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880년대부터 군대의 신식훈련을 시작하면서 외국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1882년부터 일본의 무라다총을 비롯하여 청의 12팡운드 청동포 10문, 영국제 화선총(라이플총) 1000정을 구입했다. 또 미국상사를 통해 4000정의 브릿치 로딩 소총과 가틀링 기관총 6문, 탄약 7500개 그리고 레밍턴 소총 3000정과 피바디 마르티니 소총 1000정, 탄약 20만개를 수입했다. 비용은 홍삼 등을 팔아 충당했다.
고종은 국방력 강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영선사와 수신사에 현지 무기 제조창을 시찰하도록 했다. 이들이 돌아와 기기창을 세워 무기제조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기 제조기술이 부족한 데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추진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1892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정치가 커전은 “서울에 외국기계로 장치한 병기창 기기국이 있으나, 단지 무기 수리에만 쓰이고 있다”고 여행기에 적었다.
영국제 맥심 기관총 사용법을 배우는 대한제국 군인
캐틀링건(미국제) 남북전쟁중 사용됨 20문 수입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식으로 군제를 바꾸고 병력을 늘리는 등 군사력 강화에 나섰으나, 무기제조법보다 러시아제 무기 수입에 치중했다 무기를 제조할 재정이 부족하고 목전의 군비 강화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도 한국이 독자적인 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도 1898년 4월 무라다 연발총을 고종에게 진상했다. 러시아와 일본 외에 독일로부터도 개인화기를 수입하였는데, 1899년 세창양행을 통해 육혈포 300자루, 탄환 4만발을 들여왔다. 영국 무기도 도입됐다. 황성신문(1902. 2. 1)은 “전 선혜청 청사에 영국으로부터 구입한 각종 대포를 보관하고 있는데, 맥심포 6문, 야전포 4문, 산전포 8문과 그 부속기구 일체”라고 보도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무기 제조 기술의 습득보다 완제품 수입에 치중했다. 당시 육군참장이었던 박성기는 상소를 올려 “군부에 포공국을 설치한 것은 포공기계를 만들려고 한 것이고, 우리 기술로도 모슬총의 탄환 정도는 만들 수 있는데, 지금은 군사장비를 외국에서 수입만 하고 만들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여러 나라의 무기를 구입하다 보니 군사훈련은 물론 탄환과 부속품 등 보급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 한말 불어학교 교관인 프랑스인 마텔은 “군대를 만드는 데도 각국의 사관이 들어와 여러 가지 방식을 썼고, 총기도 미국․일본․러시아․프랑스 것이 조선의 연대 쭝에 섞여 있었다:”고 지적했다.
1903년 일본 육군은 13개 사단 (약 13만명)으로 증강되었고, 해군 또한 1905년 4척의 전함, 11척의 순양함으로 늘어났다. 반면 군대 해산(1907년) 당시 대한제국의 병력은 서울에 시위보병 2개연대 약 3600명, 시위기병․포병 등 약 400명, 지방 진위대 8개 대대 약 4800 명으로, 도합 8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런 병력으로 일본의 참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사들였던 신식무기는 군대해산 이후 일제에 압수되거나 일부는 해산군인들이 들고 가 의병에 가담했다. 이로써 쪼선의 부국강병의 꿈은 사라졌다
김낙진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문학박사