번째는, 사랑의 실제적 실행에 근본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권고를 지킴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그리스도가 완덕의 길을 제시한 복음삼덕(福音三德) 즉 청빈 · 정결 · 순명의 권고이다.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덕의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없지만 권고는 명령과는 달리 자유롭다. 수도자들은 자유롭게 이 권고를 받아들여 이를 다 이루기 위해 서원(誓願)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이 어떤 생활조건이나 신분에 있든지 성부(聖父)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자기 신분에 고유한 완덕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교회헌장 11,42).
◆사추덕◆
≪한불자전≫에 나오는 말로 윤리신학에서 말하는 4가지 중요한 덕.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덕을 그 근원(根源)에 따라 구별하여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룩할 수 있는 자연덕과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주어지는 초자연덕으로 나누었다. 4추덕은 자연덕에 속하는 것으로 지덕(智德, prudence), 의덕(義德, justice), 용덕(勇德, force), 절덕(節德, temperance)을 가리킨다. 이 4가지 덕은 다른 덕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될 일반적인 조건이며, 다른 모든 덕을 포괄하는 상위적 개념으로서 유적(類的) 범주의 덕이며, 또한 그것 자체가 본래덕인 것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사목서간◆
1. 개관 :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 등 세 서간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직분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시를 하면서 교회의 제도와 조직 그리고 이단 단죄 등 사목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서간의 문체, 어법, 내용, 신학사상도 서로 비슷하고 공통점이 많다. 이렇게 세 서간은 두드러지게 단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사목서간'이라 불려왔다. 이들 사목서간에는 초대 교회의 제도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함께, 초창기의 교회론적 가르침과 그리스도론적 가르침에 관한 전승도 수록되어 있다(1티모 3:16, 6:15-16, 2티모 1:8-10, 2:8-13, 티토 3:4-7).
2. 필자 문제와 집필 연대 : 사목서간은 서기 180년경 작성된 무라토리 경전목록에 바울로의 서간으로 배열된 이래 바울로의 친서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사목서간의 문체, 내용, 신학적 용어 등이 바울로의 친서들과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인 바울로 친저설을 부정하는 가명작품설이 제기되었다.
① 사목서간에 전제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이 바울로의 친서들과 사도행전에 묘사된 그의 생애 및 전도활동과 부합하지 않는다.
② 용어와 문체도 바울로의 친서와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바울로 특유의 개념들이 사목서간에서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의화'라는 개념이 바울로의 친서에서는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상태를 뜻하는데, 사목서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닦아야 할 덕을 의미한다(1디모 6:11, 2디모 2:22, 3:16). 그런가 하면 바울로의 친서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은 '경건함' 또는 '건전한 가르침'이란 말이 사목서간에서는 중요한 용어로서 자주 쓰이고 있다. 사목서간의 문체도 바울로의 친서 같은 박력이나 다양성이 없고, 대체로 평면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③ 사목서간의 신학사상은 바울로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사목서간의 필자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목자로서 전통을 중시한다. 그 전통의 내용은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으로써, 필자는 이를 '건전한 가르침'(1디모 1:10)이라 하며 충실히 지키려 하였다(1디모 6:20, 2디모 1:12-14). 한편 바울로와의 뚜렷한 차이점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바울로는 예수의 재림을 뜻하는 낱말로 '파루시아'(내림)란 말을 썼지만, 사목서간의 필자는 '에피파니아'(현현, 현시)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예수의 재림뿐 아니라 예수의 육화(강생)도 가리킨다(2디모 1:10, 참조 디도 2:11, 3:4). 둘째로, 바울로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구원사건으로 보았는데, 사목서간의 필자는 예수의 지상생활 전체를 구원사건으로 보고 있다. 셋째로, 바울로의 '의'란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상태로 보았으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경건성'과 비슷하게 도덕적 성실성으로 보고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넷째로, 바울로는 결단이 요구되는 신앙행위를 강조했으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신앙의 내용, 곧 전해 받은 가르침(말씀)에 역점을 두고 있다. 다섯째로 바울로는 세말이 곧 다가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세말을 먼 미래의 일로 보고 교회 공동체와 현세의 질서를 중시하였다.
④ 사목서간이 쓰여진 무렵에는 확실히 이단자들이 공공연하게 준동하며 일반 신도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이 이단자들은 유태교와 그노시스(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단의 유태교적 요소는 족보 시비, 또는 ‘꾸민 이야기’와 율법에 관한 토론 등에서 엿볼 수 있고 (1디모 1:3-4, 디도1:10-14, 3:9), 그노시스주의적 요소는 그릇된 금욕주의, 예컨대 결혼을 금하고(1디모 4:3) 자기들은 이미 영적으로 부활하였다고 믿은 데서 엿볼 수 있다(2디모 2:18). 사목서간의 필자는 이단의 오류를 바울로처럼 일일이 논박하지 않고, 오직 그것이 건전한 가르침과 어긋나니 철저히 배격할 것을 역설한다(1디모 6:3, 2디모 2:14).
⑤ 사목서간에서 살필 수 있는 교회상은 바울로의 친서들이 보여주는 교회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 사목서간에는 이미 교계제도가 상당히 기틀이 잡혔고, 감독자 장로봉사자 등 성직자들은 특별한 자격과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바울로시대에는 성령의 작용인 은사가 다양했지만, 사목서간이 씌어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만 남고(1디모 1:18, 4:14), 그 밖의 은사들은 교계제도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상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사목서간은 바울로의 친서가 아니라, 후대에 바울로를 존경하며 그의 사상에 심취한 성명미상의 어떤 사람이 집필한 가명작품으로 추론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집필연대는 대체로 서기 100년경으로 추정하면 무난할 듯하다. 왜냐하면, 사목서간에서는 감독자와 장로가 구별되지 않고 있지만, 서기 117년경 안티오키아 주교 이냐시오가 막네시아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3:2, 6:1) 감독자를 교회 최고 지도자로 지칭하고 장로들이나 봉사자들과는 명확히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내용 : ①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는 이단의 사설을 배격하고, 전해 받은 ‘건전한 가르침’에 따라 정통신앙을 지킬 것을 권고하고(1:3-10·18-20, 4:1-11) 참된 예배를 강조한다(2장). 또한 성직자의 자격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한다(3:1-13, 5:17-25). 그리고 교직자 자신이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4:12-16) 신도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어느 계층이건 두루 보살피는 한편 교회의 규율 확립에 진력할 것을 촉구한다(5-6장).
②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전서에 비해, 형식상의 수신인인 디모테오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가 많지만, 그 목적은 전서와 같다.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떳떳이 신앙을 고백하고(1:6-14), 이단자들에 맞서 건전한 가르침을 지킬 것을 권고한 다음(2-3장), 바울로의‘유언’형식으로 교직자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명령한다(4장).
③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 둘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의 자격과 자질을 강조하고(1:5-9), 이단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물리칠 것을 촉구한다(1:10-16, 3:9-11). 그리고 각 신분에 따르는 처신의 규범을 밝히고(2장), 성직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특히 신도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선행을 하게 하라고 당부한다(3장).
4. 가명작품에 대하여 : 가명작품(위서)은 구약 말기부터 서기 1-2세기에 걸쳐 널리 이용되던 문학유형의 하나였으며, 그것을 현대의 관점에서 한갓 거짓말이나 위조작품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명작품의 저자들은 대개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빌어 자기작품을 썼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의 권위를 높일 뿐 아니라, 그 위인의 사람됨과 사상을 되새겨 그가 만약 자기 시대에 살고 있다면 이러저러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것을 작품화했던 것이다. 사목서간의 필자도 같은 생각에서, 지난날 사도로서 명성을 떨친 바울로가 그의 제자이며 협조자였던 디모테오(사도 16:1-3, 필립 2:19-22)와 디도(갈라 2:3, 2고린 2:13, 7:6·13, 8:6·16·23, 12:18)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서간을 썼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문학유형을 택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울로 사도의 신학사상을 자기시대, 자기 환경에 적용하여 당면한 난제들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가명작품이라고 해서 성서의 무류성을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도 "성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저자의 시대에 널리 통용되고 당시 사람들의 공동생활에서 관습화되었던, 감정과 말과 이야기의 표현양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金允桂)
◆향주삼덕◆
하느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덕행, 즉 신덕(信德, 믿음의 덕), 망덕(望德, 희망의 덕), 애덕(愛德, 사랑의 덕)을 말한다. (⇒) 향주덕, 신덕, 망덕, 애덕
출처 : [가톨릭대사전]
◆통회◆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 슬퍼함과 동시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덕(德)의 행위. 죄를 뉘우치는 행위란 죄를 싫어하고 미워했다면 범하지 않았을 과거의 죄를 대상으로 하여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슬퍼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 이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동반한다.
이 통회가 유효하기 위한 4개의 조건이 있다. ① 일시적 기분이나 감정으로 통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통회의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 ②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도록 해야 한다. ③ 지금까지 지은 모든 대죄(大罪)를 슬퍼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사해지도록 해야한다. ④ 주체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가 최대의 악임을 인식하고 여기에 합당한 보속을 한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회에는 완전통회(完全痛悔 혹은 상등통회), 불완전통회(不完全痛悔 혹은 하등통회)가 있다. 마지막으로 통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따라서 통회 이후는 하느님이 정해준 법에 따라 생활하며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망덕◆
대신덕(對神德)의 하나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 이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로마 5:5) 비로소 우리가 가지는 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망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망덕으로 우리는 역경을 이겨내고 절망을 극복하며, 인간적인 약점으로 인하여 사죄(死罪)에 빠졌을 때에도 회개할 용기를 얻고 구원을 희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어긋나는 행위는 실망하거나 자신을 과신하는 것이다. (⇒) 희망
◆분노◆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七罪宗)의 하나로 몹시 화를 내어 이성을 잃는 상태를 말한다. 절덕(節德)[절제의 덕]의 부족이나 결여로 발생한 분노는 투쟁, 복수, 폭행 등을 유발하여 정의와 사랑을 침해하기 때문에 대죄(大罪)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분노를 자제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분노가 반드시 불의이고 악이며, 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분노는 자신의 가치가 상대방에게 침해당했을 경우 이를 회복하려 할 때, 혹은 오류나 악이 고의로 범하여지는 경우 이에 대항하는 양심의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분노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니고 의로움을 지향하는 한 정당하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지만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과 환전상들에게는 의로운 분노로 의로운 정화시켰던 것이다(요한 2:12-22). 이러한 분노는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건전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분에 해당했을 때 정의를 회복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신덕◆
믿음을 가진 덕이란 의미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신덕은 크게 두 가지로 불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거져 주신 은혜이며 능력으로서 인간은 이 은혜로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신봉(信奉)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때에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啓示)하여 주신 진리를 받아들여 믿고 그를 생활의 규범으로 가지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신앙을 고백하고 선포하며 보호하고 더 깊이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는 태도를 종합해서 말한다. 따라서 신덕에 위배되는 행위에는 배교, 불신, 이교, 열교 등이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덕행◆
덕(德)으로써 하는 행동 또는 착한 행위를 일반적으로 덕행이라고 말한다. 덕으로써 하는 행동이란 덕성(德性)스러운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며, 착한 행위란 어질고 착한 행실을 지칭한다. 덕(virtue)이란,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신앙에 비추어진 올바른 이성(理性)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습성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좋은 활동습성(operative good habit)이 바로 덕인 것이며, 이 덕을 가진 사람의 행위가 이른바 ‘덕행’을 이룩하게 하는 것이다. ‘덕’이 선천적(先天的)이냐 후천적(後天的)이냐 하는 점은 논의하기에 따라 서로 갈라지는 시각(視角)이 있음직도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바람직한 성격 일반과 마찬가지로, 후천적인 육성, 도야가 중요하다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중국의 경우, 군자(君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공자(孔子)의 학문이 나타난 이후부터 ‘덕’이란 인간적인 수양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도덕적인 능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덕과는 달리, 노장(老莊)사상에서는 근원적인 ‘도’(道)에 대한 것으로서, 이 ‘도’에 바탕하여 나타나는 역할, 능력, 자질 등을 덕이라고 불러 왔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덕행은, 그 기초의 확실성이나 투철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동기(動機)의 풍부함과 힘에 있어서도 비종교적인 덕행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도덕적 행위가 영원의 목표에 가치있는 것으로 볼 때, 그것은 은총(grace)에 의하여 차원이 높여지고 게다가 주관적으로도 신앙에 의하여 초자연적인 목표로 향해져 있어야 함은 물론이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순명◆
복음적 권고의 하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교황과 소속 직권자에게 존경과 순명을 표시할 의무가 있다.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죄◆
생각과 말과 행실이나 궐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잘못을 가리킨다.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모두 죄이다. 세 가지 조건, 곧 심각한 사안, 충분한 성찰, 충만한 의지의 동의가 있었으면 사죄(死罪)이다. 사안이 중대하지 않거나 충분한 성찰이나 충만한 의지의 동의가 없이 죄를 지었으면 경죄(輕罪)이다. 영혼은 경죄로 인해 성화 은총을 상실하지 않는다.
사죄는 우리에게서 성화 은총을 앗아 가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지 않으면 영혼에게 영원한 벌을 초래한다. 그러나 고백하러 갈 수 없는 상황일 경우, 완전한 상등 통회(최고의 선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거스른 데 대한 슬픔)만으로도 충분하다.
경죄를 지으면 일시적인 벌을 받는다. 경죄는 의지를 약화시켜 사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전례는 죄와 죄의 용서에 관심을 기울인다. 미사의 참회 예식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며 영성체를 하기 전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한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사순 시기 내내 우리 죄에 대해 참회한다. 고해성사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통상적인 수단이지만, 예수께서는 세례성사와 병자성사에서도 죄를 사해 주신다. 고해성사 예식(告解聖事 禮式 Penance, Rite of), 계명(誡命 Commandments), 병자성사(病者聖事 Anointing of the Sick), 성성(聖性 Holiness), 세례성사(洗禮聖事 Baptism), 은총(恩寵 Grace) 참조.
◆죄 사함◆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죄와 그로 인한 죄책감(탓)을 사하고 용서하는 것, 달리 말해 화해를 통해 의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다소 소극적 표현이다. 죄 사함은 죄책감을 삭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은총의 선물을 다시 부여하여 중죄(重罪)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것을 종식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은총을 다시 부어 주는 것은 소극적인 뜻에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는 죄인을 긍정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해 평화를 되찾지만 성사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회개와 용서를 단순히 확증하는 때도 있다. 가벼운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단절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경죄(輕罪)로 인해 감소된 강렬한 사랑을 증가시킨다. 고해성사 예식(告解聖事 禮式 Penance, Rite of) 참조.
출처 : [전례사전]
◆계명◆
전례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회개를 요구한다. 회개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수반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에 관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하느님의 계명들을 제시한다.
가장 위대한 계명
가장 위대한 계명은 다음과 같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비슷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 22,37-39; 마르 12,30-31).
하느님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셨다(신명 6,4-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웃 사랑의 이 계명을 당신의 계명으로 삼으시어 새로운 뜻으로 풍요롭게 하셨고 당신 자신과 형제들이 사랑의 동일한 대상이 되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인성을 받아들이신 주님께서는 온 인류를 초자연적 연대로 당신 가족이 되도록 모으시고 사랑을 당신 제자들의 표지로 삼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평신도교령」 8항). 사랑(Love) 참조.
십계명
십계명은 가장 위대한 계명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인간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과 경배)를 규정하고 나머지 일곱 계명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정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율법(특히 십계명)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 주신 기본적인 도덕 규범들을 반영할 뿐이기 때문이다(사도 바오로가 로마 2,14-6에서 지적하듯이). 보통 가톨릭교회에서 제시하는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간음하지 마라.
7. 도둑질을 하지 마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교회의 규정(또는 계명)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법을 제정할 권한을 주셨다.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고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8,18). 교회에 부여된 이 같은 권한에는 교회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어겼을 때 벌을 가할 권한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의 규정이란 말은 주로 가톨릭인들에게 십계명을 준수하게 하며 교리 교육과 양심 성찰에서 사용되는 법을 가리킨다. 규정의 목적은 적어도 공동체의 모든 신도들 사이에 최소한의 일치를 보장하려는 것이다.
15세기에는 십계명을 본떠 만든 열 가지 법이 있었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는 16세기에 자신의 교리서에 다섯 가지 규정을 열거했으나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여섯 가지 규정을 나열하였다. 아직도 국가에 따라 규정을 달리 보존하고 있다.
미국의 교리서는 제3차 볼티모어 주교회의(1886년)의 규정을 따라 여섯 가지 규정을 제시하였다. 1975년 아메리카 주교들은 「가톨릭 종교 교육에 관한 기본 가르침」을 발표하여 이 규정들을 개정하고 이를 일곱 가지로 제시하였다.
교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톨릭 신도들이 지켜야 할 어떤 특별한 의무들을 밝혀 왔다. 오늘날 가톨릭 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전통적으로 교회의 ‘규정’으로 언급되었던 것들은 별표로 표시하였음).
1. 주님의 부활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 미사에 참여하여 하느님께 경배드린다. 안식일에 영혼과 몸의 쇄신을 방해할 수 있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곧, 필요하지 않은 일과 사업 활동, 불필요한 구매 등)[교회법 1246-1248조 참조].
2. 성사 생활을 해야 한다. 자주 영성체를 하고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는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는다(심각한 죄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일 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또한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 시기 첫째 주일과 삼위일체 대축일 사이에 영성체를 해야 한다[교회법 989와 920조 참조].
3.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한다. 계속적인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에 관해 더 잘 알아야 한다[교회법 890과 229조 참조].
4. 교회의 혼인법을 지켜야 한다. 말과 모범으로 자녀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본당 사목구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교리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한다[교회법 1063-1072와 796조 참조].
5. 교회를 강화하고 지원해야 한다. 자신의 본당 사목구 공동체와 본당 사목구 사제들, 세계 교회와 교황을 도와야 한다[교회법 222조 참조].
6. 지정된 날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와 음식을 먹지 않는 단식재를 포함하여 참회해야 한다[교회법 1249-1251조 참조].
7. 교회의 선교 정신과 사도직에 참여해야 한다[교회법 781조 참조].
◆천국◆
전례는 천국의 주제로 충만하다. 사실 “우리는 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하며 나그네들인 우리가 걸어 나아가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천상 전례를 미리 맛본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와 참다운 성막의 사제로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주님께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성인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면서 그들의 친교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 나타나시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그분을 기다린다”(「전례 헌장」 8항).
하늘도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겠고(짝수해 연중 시기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열왕 8,27) 지상에 있는 인간은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적이 없지만(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 요한 3,13) 우리는 ‘천국에’ 계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 천국은 광대함과 현저한 거리, 광채와 맑음 자체인 하느님의 초월성의 상징이다(다해 부활 시기 제6주일 제2독서 - 묵시 21,10-14.22-23). 천국은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 더 뛰어난 영적 보화의 상징이기도 하다(가해 연중 시기 제6주일 제2독서 - 1고린 2,9).
천국은 보편 부활이 있은 뒤에 성인들이 거하는 곳이며 현재도 죽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짝수해 연중 시기 제33주간 수요일 제2독서 - 묵시 4,1 이하). 그러나 천국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는 하느님과 ‘친밀히 일치해 있는 상태’이고(가해 연중 시기 제32주일 제2독서 - 1데살 4,17) 하느님 직관과 다른 성인들과 통교에 의해 지금 사랑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 자유의 상태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살아 계시는 동안 천국의 증인이셨고 자주 천국에 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와 의인들을 위해 천국에 마련된 상급에 관해 말씀하셨다(가해 연중 시기 제4주일 복음 - 마태 5,12).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천국에 계신 당신 아버지에 관해 말씀하셨다(재의 수요일 복음 - 마태 6,1 이하).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상에 천국을 마련하셨다.
전례는 천국과 지상을 일치시키려는 예수님의 행적을 계속해 나간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서 오시는 분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에 새 형태를 부여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 발 아래 굴복시켜 영광스럽게 되신 당신 몸과 같이 되도록 해 주실 것이다(다해 사순 시기 제2주일 제2독서 - 필립 3,17- 4,1).
천국은 이 세상과 비슷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새 우주이다. 거기에는 죽음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다해 부활 시기 제5주일 제2독서 - 묵시 21,1-5). 우리는 “성자의 영광스런 승천을 기념하여 저희가 봉헌하는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이 거룩한 제사로써 저희 마음이 천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주님 승천 대축일 예물 기도).
미사 통상문에 나오는 신경에서 우리는 “내세의 삶[곧 천상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가득 찬 하느님의 영광을 경배하며(상뚜스) “거룩한 천사의 손으로 이 제물이 존엄한 천상 제단에 오르게 하시고”(감사 기도 제1양식)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하소서”(감사 기도 제4양식) 하고 기도한다.
우리는 천상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청한다. 또한 우리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주님의 기도)라고 기도한다. 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의 장엄 강복(8번)에서 “독생 성자께서 오늘 하늘 높이 오르심으로써 당신이 계신 곳에 우리도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전능하신 천주 성부는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청한다.
우리는 또한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천상의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고”(감사 기도 제2양식)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시며”(감사기도 제3양식)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를”(감사 기도 제1양식) 하느님께 청한다.
출처 : [전례사전]
◆구속◆
‘몸값을 치르고 구해내다’ ‘해방시키다’를 뜻하는 라틴어 redimere에서 유래하는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새롭게 한 것을 가리킨다. 구속은 인류의 해방과 화해, 죄의 용서 그리고 은총에 의한 의화(義化)를 수반한다. 성서에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용어는 이집트 탈출과 연관하여 처음 사용된다(출애 15,13).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유를 주듯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무상으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신약성서에서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당신 백성을 속량하신 것을 뜻한다(로마 3,24).
전례는 하느님의 속량을 온 백성에게 적용한다. 예수께서 모든 이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감사 기도의 성찬 제정문).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류를 당신의 파스카 신비에 합치시킨다. 파스카 신비는 모든 것을 신비로우면서도 실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구속은 세상에서 악(갈라 1,4)과 율법의 저주(1월 1일 제2독서 - 갈라 4,5), 하느님의 진노(홀수해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2독서 - 데살 1,10), 죄의 사슬(홀수해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6,16)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였다. 이 구속에는 우리 영혼뿐 아니라 몸도 포함된다(홀수해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2독서 - 로마 8,23).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 때 우리의 속량이 완성될 것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본기도 참조). 구원 역사(救援 歷史 History of Salvation), 레뎀또르 호미니스(Redemptor Hominis) 참조.
출처 : [전례사전]
◆통회 기도◆
죄에 대한 아픔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현하는 기도이다.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고백자는 사죄를 받기 전에 통회 기도를 바친다. 새 예식서는 열 가지 통회 기도문을 제시하며 다른 형식문도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전통적인 통회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통회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부분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칠죄종◆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peccatum proprium)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 즉 교오(驕傲,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간린(慳吝, 하는 짓이 소심하고 인색함), 미색(迷色, 성욕의 노예가 되어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함), 분노(忿怒 · 憤怒, 분에 겨워 몹시 화를 냄), 탐도(貪饕, 음식이나 재물을 탐하여 지나칠 정도로 먹고 마심), 질투(嫉妬, 우월한 사람을 시기함), 나태(懶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 등이 칠죄종이며, 이것들을 사람이 죄를 짓게 하는 원천으로 보며, 그래서 죄원(罪源)이라고도 한다. (⇒) 죄
출처 : [가톨릭대사전]
◆본죄◆
죄에 대한 이해의 하나로서, 원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자신이 의사와는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상태에 놓이게 된 처지를 원죄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인간 본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지은 죄를 본죄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속하신 결과 인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赦)함을 받으며 성세성사를 받은 이후 범한 본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용서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 죄, 원죄
출처 : [가톨릭대사전]
◆연옥◆
가톨릭에 있어서의 연옥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地獄, infernum)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말한다.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서 지은 자 또는 소죄(小罪)를 지은 의인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 ‘일시적인 정화’(satispassio)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가 ‘연옥’이다. 가톨릭의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예지,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 및 중세의 카타리파(Cathari), 발두스파(Waldenses) 등 이단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루터는 ≪연옥론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신앙을 부정하였다. 로마 교회가 연옥에 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내린 것은, 리용 및 피렌체의 합동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Urbanus)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였다.
연옥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의 경우 은총의 도움에 의해서 행하여진 애덕(愛德)에 따른 통회(痛悔)와 기도에 의하여 소죄가 정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옥에 있어서도 소죄가 정화된다. 하지만 죄에 대한 슬퍼함이 벌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거나 공덕을 쌓는 상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내세(來世)에서는 공덕을 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영혼은, 신이 내리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죄에 상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의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의 전구에 의해서 단축 또는 경감된다.
그 다음 연옥의 영혼은, 신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연옥의 영혼은 지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전구할 수가 있다. 그들은, 지상의 신자에게 연옥의 영혼의 전구를 기도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옥의 영혼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연옥의 영혼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지는 못하며, 또한 지상의 일에 관하여 지식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us, 1542∼1621), 수아레스(Francisco de Suarez, 1548∼1617), 구트베를레트(Konstantin Gutberlet, 1837∼1928), 셰벤(M.J. Scheeben, 1835∼1888), 바우츠(Bautz), 두르스트(B. Durst)등 신학자는, 연옥의 영혼이 그 형벌 상태 아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는 공덕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심판(公審判) 뒤에 연옥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하나의 영혼에 있어서는 그 벌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정화가 끝나면 영혼은 곧 천국으로 들어가 버린다.
◆연도◆
세상에서 죄의 벌을 못다 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화(淨化)하는 연옥(煉獄, purgatory)에서의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죄벌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때부터 사용해 온 ‘연도’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드리는 기도를 지칭한다.
본디 천주교에서는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한 영혼’(poor souls)이라고 호칭하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자기의 힘으로는 연옥에서 탈출할 수도, 또 괴로움을 완화시킬 수도 없으나, 지상 여정에 있는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에 의지하여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경우의 이 지상의 신자의 기도를 ‘연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옛말은 오늘날의 바뀐 말로는 ‘위령(慰靈)의 기도’라고 한다. 간혹 ‘鍊禱’라는 한자어를 쓰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며, 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은 ≪성교예규≫(聖敎禮規)라는 기도서에 따라 하는 것이다. 이 기도책에는 임종 때 어떻게 기도해 줄 것인가에서부터 장례 때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까지 다 수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