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성묫길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여보, 내년 추석 연휴에는 우리
대가족도 해외에 한 번 나가게요.”
추석날, 느닷없이 아내가 내게 한
말이다. 내년 추석은 개천절과 한글날에 끼어 올보다 더 황금연휴라면서 해외여행을 다그쳤다.
올 추석 연휴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한
한국 관광객이 97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주 H 여행사도 추석 연휴 기간에 가족 단위 해외여행이 작년에 비하면 23.3%가 늘었다고 했다.
아마 해외에 나가 추석 차례나 예배를 드리고 여행을 하는 일이 유행해서일 게다. 아내는 미리 성묘하고 가면 되지 않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아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때 가자고 했다.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풍양속으로 이어 온 명절 풍습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지금도 자손(子孫)들에게 추석 명절의 좋은 풍습을
전해주려는 마음은 간절하다.
추석 앞날 늦은 오후에 효자추모관으로
선친 성묘를 갔다. 온 가족이 얼른 갈 수 있어 좋았다. 어린 손녀 태이가 더 좋아했다. 유골함 앞에서 작년처럼 선친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해와 하신 일, 그리고 마을 사람이 칭찬한 세 가지 성품인 근면 절약 정직도 이야기했다. 추모관에 유해(遺骸)를 모시게 된 과정을 손자 손녀들의
눈높이로 설명해주니, 노루처럼 쫑긋하게 귀를 세우고 듣고
있어서 어찌나 흐뭇했던지…. 내가 대표로 추모 기도를 했다.
고향 성묘는 대구 작은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도 사촌 동생 가족이랑 하고 있다. 대구서 오는 시간을 맞추느라 추석날 한낮 햇살을 받으며 남원시 주천면 지리산 입구
육모정(六茅亭)으로 갔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계곡이 온통 큰 바위인데 그 큰 몸뚱이를 땅속에 감추고 속살을 조금만 드러내어 위로 많은 양의 맑은 물을 요리조리 흘러내리게 하는 게
장관이었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붐볐다. 손자 손녀들은 놀다 미끄러져 멱을 감은 것 같았다. 돗자리를 깔고 간식을 먹었으나 배를 채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손자 이현이는 간식을 먹는데 자기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울었다. 할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해 미안했다.
서둘러
정령치(鄭嶺峙) 쪽으로 굽이굽이 올라가니 내기마을
에덴가든이 눈에 띄었다. 산나물 비빔밥과 전을 먹었다. 과일과 오미자차까지 먹었으니 추석 음식보다 낫다고 한마디씩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어찌 그리 맞는지…. 어릴 때 고촌이라고 불렀던 고기마을을 지나 덕산(德山)마을에 도착했다. 둘째 사촌동생 영곤이와 군대 간 민서 조카가
오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빈 것 같았다.
마을 가까이 신동 앞에 모신 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했다. 성곤 사촌동생이 벌초를 잘 해놓아 고마웠다. 묘 앞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데 이름 모를 큰 벌 한 마리가
난데없이 찾아와서 네댓 번 맴돌며 우릴 깜짝 놀라게 하고 가버렸다. 아마 성묘를 왔으니까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가라고 부탁하는가 싶었다.
예년처럼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에 대해 아는 대로만 이야기했다. 내년엔 족보를 보고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찬송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1절을 부르고 나서 기도를 했다. 마을 어귀 재쩡제에 있는 정자로 와서 준비해 간 과일과 다과와 음료수를 펼쳐 놓고 고향
어르신들과 같이 먹었다. 가족을 소개하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돌아오면서 순창에 들렀다. 우리 대가족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가니까 깜짝 놀랐다. 위아래 층이 들썩들썩했다. 장모님과 몸이 편찮으신 장인 어르신은 싱글벙글하셨다. 저녁상은 잔칫상이었다.
보름달이 아쉽게 어둠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들네는 서둘러 처갓집으로 달려갔다. 세 며느리한테 양해를 얻었지만, 너무 늦어 미안했다.
어느 신문 보도를 보니, 명절 연휴 내내
고향에 머물다 집에 돌아오는 ‘U턴 풍속도’는 옛말이 됐단다. 짧게 차례와 성묘만 하고 쇼핑을 즐기거나 영화관람, 또는 여행을 떠나는 소위
‘D턴 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가며 연휴 풍경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이는 친척·친지보다는 내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핵가족 중심의
소비문화에 따라 나타난 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집 대가족 추석만은 D턴족보다는
U턴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지 않을까?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은 해마다 올 같은 추석 성묫길 추억이
쌓여 아름다운 추석 풍속도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2016.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